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17(목)
 

이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장미가 승전보를 알리며 여름날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다. 아름다운 승전병이 된 장미처럼 고결한 어르신의 귀환도 따뜻한 미담으로 남는다. 구순을 넘기셨지만 총기를 잃지 않은 어르신. 교양있는 말씨, 고운 차림새, 어머니는 아직 ‘여자’를 잃지 않으셨다. 95년을 살아내신 어머니의 인생은 연세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수많은 일들을 겪으셨지만 남는 건 ‘사랑’이라고 단언하신다. 사랑의 모체는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세상사 이모양 저모양으로 사랑의 실타래가 엮여있다. 결국,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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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통 사랑으로 채워진 유년시절

 1931년 음성군 금왕에서 출생하고 무극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서울 외갓집에서 서울여상을 다녔다. 그 시절에 소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집안의 여건이 풍족했다는 방증이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읍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여상 졸업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협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의 행보는 ‘신여성’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꽃 같은 날들이었다. 이제는 그리워하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린 그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2024년 94살이 되었다. 94년을 살고 있는 오늘이 나도 믿기지 않은 세월이다. 열세 살까지 동생이 없던 나는 중학교에 가서 여동생이 태어나 동생은 우리 집안에 보물이었다. 우리는 맏딸인 나 달홍, 정림, 대현, 광현, 정숙, 미숙 이렇게 6남매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13살까지 동생이 없던 것은 그 사이 동생들이 홍역으로 두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더더욱 동생의 탄생은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초등학교만 나와서 여느 집 딸들처럼 집안일을 거드는 일상이 당연하다고 보셨지만 외할아버지께서 앞으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나를 서울 외갓집으로 유학보내셨다. 나는 서울여상에 입학해 홍제동 고개를 넘어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서울여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같이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읍에서 유학을 갔지만 금왕에서 포목점을 하던 집의 딸이라 생활이 궁핍하지 않아서 끈달린 검정 가죽구두를 신고 서울 친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제주, 평양, 부산, 만주 등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도 많았다. 다들 그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집안의 딸들이었다. 학급은 송, 죽, 매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송반에서 공부를 했다. 세라복을 입고 주판을 놓던 ‘열다섯 살 달홍’이를 떠올려보니 너무 눈부신 날들이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방학때 고향에 내려오면 온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주었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나를 챙겨주시던 동네 어르신들까지 온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물난리가 나서 철로가 끊겼다. 기차에서 내려서 급히 전보를 치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돌아 금왕에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복입은 어린 나는 물난리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동네분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남의 자식이 아닌 우리 자식이라고 여겨주던 마을 분들 사랑에 감격스러웠다. 부모님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아서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다. 유년시절 사랑받던 추억을 생각하면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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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의 풍미는 단맛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여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를 했다. 참하고 성실한 여행원으로 인기도 제법 많았다, 그 와중에 아버님이 음성에서 농협에 다니는 청년(박승식)을 만나보시고 나의 배필감으로 적역이라고 혼사를 진행하셨다. 우리 나이 때는 결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어서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를 운명으로 만나게 되었다.

1953년, 결혼식 당일 날 남편 얼굴을 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라 안심은 했지만 그렇게 얼굴한번 못 본 남자와 혼인을 하던 그 시대를 살았다. 남편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 점잖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대학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운형씨 피살사건이 터지면서 시국이 어수선하여 고향에서 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7남매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평탄하고 고운 길만 걷던 나에게 운명이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나 애꿎은 장난을 걸어왔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진천에서 테니스대회를 마치고 와서 속이 안좋다고 해서 한의원에 갔더니 대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해주었다. 황급히 병원에 갔더니만 위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은 암이 흔한 병이 되기도 했고 의술도 발달해서 완치 확률이 높아졌지만 50년 전만 해도 암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연상하곤 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이었다. 다행히 수술을 하고 그냥저냥 벼텼는데 수술 후 3년 만에 재발을 하고 50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에 큰 굴곡을 만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7남매와 함께 남겨진 그날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여인’ 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옥죄던 시절

유년 시절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고단한 인생길을 걷지 않았다. 50살이 돼서야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생살이 찢기는 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끝 모를 슬픔과 처음으로 직면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스스로 일상의 즐거움을 차단했다. 안경도 쓰지 않았다. 예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을 거 같아 두려웠다. 40년 전의 사고방식은 ‘사별한 여인’이라는 이름을 저울에 올리면 그 삶의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엄마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인내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았던 증인의 입장으로는 지금 여성들의 사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자기 결정권이 있고 혼자서도 당당한 여성들이 보기 좋다. 내가 동년배에 비해서 배움이 넓고 깊었지만 세상 속에서 여성의 한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0살이 가까워오니, 결국 사랑이다

지금은 막내아들 집에서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늘 마음의 저울에서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아직도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 90이 넘은 지금 아직도 나는 현역이다. 오래전 우리 땅이 터미널 부지가 되면서 음성버스 터미날 운영권을 갖고 있어서 전표 관리를 아직 내가 하고 있다. 서울여상에서 공부했던 저력을 지금까지도 발휘하고 있다. 성업 할 때는 대성여객, 서울버스, 신선버스, 경일여객 등 9개 회사를 관리했고 무표가 들어오면 암산으로 계산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사랑이라고 즉답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우리 아이들한테 돌려주었고 이웃들과도 나누었다. 나이 들어 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까닭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정 덕분이었다. 40살부터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내내 봉사활동을 해왔다. 대한어머니회 음성지회장, 육영회회장, 평통위원, 여성단체협의회 음성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면서 봉사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봉사활동때는 늘 호박죽을 직접 끓여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 봉사자들과 푸짐하게 나눠먹곤 했던 추억이 인생 말년의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유년 시절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라 특별한 명분 없이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 “나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라고 했던 말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씩만 실천한다면 세상이 강퍅해졌다는 아쉬운 소리가 줄어들 것 같다. 백살이 가까워오니 가족이나 이웃들이 작은 마음 하나씩만 나눠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결국, 사랑밖에 남는 게 없다. 이제 더 이상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떠날 일은 없겠지만 잠잠해진 바다 위로 유유자적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를 보는 것과 같은 그 안식의 시간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호사다. 오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거친 바다와 싸우고 귀환한 승전병의 미소를 띄고 있다. 지나온 나의 인생이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을 건넨다면 여한이 없다는 말로 화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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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의 시간,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귀환한 승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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