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연재, 그녀는 누구인가?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강원도 고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김성달(金盛達, 1642~1696)과 어머니 이옥재(李玉齋, 1643~1690) 사이에서 여덟 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이다. 김호연재의 고조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과 종고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충절로, 외고조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문장가로 각각 17세기를 우뚝하게 빛낸 명현들이다.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는 당대의 화려한 관직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치고 고초를 겪음으로써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1636년 12월 극한의 추위 속에 발발한 병자호란! 김상용은 혼돈의 전란 상황 속에서 빈궁과 원손을 수호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 김상용은 이듬해 1월 22일 강화 남문이 함락되자 누대에 있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산화하였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청나라가 요구한 조선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1645년 2월까지 볼모생활의 고초를 치렀다. 이렇듯 김상용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김상헌은 굽힐 수 없는 척화의리로 각각 혹독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후인들에게 영원한 충절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후손들은 ‘청풍계(淸風溪)’ 곧 오늘날의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옥인동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 계곡 일대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石室)’에 거주하였는데, 조선후기 정치⋅철학⋅문화 영역의 선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청풍계는 진경(眞景)과 진시(眞詩) 운동을 전개하며 당시의 문학풍토를 쇄신한 ‘백악시단(白岳詩壇)’의 공간이었고, 석실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큰 맥을 주도하는 본산으로 그 공간적 입지를 굳혔다.
김호연재는 이렇듯 드높은 충절과 학문 전통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김호연재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가문의 역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으므로 집안에 대한 긍지가 높았다. 그러한 의식의 한 단면이 한시와 <자경편(自警篇)> 등의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구현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비록 여자의 몸일지라도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주신 은혜를 입어 명문가에서 생장하였으니, 어찌 용렬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
(<자경편>, 自修章. 雖是女子之身, 蒙父母生成之恩, 而生長於名門, 寧可碌碌, 與禽獸之徒, 爭長競短乎?)”라고 말하였다.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의 전통은 김호연재의 삶에 원천적 자존이 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삶이 금수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근신하고 경계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고독이 엄습해 올 때면, 친정 부모님의 길러주신 은혜와 명문가 후손으로서의 자존심으로 다잡았다. 시가의 가까운 친족들은 김호연재의 삶에 대하여 한결같이 ‘요조숙녀(窈窕淑女)⋅여사(女士)’로 칭송하였는데, 명문가 후손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의식이 실천적 지성으로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김호연재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며 존중하였다. 부부는 한가로울 때면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다.
때때로 술병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누각에 올라 고기잡이배가 마을 어귀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시흥(詩興)이 일 때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를 지었고 그 운(韻)에 화답하였다. 그리고 서로의 시에 대해 평가를 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김성달은 아내의 시를 ‘매우 아름답다(佳, 甚佳, 絶佳)’라고 평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뜻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쳐(語勢不成處, 以其本意點改)’ 주기도 하였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로 집을 떠나 있게 될 때면 안부 편지와 시를 써서 부인에게 보냈다.
이옥재도 화답시를 써서 편지와 함께 부쳤다. 부부의 시집『안동세고』에는 그러한 정경이 절절히 묻어나 있다.
부부의 사랑과 믿음에 바탕 한 연가적 한시 작품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독보적이다. 고전 문학사에서 남녀가 시를 주고받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 예는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시집 『안동세고』, 자녀 9남매의 시집 『연주록(聯珠錄』은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鴨東古今未曾有)’ 문학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김호연재의 어머니 이옥재는 잦은 병고에 시달렸다. 김호연재 열 살 때 어머니가 4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김성달은 아내의 무덤을 자주 찾아가 눈 덮인 봉분을 쓸기도 하고, 오매불망 꿈속에서 애틋하게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절한 일은 아내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한 통의 편지이다. 아내는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 병석에서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끝내 남편의 손에 전달되지 못한 채 유묵 속에 끼어 있었다. 사후 일 년 만에 아내의 편지를 받아 보게 된 김성달은 오열하고 말았다. 김성달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생전에도 그러하였지만, 사후에도 애틋하였음을 <읍이군서> 라는 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읍이군서(泣李君書)>
아내의 유묵 펼쳐보노라니
눈길 머무는 곳마다 처연히 눈물 떨어지네.
이제야 지난해 초여름의 편지를 보게 되었나니
병중의 사연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슬픔인 것을.
李君遺墨若爲披
看到悽然輒淚垂
今得去年初夏札
病中辭說最堪悲
김호연재 부모의 문학 전통과 감성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부모와 자식, 형제끼리, 서모와 적자녀, 적자녀와 서자녀, 아들과 딸 구분 없이 전 가족이 문학 작품을 향유하고 창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호연재는 19세에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의 증손부가 되어 회덕의 여성으로 살다 갔다. 두 명문가의 위상과 가통(家統)을 이어나간 그 삶이 결코 녹록치 많은 않았으리라. 김호연재가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이 지난 오늘. 이제 김호연재는 대전과 충남을 너머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녀의 자존이, 그녀의 삶이, 그녀가 남긴 많은 문자향(文字香)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호연재는 우리 대덕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역사, 그리고 미래다!
문희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