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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서구 흑석동 박태상, 박회수 신도비
    서구 흑석동 흑석리역 가는 벌곡로 언덕 오르기 전 좌측 진입하는 폐쇄 도로 끝부분 우측 낮은 야산 도로변 계단에 오르면 '박태상, 박회수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박태상'의 자는 사행이고, 호는 만휴당 또는 존성제이며, 본관은 반남이고, 시호는 문효이다. 문과에 장원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박태상 신도비는 묘와 함께 당초에는 경기도 양주 조암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그를 향해서 남쪽 방향 잡고 있다. 비문은 1702년에 윤증이 짓고 아들 종강이 글씨를 썼으며, 조윤형이 전서를 써서 1735년에 세웠다. 두전은 증 영의정 반계부원군 행이조판서 대제학 시문호 박공 신도비명이라고 새겨 있다. '박회수'의 자는 자목이고 호는 호곡 또는 호하이며, 본관은 반남이고, 시호는 숙헌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의 5대손이며,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진향부사, 동지사, 고부사 등의 자격으로 청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박회수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 조암동에 있었는데, 1962년 사진포에서 흑석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의 왼편으로 이장하였다. 박화수 신도비는 1989년 5대손 찬욱이 박태상 신도비 옆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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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5-02-28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구완동 청자가마터
    대전시 중구 구완동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1997년 11월 7일에 지정되었다. 구완동 어청골 마을의 서쪽에 있는 야산의 동쪽 경사면에 가마가 있다. 가마는 경사면의 중앙에 기왓가마가 있고, 그 좌우로 1기씩의 청자가마가 있다. 1호 청자가마는 기왓가마의 북쪽에 있다. 일반적인 가마축조법은 기반토를 약간 깎아내고 바닥에 모래를 깔아 굽도록 설계한 반지하식 구조이다. 이곳은 가마가 위치할 기반토의 좌우를 깊이 깎아내고, 그 위에 가마를 만들어 가마 전체가 지상으로 나오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유구의 상태는 천장부가 모두 무너졌으나, 가마 벽의 바닥 부분이 약간 남아 있으며,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연도 가까운 부분에는 초벌구이, 조각, 그 아랫부분에서는 재벌구이 조각이 주로 발견되었다. 2호 청자가마는 기왓가마의 남쪽에 있으며, 구조는 1호 청자가마와 같다. 출토유물은 주로 대접과 접시류가 발견되고 그 밖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체로 유약과 태토의 상태로 볼 때 1호청자가마의 출토품보다 저급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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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5-01-2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 건물터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에 위치한 '청동기 시대 집터와 유물' 및 '조선시대 건물터와 수혈'이 위치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집터와 유물]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던 집터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집은 타원형과 장방형으로 땅을 파내고 그 안에 2개의 기둥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집터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무늬없는 토기와 함께 농사 및 개간에 쓰었을 석기가 발견되었다. 아직 대전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건물터와 수혈] 이 유적에서는 조선시대의 건물터 여러 동이 발굴되었다. 대부분 땅에 여러 개의 기둥을 정연하게 세워 만든 고상건물지로서, 주변에 마을이 형성된 점으로 보면 이 건물터는 땅에 닿지 않고 물품 및 곡물 등을 저장했던 창고용 건물터일 가능성이 크다. 그와 더불어 주변 곳곳 시대를 알기 어려운 수혈(구덩이)도 여러 기 발견되었다. 상기 내용은 현장에 설명판이 있어서 도움이 되며, 예전에는 과수원이었다.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공개되어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다. 바로 옆에는 '차윤주.차윤도 효자정려각비', 바로 아래에는 대청호, 백로, 가마우지, 왕버늘나무가 있는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가 있다. 미호동 넷제로 공판장 측면 투시형 담장에는 '미호동 면장 송원용 공덕비'와 길건너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취백정'도 있으니, 한번 미호동 역사탐방을 해보세요. 또한 휴식을 위한 곳으로 로하스가족공원캠핑장, 대청공원, 대청문화전시관, 대청수련원, 카페와 식당, 시와 관련된 비, 물문화관, 대청호오백리길 등이 있으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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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10-2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보급창고
    동구 신안동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보급창고'는 2023년 9월에 국내 최초 공법으로 대전역 동광장에서 신안2 역사공원으로 이동되었다. 이전 이후에 처음 공개한 것으로 바닥과 벽체 기초는 콘크리트이며, 외부 벽체 판재는 일부 교체와 지붕재료도 교체되었다. 내부에 파손된 판재와 기초 콘크리트 일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건물은 철도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이동·보관하던 창고로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조달본부 대전 주재'로 불리다가 '철도청 대전 지역 사무소 재무과 보급 창고'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다시 '구 철도청 대전 지역 사무소 보급창고'로 변경되었다가 현재는 문화 예술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6년에 지어졌으나,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면 기술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지붕들의 각 부재가 삼각형을 단위로 파여지는 트러스 목구조로 지붕을 만들고 건물내부에도 기둥을 설치하지 않아 공간 활용성이 높고, 목재 발판으로 외부를 마감하여 통풍이 잘된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으로 희소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창고 건축의 구조적 특징과 역사적 변천을 파악 할 수 있는 건축물로 보존 가치가 높다. 외부에는 교체 자재가 잘 표시가 없으나, 내부는 너무나 표시가 난것을 어느정도는 외부처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것이 외부 교체나무 고정을 나사못 사용은 정말로 잘 못 복원을 했다. 출입문은 왜? 교체를 했을까? 그렇게 하고도 문화재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부에 옛 판재와 문, 기초 콘크리트를 보관하려면 최소한 받침과 간단한 설명서를 표시하는 것이 도리이다. 이것은 그저 방치하는 수준이다. 과연 누가 문화재를 이렇게 해도 되는가? 복원이란? 어느정도 옛 것과 비슷하게 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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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9-2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덕수이씨정려각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에 위치한 '덕수이씨정려각'은 화강석으로 축대를 쌓아 평지이며, 북측 옆으로 계단이 있다. 정면과 측면 각1칸으로 사면에 홍살을 두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화강석의 8각 장초석 하단에는 초석좌대 위에 기둥은 원기둥이며, 천정은 우물반자에 단청이 되어있다. 정려각 후문 홍살이 설치된 하부에 내부로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송병조와 혼인한 덕수이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뒤로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있고, 멀리 뜰 가운데로 갑천이 흐른다. 정려가 있는 이 마을은 은진송씨 집성촌이다. 송병조는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로 그와 혼인한 덕수이씨는 시부모와 남편을 지성으로 섬겼으나, 남편이 먼저 죽자 예를 다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이러한 덕수이씨는 정절을 후세에 널리 기리기 위하여 정문이 내려졌고 정려문을 세웠으며, 현재의 정려문은 후손들이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려각은 1726년에 내린 '열부학생송병조처덕수이씨지려'란 정려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안에는 '열부덕수이씨정려추기비'란 비와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려 추기비는 1985년에 정향 조병조가 짓고 썼으며, 편액은 1773년 송계한이 쓴 '정려중건기'와 1908년 6대손 송의로가 쓴 '정려이건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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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30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송준길의 묘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송준길의 묘는 처음에는 연기에 장사하였다. 그 뒤 1676년(숙종 2) 회덕, 1689년 공주로 옮겨졌다가 1700년(숙종 26)에 현재의 자리인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으로 이장하였다. 묘표와 묘비는 이장 후에 세워진 것이며, 여기에 문인석 1쌍과 상석이 있다. 묘비문은 외손인 판서 민진후가 짓고, 증손되는 현령 송요좌가 써서 1711년에 건립하였다. 묘표의 대좌 윗면은 연꽃으로, 앞면은 당초문, 그리고 후면은 험상궂은 귀신의 얼굴을 조각으로 당시의 묘석물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묘의 전면에 위치한 상석에 붙여진 향로석은 두 마리의 석수가 향로다리를 감싸안은 특이한 형상으로 차일끈을 매어두는 1조 4개의 차일석 가운데 앞의 두 개는 원숭이 머리 모습이다. 동춘의 묘 아래에는 공조 정랑을 지낸 그의 아들 광식의 묘가 있다. 송준길의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며 1624년 진사가 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다. 효종과 같이 북벌 계획 도중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로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논란 중 승리하여 우참찬·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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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7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용촌동 느티나무 보호수
    서구 용촌동 산39-1번지에 1982년 10월 지정당시 수고 20m, 수관폭 16m로 수령이 약 320년이 대전광역시 보호수 지정번호 6-3-16-3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 수명이 길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나뭇잎이 단정하여 예로부터 충과 효와 예의 나무로 여겨졌다. 또한 단풍이 아름답고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워 가로수나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이 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의 노목으로 수세가 양호하여 1982년 보호수 지정되었다. 기암 괴석과 어울러졌으며, 정자도 바로 옆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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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4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무민사 사당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에 '류혁연의 묘'에 오르기 전 우측에 위치한 '무민사'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15개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돌담안에 '무민사' 사당이 항상 잠겨져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 상부에 '무민사'란 한문 현판이 걸려있다. 전면은 회랑이 평탄하게 되어있고, 단청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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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3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류혁연의 묘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 산 183번지에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류혁연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후기 무신인 야당 류혁연(1616-1680)의 묘이다. 선생은 서산에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삼도수군통제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무신으로서 전략· 군사행정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글씨나 죽화에도 뛰어났다. 죽은 후 나라에서 영의정 벼슬을 내렸고, 묘소는 1781년(숙종 17)에 지금의 자리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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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대전 충렬사
    유성구 장동 자운대 진입 전 충열사삼거리 바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 우측에는 설명판이 있고 3단 돌계단을 오르면 성인문이 있으며, 그 안에 충렬사가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단 상부에는 태극기가 걸려있다. 황충묘 기슭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다 살신구국하신 민영환선생, 최익현선생, 이준열사,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 사진과 이력아래 다섯 분의 위패가 봉안이 되어 있었다. 1968년 8월 22일 건립하여 1997년 5월 3일 다섯 분의 위패봉안 제향행사를 가진 이후 매년 5월 이곳 재단에서 제향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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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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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서구 흑석동 박태상, 박회수 신도비
    서구 흑석동 흑석리역 가는 벌곡로 언덕 오르기 전 좌측 진입하는 폐쇄 도로 끝부분 우측 낮은 야산 도로변 계단에 오르면 '박태상, 박회수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박태상'의 자는 사행이고, 호는 만휴당 또는 존성제이며, 본관은 반남이고, 시호는 문효이다. 문과에 장원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박태상 신도비는 묘와 함께 당초에는 경기도 양주 조암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그를 향해서 남쪽 방향 잡고 있다. 비문은 1702년에 윤증이 짓고 아들 종강이 글씨를 썼으며, 조윤형이 전서를 써서 1735년에 세웠다. 두전은 증 영의정 반계부원군 행이조판서 대제학 시문호 박공 신도비명이라고 새겨 있다. '박회수'의 자는 자목이고 호는 호곡 또는 호하이며, 본관은 반남이고, 시호는 숙헌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박태상의 5대손이며,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진향부사, 동지사, 고부사 등의 자격으로 청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왔다. 박회수의 묘는 본래 경기도 양주 조암동에 있었는데, 1962년 사진포에서 흑석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의 왼편으로 이장하였다. 박화수 신도비는 1989년 5대손 찬욱이 박태상 신도비 옆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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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8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구완동 청자가마터
    대전시 중구 구완동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1997년 11월 7일에 지정되었다. 구완동 어청골 마을의 서쪽에 있는 야산의 동쪽 경사면에 가마가 있다. 가마는 경사면의 중앙에 기왓가마가 있고, 그 좌우로 1기씩의 청자가마가 있다. 1호 청자가마는 기왓가마의 북쪽에 있다. 일반적인 가마축조법은 기반토를 약간 깎아내고 바닥에 모래를 깔아 굽도록 설계한 반지하식 구조이다. 이곳은 가마가 위치할 기반토의 좌우를 깊이 깎아내고, 그 위에 가마를 만들어 가마 전체가 지상으로 나오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유구의 상태는 천장부가 모두 무너졌으나, 가마 벽의 바닥 부분이 약간 남아 있으며, 구조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연도 가까운 부분에는 초벌구이, 조각, 그 아랫부분에서는 재벌구이 조각이 주로 발견되었다. 2호 청자가마는 기왓가마의 남쪽에 있으며, 구조는 1호 청자가마와 같다. 출토유물은 주로 대접과 접시류가 발견되고 그 밖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체로 유약과 태토의 상태로 볼 때 1호청자가마의 출토품보다 저급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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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5-01-2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 건물터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에 위치한 '청동기 시대 집터와 유물' 및 '조선시대 건물터와 수혈'이 위치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집터와 유물]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던 집터와 유물이 출토되었다. 집은 타원형과 장방형으로 땅을 파내고 그 안에 2개의 기둥을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집터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무늬없는 토기와 함께 농사 및 개간에 쓰었을 석기가 발견되었다. 아직 대전의 청동기시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건물터와 수혈] 이 유적에서는 조선시대의 건물터 여러 동이 발굴되었다. 대부분 땅에 여러 개의 기둥을 정연하게 세워 만든 고상건물지로서, 주변에 마을이 형성된 점으로 보면 이 건물터는 땅에 닿지 않고 물품 및 곡물 등을 저장했던 창고용 건물터일 가능성이 크다. 그와 더불어 주변 곳곳 시대를 알기 어려운 수혈(구덩이)도 여러 기 발견되었다. 상기 내용은 현장에 설명판이 있어서 도움이 되며, 예전에는 과수원이었다.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공개되어 청동기시대와 조선시대 건물터가 확인이 되었다. 바로 옆에는 '차윤주.차윤도 효자정려각비', 바로 아래에는 대청호, 백로, 가마우지, 왕버늘나무가 있는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가 있다. 미호동 넷제로 공판장 측면 투시형 담장에는 '미호동 면장 송원용 공덕비'와 길건너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취백정'도 있으니, 한번 미호동 역사탐방을 해보세요. 또한 휴식을 위한 곳으로 로하스가족공원캠핑장, 대청공원, 대청문화전시관, 대청수련원, 카페와 식당, 시와 관련된 비, 물문화관, 대청호오백리길 등이 있으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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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10-2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보급창고
    동구 신안동 '철도청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보급창고'는 2023년 9월에 국내 최초 공법으로 대전역 동광장에서 신안2 역사공원으로 이동되었다. 이전 이후에 처음 공개한 것으로 바닥과 벽체 기초는 콘크리트이며, 외부 벽체 판재는 일부 교체와 지붕재료도 교체되었다. 내부에 파손된 판재와 기초 콘크리트 일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건물은 철도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이동·보관하던 창고로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조달본부 대전 주재'로 불리다가 '철도청 대전 지역 사무소 재무과 보급 창고'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다시 '구 철도청 대전 지역 사무소 보급창고'로 변경되었다가 현재는 문화 예술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56년에 지어졌으나, 일제 강점기 때 사용하면 기술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지붕들의 각 부재가 삼각형을 단위로 파여지는 트러스 목구조로 지붕을 만들고 건물내부에도 기둥을 설치하지 않아 공간 활용성이 높고, 목재 발판으로 외부를 마감하여 통풍이 잘된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으로 희소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창고 건축의 구조적 특징과 역사적 변천을 파악 할 수 있는 건축물로 보존 가치가 높다. 외부에는 교체 자재가 잘 표시가 없으나, 내부는 너무나 표시가 난것을 어느정도는 외부처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것이 외부 교체나무 고정을 나사못 사용은 정말로 잘 못 복원을 했다. 출입문은 왜? 교체를 했을까? 그렇게 하고도 문화재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부에 옛 판재와 문, 기초 콘크리트를 보관하려면 최소한 받침과 간단한 설명서를 표시하는 것이 도리이다. 이것은 그저 방치하는 수준이다. 과연 누가 문화재를 이렇게 해도 되는가? 복원이란? 어느정도 옛 것과 비슷하게 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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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9-2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한전대전보급소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에 '한전대전보급소'가 국가 등록문화재로 2004년 9월 4일 등록이 되었다. 한국전력공사 대전 보급소 건물은 처음에 대전 전기 주식회사의 제3발전소로 건립되었다. 발전소로서 기능 상실 이후 보급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면서, 건물 내외부로 증축과 철거가 이루어졌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외관은 박공지붕을 갖는 두 개의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독특한 형태이며, 적벽돌과 흑회색 벽돌의 배색, 다양한 쌓기 방법 등에서 건축 당시의 재료와 기법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용마루에는 솟을지붕이 있어 조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환기와 채광도 좋다. 건물 내부에는 발전 설비를 옮길 수 있는 견고한 철제 빔이 설치되어 있으며, 외장적인 측면을 고려한 다양한 형태의 구조재는 건립 당시 산업시설의 건축 수법을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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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9-03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덕수이씨정려각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에 위치한 '덕수이씨정려각'은 화강석으로 축대를 쌓아 평지이며, 북측 옆으로 계단이 있다. 정면과 측면 각1칸으로 사면에 홍살을 두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화강석의 8각 장초석 하단에는 초석좌대 위에 기둥은 원기둥이며, 천정은 우물반자에 단청이 되어있다. 정려각 후문 홍살이 설치된 하부에 내부로 들어 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송병조와 혼인한 덕수이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뒤로는 비교적 높은 구릉이 있고, 멀리 뜰 가운데로 갑천이 흐른다. 정려가 있는 이 마을은 은진송씨 집성촌이다. 송병조는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로 그와 혼인한 덕수이씨는 시부모와 남편을 지성으로 섬겼으나, 남편이 먼저 죽자 예를 다하여 삼년상을 마치고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이러한 덕수이씨는 정절을 후세에 널리 기리기 위하여 정문이 내려졌고 정려문을 세웠으며, 현재의 정려문은 후손들이 근래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려각은 1726년에 내린 '열부학생송병조처덕수이씨지려'란 정려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안에는 '열부덕수이씨정려추기비'란 비와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려 추기비는 1985년에 정향 조병조가 짓고 썼으며, 편액은 1773년 송계한이 쓴 '정려중건기'와 1908년 6대손 송의로가 쓴 '정려이건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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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30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송준길의 묘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송준길의 묘는 처음에는 연기에 장사하였다. 그 뒤 1676년(숙종 2) 회덕, 1689년 공주로 옮겨졌다가 1700년(숙종 26)에 현재의 자리인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으로 이장하였다. 묘표와 묘비는 이장 후에 세워진 것이며, 여기에 문인석 1쌍과 상석이 있다. 묘비문은 외손인 판서 민진후가 짓고, 증손되는 현령 송요좌가 써서 1711년에 건립하였다. 묘표의 대좌 윗면은 연꽃으로, 앞면은 당초문, 그리고 후면은 험상궂은 귀신의 얼굴을 조각으로 당시의 묘석물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묘의 전면에 위치한 상석에 붙여진 향로석은 두 마리의 석수가 향로다리를 감싸안은 특이한 형상으로 차일끈을 매어두는 1조 4개의 차일석 가운데 앞의 두 개는 원숭이 머리 모습이다. 동춘의 묘 아래에는 공조 정랑을 지낸 그의 아들 광식의 묘가 있다. 송준길의 자는 명보, 호는 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며 1624년 진사가 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로 기용되었다. 효종과 같이 북벌 계획 도중 김자점의 밀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대사헌을 거쳐, 1659년 병조판서로 송시열과 같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논란 중 승리하여 우참찬·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성리학자로서 예학에 밝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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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7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용촌동 느티나무 보호수
    서구 용촌동 산39-1번지에 1982년 10월 지정당시 수고 20m, 수관폭 16m로 수령이 약 320년이 대전광역시 보호수 지정번호 6-3-16-3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 수명이 길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나뭇잎이 단정하여 예로부터 충과 효와 예의 나무로 여겨졌다. 또한 단풍이 아름답고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워 가로수나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이 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의 노목으로 수세가 양호하여 1982년 보호수 지정되었다. 기암 괴석과 어울러졌으며, 정자도 바로 옆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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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4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무민사 사당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에 '류혁연의 묘'에 오르기 전 우측에 위치한 '무민사'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15개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돌담안에 '무민사' 사당이 항상 잠겨져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전면 상부에 '무민사'란 한문 현판이 걸려있다. 전면은 회랑이 평탄하게 되어있고, 단청도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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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3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류혁연의 묘
    대전광역시 서구 평촌동 산 183번지에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류혁연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후기 무신인 야당 류혁연(1616-1680)의 묘이다. 선생은 서산에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삼도수군통제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무신으로서 전략· 군사행정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글씨나 죽화에도 뛰어났다. 죽은 후 나라에서 영의정 벼슬을 내렸고, 묘소는 1781년(숙종 17)에 지금의 자리에 이장되었다.
    • 오피니언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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