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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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 맹모삼천지교
    예전 어느 일간지에서 역 맹모삼천지교 칼럼을 읽었다. 신선한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감동을 받았다.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산다는게 다는 아니며 아무리 열약한 환경일지라도 슬기롭게 잘 이용하여 배울 것은 배우면서 극복하면 더욱 좋다는 내용이다. 맹자의 어머니 급씨가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열약한 환경이 부정으로만 볼수 있는가 첫 번째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교육 시킬곳이 아니구나 한탄하여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인하여 공동묘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엔 공동묘지가 많았다. 공동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한다. 장례 행위를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삶을 살으려고 노력 했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가지지 않는가 혹은 부와 명예는 없지만 가치있는 진정한 삶을 살았는가.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시장이었다. 어린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도 아니구나 하고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시장 사전적 정의로는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정한 장소 또는.상품으로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범위나 영역이다. 즉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려하는 소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끄러운 환경이 반드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장소이다. 과연 시장은 아동 교육에 꼭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 그속에서 사람들의 어울림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시장은 경제의 축소이다. 그나라의 경제를 보려면 시장을 가보라고, 사람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도 말이다. 노동의 중요성을 깨닭고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재화를 올바르게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낭비적인 재화 사용은 안되며, 노동 없이 벌어오는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은 엄청난 죄이다. 이런 재화는 쉽게 나가버린다.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가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가 종종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부닺치기 마련이다. 부딪친다해서 그냥 주저 앉을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서 맹자의 어머니가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며 맹자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한 어머니 속에서 자란 맹자가 위대한 현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폭 넓게 생각해볼 필요 있다. 다시말해 정신과 물질을 잘 음미 할 필요가 있으며, 않좋은 환경속에서 자랐다고서 반드시 잘못되는 것도 아니며 극복 잘해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진화론 과학자인 다윈은 종의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종이라고 하였다. 자녀들을 위한 진전한 교육 지식을 많이 배우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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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3
  • 추억 진행형 신탄진
    신탄진은 나름대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신탄진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땐 전매청(지금 KT&G)에서 파고다 아리랑 신탄진 은하수라는 이름 가진 담배들이 나왔다. 정부에서는 1965년 신탄진에 연초제조창(지금 KT&G)을 만들었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정한 모양인 것 같다. 대전에 살면서 신탄진 지명소리를 많이 들었고 담배가계 보면 신탄진담배를 많이 보았고 담배심부름도 했으니 잊을수가 없다. 옛 지명은충남 대덕군 북면으로 불렸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신탄진읍으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집에 전화국서 발행한 충청남도 전지역 전화번호부가 있었기에 즐겨보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탄진 전화번호를 열심히 보았다. 전화번호는 국이없는 2자리와 3자리 였고, 석봉리에 사는 주민들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한 곳만이 평촌리만 적혀있었고 연초제조창으로 기억하고 있다. 석봉리와 평촌리만 있고 다른 리는 없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대전에서 신탄진 가는 방법은 좌석버스였고 요금은 3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 성인기분 15원인가 20원) 버스는 많지 않았다. 1973년 아버지는 이모부 친척의 도움으로 신탄진서 포도농사를 지으셨다. 어느날 나랑 동생이랑 함께 포도밭에 갔다. 남경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드넓은 포도밭이 보였다. 지금은 주택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712번 버스 종첨) 남경마을 버스정류장 자리에서 신탄진역이 보이길래 걸어가보자고 하여 같이 걸어갔고 역 옆에 육교가 있어 올라갔다. 어느 할머니가 들고있는 짐을 같이 내려달라고 하여 도와주었다. 신탄진역안 철길을 바라보니 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역무원 2명이 양쪽 폴랫포옴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라 힘들어 했다. 포도밭으로 되돌아와서 동네아이들과 놀았고 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먹으라고 많은 포도를 따서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가 바래다 주었는데 원동시장에서 내려 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느라 힘들었다. 이후로는 신탄진에 가질 않했다. 80년 통일호 열차타고 서울가는데 신탄진역에서 섰으며, 사람들이 제법 탔다. 신탄진에서도 통일호도 서는가 생각했다. 80년대 대청댐을 신탄진을 통해 여러번 갔지만 무관심했다.KT&G에서는 지금처럼 벚꽃 놀이를 했으며 2번 정도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신탄진을 가게 된 계기는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2006년에 동구에서 살다가 법동으로 이사와 대덕구민이 되었고 2007년 1월1일자로 연기군 동면(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았기에 신탄진을 거쳐가야했다. 신탄진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조치원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아침 7시 55분 첫버스 타고 다녔다. 조치원 전의 연서지역에서 근무할땐 신탄진역서 기차타고 다녔다. 연기군이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남지역으로 발령 않받아 퇴직할때까지 계속 신탄진을 거쳤다. 가끔 휴일에는신탄진 시장 로하스공원 수영장 대청댐 대청공원 신탄진공단 등등 친숙해지려고 다녔다. 퇴직 후 유튜버가 되어 신턴진의 다양한 볼거리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으며, 대덕마을신문명예기자가 되어 (구) 신탄진도서관에 가서 취재도 하였고 정보검색과 독서를 하고강좌도 들었다. 지금은새로 지은 석봉도서관이 대신하고 있다. 대덕구 주최로 신탄진서 하는대청호 고래축제와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가 하였다. 최근 대덕국민체육센터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하였으며,새마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구의장상을 받았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경품추첨을 잘하여 많은 상품을 받았다. 추억진행형이되어버린 신탄진 좋은 추억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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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 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1956년 가수 안정애(본명 안순애)는 신곡 대전부르스를 발표 하였다 “잘 있거라 나는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시작되는 노래로 2절까지 있으며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이다. 안정애가수를 간략히 소개하면 193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였으며 부유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녀가 가수가 된 동기는 집 근처가 터미널이 었는 입지적 조건덕에 지방공연을 자주 보아,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서울에 상경하였지만 성과가 없어 하동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시 상경 하여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부른 가수 고복수(처 황금심가수 아들 고영준가수)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악착같이 배웠으며 신인 선발무대에 나가서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백설희‘'봄날은 간다',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서 신인가수로 박탈되었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첫 곡은 밤비의 블루스 였으며 히트를 치자 대전부르스 순정의블루스 연락선불루스 이별의김포비행장 애정산맥 등 주로 블루스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하여 불렀으며 예명을 안정애로 하였고 또 다른 호칭은 “블루스의 여왕”이었다. 대전부르스 노래가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노래를 작사한 최치수는 10년간 열차 승무원을 하였으며 이후 작사자가 되었고, 신세기레코드사 직원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대전역 인근에서 숙박을 했다. 어느날 새벽 0시40분 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보슬비를 맞으며 슬픈 이별하는 모습을 보았고 남자는 천천히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0시50분 출발했고 여자는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끝까지 지켜 보아야 했다.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쓰라린 심정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그시절 열차와 역의 풍경을 잘 담아 가사를 만들었으며 승무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였다. 지은 노래를 김부해에게 전해주었고 김부해는 4/4박자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를 보면 가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주곡부터 나온다. 단번에 들어보면 완전 귀에 익어 대전부르스 곡이구나 알 수 있다. 최치수 작사자는 대전부르스 말고도 용두산엘레지 눈물도말렸오 사랑이냐 돈이냐등 많은 노래를 지었다 작곡가 김부해 역시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대전 부르스가 발표되자마자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음반은 출반 3일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소속사인 신세기 레코드는 야간작업을 강행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특별 상여금을 주었고 가수 작자사 작곡자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인기덕분인가 1963년 대전부르스는 대전발 0시50분 제목으로 영화로 나왔다. 이종기 감독 이성근 제작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엄앵란 남양일 김동원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음악은 김부해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 같이 독촉하지만 젊은 소위는 잊을수 없는 누님을 찾고 그 누님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위는 누님을 만난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누님이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이때 그에게는 전방 수색대장으로서의 임무가 떨어진다. 그는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슬픈 시나리오이다. 1980년 조용필 가수가 대전부르스를 조용필1집에 넣어 불렀으며 역시 히트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가 처음 부른 곡으로 생각했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당시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50년대~60년대에 잠깐 존재했던 열차로 서울역서 저녁 8시 45분에 출발,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한 뒤, 10분의 기관차 교대 시간을 거쳐 0시 50분에 목포역으로 가는 호남선 하행 마지막 열차였다. 그시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해였으며,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고 서울서 목포까지 완행열차를 탄 사람들 열차여행에 매우 힘들어 했으리라 본다, 완행열차 이제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되었지만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고 나 역시 추억이 있다. 그당시 목포는 부산항과 함께 일본,만주,사할린에서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귀향하던 귀향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한국 땅으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으며, 이들이 먹고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리고 몰리던 시대로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1960년 새벽 3시30분으로 열차시간표가 바뀌었다. 대전에 살고있는 나로선 신기했다. 조용필 가수로 인해 대중가요 제목에 대전이라는 이름의 제목이 있다니 주로 부산 목포 인천 서울 제주등 있지만 호기심을 자아냈고 2절까지 열심히 불러 배웠다. 그러나 나중에 안정애 가수가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어떤 가수인가 알게되었다. 1999년 대전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뉴스로도 나왔다.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 라고 써있었고 뒷면에는 대전 부르스 노래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가서 보았으며 멋지게 만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비에 가수 이름이 빠졌다. 안정애가수가 조용필 이름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만일 넣지 않는다면 내 이름마저 빼겠다고 강한 주장으로 넣지 않했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2016년 대전역 복합역사 건설때 노래비가 철거된 뒤 사라졌다.(개인 생각으로는 그 주변 어디에 있으리라 보며 확인 하려 함 몇 년전에 얼핏 본 기억이 있음) 2009년 당시 이장우 대전동구청장이 동구청 주최로 대전부르스 축제를 하였으며 구경 가보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축제였다. 그가 2022년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종의 프리퀄로 대전0시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나서 2023년 8월11일(금)부터 17일(목)까지 2023 대전0시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원도심인 동구 중앙로 길부터 시작하여 목척교 지나 충남도청 앞까지 성황리에 하였다. 본인도 매일 가서 구경하다 시피 하였고 최대로 즐길수 있을만큼 즐겼다. 그리고 유튜브를 제작하기에 그래도 하나 정도는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1편을 올렸다. 2024년 8월 9일~17일까지 진행한 대전0시 축제 나름대로 즐겼으며 생각지않게 상품도 탔다. 유튜버로서 블랙이글에어쇼 시간여행 퍼레이드 의 일부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후 가수 공연은 개인사정상 보질 못했다. 최치수 그가 대전에 도착하지 않고 다른 도시 역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니면 그시간 여관에서 잠을 잤다면 대전부르스는 나오질 못했으리라 본다. 최치수 김부해 안정애 그리고 조용필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전 미래 즐거움의 씨앗을 심어준 영웅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작사자 작곡자는 고인이 되셨지만 안정애 가수는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오래전 TV로 잠깐 본 기억은 있다. 계속 행사를 한다면 고령이지만 한번정도는 초청 해야 하며 조용필 가수도 초청 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행사 참가 때문에 대전부르스를 부른 젊은이들 구경한사람들 행사를 만든 공무원들 이노래가 언제 어떻게 누가 불렀는가 물어보고 싶다. 안정애라는 가수를 알고 있을까 . 마을신문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싶다. 작년 올해 축제를 보면서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을 여러번 하였으며 누구에게도 말을 하였다. 대중가요에 대전을 가사로 넣은 곡도 있다. 대표적으로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 못잊을 대전의밤’ 김혜연 가수가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남인수가 불렀던 울리는경부선 3절가사에도 나온다. 이 노래도 여러번 들어보았으며 울리는 경부선은 3절까지 알고 있지만 못잊을 대전의밤은 나와 정서가 맞지않은지 익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전의 상징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인가 대전부르스 꿈돌이와 함께 대전의 상징이다. 이번 0시 축제에서도 대전부르스 전국가요제를 별도로 열었다. 내년에 이 행사를 한다면 다시한번 재미있게 구경하련다. 가끔이나마 가요무대 혹은 유튜브를 통해 대전부르스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쉽다면 음악성이 전혀 없어 다루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룰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 독주라도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 기본 몇곡은 알고 있는데 안정애 가수가 불렀던 밤비의 블루스 등 2-3곡을 배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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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 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제헌절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과제 제헌절(制憲節)은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의원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만들어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에 의거해 제정된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올해 76주년을 맞았다. 제헌절은 제정될 당시부터 공휴일이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토요휴무일) 시행에 따라 2005년 6월 30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개정되면서 식목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미군정(3년)을 거쳤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국회의원 198명(제주도 2명은 선출 못 함)을 선출하고 5월 31일 제1대 국회가 개원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춰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이제까지 76년의 우리 헌정사는 제1차 발췌개헌으로 시작된 이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헌법개헌 등 총 9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수난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 원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실정법, 국내법, 공법, 실체법에 해당하며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모법이라고 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103조로 구성됐다. 국가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국민주권의 원리, 영토, 국제평화주의를 규정했다. 평등권과 더불어 다양한 자유권을 규정했고 노동3권,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 무능력자 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며,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했고,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탄핵재판소를 뒀다. 경제 질서에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부차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경성제국대학 3천재 중 한 사람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이제까지 9차례나 인위적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반영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보다 현실 적합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행헌법도 시공을 초월하지는 못해 앞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도록 일부 개정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떤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혁신, 정의, 안전, 인권, 상생, 평화통일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당하게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저항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와 애국심이 강해 4 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 10민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저항권을 꾸준히 강화했다. 국회는 제헌절(制憲節) 제76주년을 맞아 제헌(制憲)이념과 정신에 걸맞게 그 정신을 본받고 교훈 삼아 국회로서의 기능이 여,야 정쟁의 도구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든다든지 이용하면 안 되며, 국회의원도 특권을 내려 놓고 이젠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입법부의 국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일반 시민, 국가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현장 중심의 법교육과 정치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 준법정신과 사회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military coup)로 정권을 잡아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후퇴시키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 헌정을 유린한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구속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들에게는 포상과 보상을 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와 내란으로 정권을 잡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해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한 반민주 행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경축하고, 태극기의 올바른 게양과 관리를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 중이다. 제헌절에 태극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하고 날씨가 좋지 않아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지 않는다. 2. 제헌절 제76주년 경축행사 대한민국 국회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제헌 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제76주년 제헌절 경축식은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그리고 최재해 감사원장과 전직 국회의장, 정당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단, 헌정회원, 제헌국회의원유족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경축공연 1, 감사패 수여, 헌정회장 기념사, 국회의장 경축사, 경축공연 2, 제헌절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연하게 합의하는 만큼만 개헌을 추진하자”고 여야 정당에 제안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이를 위한 공식적인 개헌 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헌법의 가치를 기억하고 국회가 국민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주제영상 상영에 이어, 대한민국의 최극단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 경찰 및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영상합창단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경축합창단의 <내 나라 내 겨레> 합창이 진행되며, 참석자 전원이 ‘제헌절 노래’를 부르며 경축식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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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7
  •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와 기념식 실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1980년 5월 18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일어난 민중시위에 대하여 전두환과 신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민중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진압 하여 직접 사망자 193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 65명, 부상자 3천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천589명을 발생시켜 광주 시민들은 지난 44년간 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힘들게 살았다. 그런데 고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아직까지 대부분 호화롭게 생활하면서 사과 한 마디 없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공분을 사고 있다. 불행중 다행이도 전남대 5·18연구소와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난 44년간 수많은 노력을 해온 결과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아무리 은폐하거나 조작해도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29선언과 2017년 촛불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5·18기념식 지정곡인 백기완·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과 대만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애창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나눔과 소통, 공동체 정신은 지금 국가의 복합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크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5월 18일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광주시는 5월 18일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2011년 5월 25일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유례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앞으로 외신 기자와 나종태 사진작가가 목숨을 걸고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과 영상, 전일빌딩 헬기사격 245개 흔적, 고 조비로 카토릭 신부의 청문회 증언, 생존 시민군들의 증언, 생존 게엄군의 양심고백, 북한군 개입설과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공격 사건 조작 규명 등을 참고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그 진상이 만천하에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를 국민과 역사 앞에 하나도 남김없이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 행방불명자 소재를 파악하고, 시민군과 시민군의 편에 섰다가 피해를 입은 경찰공무원과 군인과 해직 기자를 찾아내 명예회복과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만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족들의 한이 풀리고, 왜곡된 사회정의와 역사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2.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식 실황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5·18민주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오월, 희망이 꽃피다'를 주제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헌화·분향, 오월 영령에 대한 묵념, 경과보고, 기념공연, 기념사 순으로 엄수됐다. 기념식장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강기정 광주광역시장,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등 정관계 인사와 5·18민주유공자, 유가족 등 2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윤 대통령과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 오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 “오늘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와 눈물 위에 서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운 연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은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고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오월의 정신을 이어온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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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특별기고 불기 2568(2024)년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불교의 교리와 문제점과 당면 과제 불교는 석교(釋敎)라고도 한다. 불교라는 말은 부처인 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 : 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불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불교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교는 지혜(智慧), 자비(慈悲), 평등(平等)을 강조한다. 불교는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을 강조한다. 불교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 즉 해탈(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는데,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불교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고 있다. 불교는 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아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극복하고 부처가 되고자 항상 수행 정진하는 자력 종교이다. 한국 불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절과 암자에서 스님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고, 각종 시험 합격 기원 불사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등 불교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주지 스님이 수행정진을 게을리 하고, 공금을 횡령하는가 하면, 중요 문화재 관리를 소홀히 해 도난당하고, 여자 신도를 농락해 사회문제가 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 꿈의 사회로 급변하면서 제4차산업혁명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불교 교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절에 가보면 젊은 신도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노쇠한 부인들이 신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도수가 해매다 줄어들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 불교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로 중요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찰이 명산의 명당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사회와 국가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서산대사·사명대사·청담스님·성철 스님·서암 스님·법정 스님 등 수많은 훌륭한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고, 국난을 당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하면, 기독교와 달리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며 종교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어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많이 받고 있다. 한국 불교는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 포교에 성공한 외래 종교의 포교 방법을 벤치마킹해 젊은 층을 대상으로 포교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잘 하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불기 2567주년을 맞이해 스님 대상 재교육 강화, 사찰과 암자에서 스님들의 무속행위 금지, 일탈 스님에 대한 형사처벌 강화, 사찰 중요문화재 관리 강화,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경전 수정보완, 정치와 종교의 분리, 포교 강화, 불교 정화운동 전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시 증가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강력하게 실행해야 한다.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1주일 앞둔 5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연등행렬이 이어졌다. 연등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연등행렬은 형형색색 빛을 밝혔다. 연등회는 지난 2020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인 5월 15일 전국 사찰에서는 불교계 종단들로 구성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가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Peace of Mind, Happiness of the world)'을 올해 봉축 표어로 삼아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법요식을 올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날 오전 10시 총본산인 서울 종로구 소재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과 종정인 성파 대종사, 정관계 인사 등 약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축 법요식을 봉행했다. 진우스님은 앞서 발표한 봉축사에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 깨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온 국민이 모두 부처님의 대자비와 지혜 속에서 내 마음의 평안과 세상의 평화를 일구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한다"고 밝혔다. 대한불교천태종과 한국불교태고종도 이날 오전 각각 봉축 법요식을 열어 부처님이 오신 의미를 기릴 예정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앞서 공개한 메시지에서 "연등의 찬란한 빛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을 환히 밝히길 소망한다"고 밝혔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모든 승가와 불자들께 마음 모아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고 김종생 총무 명의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해 축사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을 언급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 언제나 국민과 함께해 왔다며 한국 불교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늘 부처님의 마음을 새기면서 올바른 국정을 펼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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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특별기고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92주년을 경축하며
    1.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군인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지 92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본명 尹禹儀, 1908-1932)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오전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로 많은 피해를 당한 일제가 보복으로 임시정부를 밀착감시하며 혹독한 탄압을 가하자 임시정부는 상해, 항저우, 전장, 청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무려 4000Km를 이동하며 광복군을 창설하고 무장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해 11월 일본으로 호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금택형무소 교외 미쓰코치 공병작업장 내 산골짜기에서 잔혹하게 총살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의 파평 윤씨 문중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후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마을의 최병대(崔秉大) 선생에게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 14세부터는 예산군 덕산면 둔2리 노곡 16길에 위치해 있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후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 사서삼경과 한시를 배웠다. 1923년 오치서숙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인 ‘오추嗚推)’ · ‘옥수(玉睡)’ · ‘임추(壬椎)’ 등을 발간했다. 1926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야학을 개설했다. 1927년 20세 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했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기도 했다.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지만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이를 기반으로 농촌 자활운동을 펼쳐나갔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0년 3월 6일 새벽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비장한 출향가를 써놓고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백범(白凡) 김구(金九, 본명 金昌洙, 1876-1949)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애국지사로 항일독립운동가, 낭만적인 시인, 농촌개혁가, 농민계몽가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홍구공원 폭탄투척만 간단하게 기록해 놓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를 단지 테러리스트(terrorist)로만 기억하고 있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로 국사 교과서의 윤봉길 의사 관련 기록을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제92주년 기념행사 2024년 4월 29일 오전 10시 예산군과 매헌 윤봉길 월진회가 충의사에서 주관한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제92주년 기념식은 김태흥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최재구 예산군수, 정창식 해군 윤봉길함 함장, 윤여두 월진회장, 도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해 의거 기념 다례와 추모가 합창 등에 이어 도중도에서 윤봉길 의사 선양 유공자 표창 등 순으로 진행됐다. 김태흥 충남도지사는 “상하이 의거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선생의 피 끓는 마지막 독립투쟁이었다”며 “숭고한 헌신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광복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고 윤봉길 의사를 추모했다. 이어 “올해부터 어느 시군에 사시든지 전국 최고 수준의 참전명예 수당을 드리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의료비 지원한도도 없앴다”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의 명예로운 삶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또 “항일의병의 중심지인 충남은 2027년까지 내포에 의병기념관을 건립해 애국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제대로 기억하겠다”며 “선생의 뜻을 받들어 더 강한 나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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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특별기고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평가 2024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문무를 겸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한양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28세에 무과시험에 처음으로 도전했고 31세 때인 1576년(선조 9년) 2월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선조 16년인 1583년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조(宣祖) 19년인 1586년 40세 때에 사복시 주부(종6품)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추천으로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됐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제1차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선조는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제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이겨 큰 전공을 세웠으나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權慄, 1537-1599)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원균이 1597년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자 일본 해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 1543-1607)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했다. 선조 37년인 1637에는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고, 좌의정이 증직되었으며,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조 21년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효종 10년인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인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95년에는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11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아산에서는 성웅 이순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 중구에서는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제독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1934)는 "세계 해군 역사에서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로 국보 제76호인『난중일기(亂中日記)』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을 맞이하여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쉽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2.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 기념행사 현충사관리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을 맞아 4월 28일 11시에 충남 아산시 현충사 사당 및 경내에서 이충무공의 국난극복 업적과 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9주년 기념행사’를 600여 명(초청인사 250명, 일반 참배객 350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거행했다. 주 행사인 다례는 초헌관 현충사 관리소장의 분향·헌작(술잔을 올림)과 축관의 축문 낭독으로 구성된 초헌례, 아헌관 후손 대표 이범이 헌작하는 아헌례, 종헌관 시민제관 한상우가 헌작하는 종헌례로 진행되었다. 이어 대통령 윤석열 명의의 헌화와 분향, 현충사 청소년 국가유산 지킴이의 헌화가 있었다. 현충사관리소는 기념행사 하루 전인 27일과 28일 양일간 현충사 내 고택·사당·교육관 등 6군데를 돌며 도장을 받으면 기념품(종이접기·스티커 등으로 구성된 체험 꾸러미)을 받을 수 있는 ‘도장 찍기 여행(스탬프 투어)’을 운영했다. 같은 기간 아산시는 이충무공 묘소를 경유하는 ‘백의종군길’ 걷기대회와 마라톤 행사를 개최했다. 탄신제 주간(4월 24~28일)에 ‘성웅 이순신 축제’를 주관하는 아산시는 현충사 고택에서 27일 ‘이순신 창작시 및 시낭송 대회’를, 현충사 충무문에서 사생대회를 각각 개최했다. 28일에는 역시 충무문 앞에서 난중일기 백일장을 개최하고, 현충사 은행나무 활터에서는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제63회 대통령기 전국 시·도대항 궁도대회’가 열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성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충무공께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셨던 이곳 현충사에서, 올해도 여러분과 함께 공(公)의 위대한 업적과 가르침을 기리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공은 일찍이 왜적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거북선을 건조하고 화포를 개량하셨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리더십으로 23전 23승 하여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충절과 애민 정신은 우리 민족이 어떤 위기와 도전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깊은 충무공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공의 큰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선진 한국의 빛나는 미래를 그려 나갑시다. 다시 한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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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특별기고제57회 과학의 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제57회 과학의 날의 유래와 대한민국의 주요 과학기술 정책 2024년 4월 21일은 제57회 과학의날이다. 과학의날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한국인 과학기술자와 민족주의 인사들이 ‘과학데이’를 정하고 민족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대중 행사를 벌였다. 당시 발명학회 전무 김용관(金容瓘)의 제창으로 해마다 다윈(Charles R. Darwin)이 죽은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한 강연회, 활동사진 상영회, 대중 거리행렬, 과학관·박물관·공장 견학 행사를 열었다. 이러한 민족적 움직임은 해방 직후 계승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 투자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의해 국가기념일 형태로 재현됐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한국과학원(KAIS)을 설치해 과학기술 연구·교육을 진흥했고, 과학기술처를 설립해 국가 과학기술 진흥사업을 총괄케 했다. 이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 관심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제고하려는 사업도 기획했는데, 과학의날 제정이 대표 사례다. 과학(科學, Science)은 자연현상과 인간사회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찰해 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법칙·원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행위와 이에 대한 방법론 그리고 이 둘의 결과로 이뤄진 체계적인 지식을 수립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철학의 하위 분류로 여겼으나, 점차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방법론을 이루게 된 학문 범위를 형성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가장 범위가 넓은 학문이며, 보통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을 칭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조선왕조는 문학과 철학과 사학, 즉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서양의 선진 제국에 비해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느려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19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을 탈피하기 위해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이제는 10대 경제대국이 됐고, 과학기술 수준도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해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국내 연구기관·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결과 현재는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나노 등 다양한 최첨단 응용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초과학 분야는 미국·일본 등 과학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강력한 경쟁 대상국인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무려 29명(물리학상 12, 화학상 8, 생리학·의학 5)이나 받아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했다. 그나마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기초과학연구원이 대한민국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최근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된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660만㎡ 규모의 제2대덕연구단지’를 공약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날을 맞아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은 대전 대덕연구단지이다. 대덕 특구 출연 연구원과 연구본부, 대전시가 대덕연구개발특구 출범 50주년을 맞이해 대전을 일류 경제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원팀을 이뤄 나노 반도체와 바이오, 방위산업과 우주산업 중심의 신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제2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할 계획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2024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25조 9,000억 원)을 2023년 대비 16.6%(5조 2,000억 원) 삭감하고, 이 중 기초연구 사업 예산은 6.2%(1,537억 원)나 줄이는 바람에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윤석열 정부가 학계 ․ 연구소 ․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직면하자 2023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미디어 브리핑에서 도전적 연구과제 지원, R&D 규제 혁신, 글로벌 R&D 추진 등이 주요 내용인 R&D 혁신 방안을 내놓았다. 그래도 의대 쏠림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이공계는 전례 없는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 날이 과학계 입장에서는 축제의 날이지만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2. 과학의 날 기념행사 개최 현황 제1회 과학의날 행사는 1968년 4월 2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됐으며, 이후 지금까지 기념식이 중단 없이 이뤄졌다. 과학의날 기념식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부처이지만, 실제 행사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한다. 그 밖에 과학관, 과학창의재단, 각급 학교 등 다양한 기관·단체가 전국적으로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그런데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9월 15일 국회에서 과학의날을 더욱 의미 있는 날로 변경하자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변재일 의원은 세종대왕이 자격루를 국가표준시계로 반포한 8월 5일(1434년)을 새로운 과학의날로 제정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과학 역사와 위업을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부터 매년 과학의 달인 4월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과학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전엑스포시민광장 및 엑스포과학공원 일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과학기술문화 체험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축제'와 국가전략기술 연구성과 전시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기술대전'이 통합 개최되어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축제 참가자들이 꼭 체험해야 할 과학축제 프로그램으로는 과학 실험식, 과학 라운지, 과학 테마파크 등을 들 수가 있다. 대전과 인천 교육청, 특허청과 한국발명진흥회 등이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과학의 도시인 대전 교육청은 지난 4월 19일 대전교육과학연구원 대강당에서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서는 과학활동에 우수한 성과를 이룬 초등학생 148명과 과학기술 진흥에 헌신한 우수 과학교사 6명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과학탐구활동 지도 및 교수학습활동 개선에 기여한 교사 6명, 과학교육 진흥에 공이 있는 대학 등 유관기관 관계자 8명, 과학교육 우수학교인 한밭초등학교·동명중학교·우송고등학교에 교육감 표창이 수여됐다. 설동호 대전 교육감은 “학생들이 미래를 선도하는 창의융합 인재로 성장할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통해 과학교육을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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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와 기념식 현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간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 광주, 대전, 마산, 충주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천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해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청년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해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줬다.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하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19혁명이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 그렇지만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강북구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기념탑·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 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 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됐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서울 강북구는 2013년부터 강북구 일원에서 4·19혁명국민문화제를 개최해 4·19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대중에게 알려 왔다. 2.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현황 국가보훈부는 2024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비상을 이끈 4·19혁명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제64주년 4·19혁명 기념식’을거행했다. ‘4월, 자유를 향해 날다’라는 주제로 열린 4.19혁명 64주년 기념식은 4·19혁명 유공자와 유족, 한덕수 국무총리와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등 정부 주요 인사, 이재명과 조국 등 야당 주요 인사, 미래세대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헌화·분향, 여는 공연, 경과보고, 기념공연 1막, 기념사, 기념공연 2막, 4·19의 노래 제창 순으로 45분 동안 진행되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오늘 우리는 64년 전 그날, 자유·민주·정의를 향해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부정과 불의에 맞서 목숨 바치신 학생과 시민의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의 아픔을 딛고 이 땅에 민주주의 역사를 바로 세워주신 4·19혁명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손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2월의 대구, 3월의 대전과 마산을 지나서 마침내 4월 19일의 혁명을 통해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눈부신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일어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으로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끄는 저력이 되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2·28 민주운동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혁명 과정의 1019점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세계가 4.19혁명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위업을 이룩하신 학생과 시민의 헌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4·19 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주신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데 더욱 힘써나가겠습니다. 더욱 낮은 자세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유와 인권, 상식과 공정이 통하는 반듯한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국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가 4·19혁명의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발전시켜 더 큰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밝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 오피니언
    • 기고
    2024-04-19

실시간 기고 기사

  • 역 맹모삼천지교
    예전 어느 일간지에서 역 맹모삼천지교 칼럼을 읽었다. 신선한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감동을 받았다.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산다는게 다는 아니며 아무리 열약한 환경일지라도 슬기롭게 잘 이용하여 배울 것은 배우면서 극복하면 더욱 좋다는 내용이다. 맹자의 어머니 급씨가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열약한 환경이 부정으로만 볼수 있는가 첫 번째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교육 시킬곳이 아니구나 한탄하여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인하여 공동묘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엔 공동묘지가 많았다. 공동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한다. 장례 행위를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삶을 살으려고 노력 했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가지지 않는가 혹은 부와 명예는 없지만 가치있는 진정한 삶을 살았는가.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시장이었다. 어린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도 아니구나 하고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시장 사전적 정의로는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정한 장소 또는.상품으로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범위나 영역이다. 즉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려하는 소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끄러운 환경이 반드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장소이다. 과연 시장은 아동 교육에 꼭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 그속에서 사람들의 어울림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시장은 경제의 축소이다. 그나라의 경제를 보려면 시장을 가보라고, 사람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도 말이다. 노동의 중요성을 깨닭고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재화를 올바르게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낭비적인 재화 사용은 안되며, 노동 없이 벌어오는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은 엄청난 죄이다. 이런 재화는 쉽게 나가버린다.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가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가 종종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부닺치기 마련이다. 부딪친다해서 그냥 주저 앉을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서 맹자의 어머니가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며 맹자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한 어머니 속에서 자란 맹자가 위대한 현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폭 넓게 생각해볼 필요 있다. 다시말해 정신과 물질을 잘 음미 할 필요가 있으며, 않좋은 환경속에서 자랐다고서 반드시 잘못되는 것도 아니며 극복 잘해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진화론 과학자인 다윈은 종의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종이라고 하였다. 자녀들을 위한 진전한 교육 지식을 많이 배우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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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3
  • 추억 진행형 신탄진
    신탄진은 나름대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신탄진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땐 전매청(지금 KT&G)에서 파고다 아리랑 신탄진 은하수라는 이름 가진 담배들이 나왔다. 정부에서는 1965년 신탄진에 연초제조창(지금 KT&G)을 만들었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정한 모양인 것 같다. 대전에 살면서 신탄진 지명소리를 많이 들었고 담배가계 보면 신탄진담배를 많이 보았고 담배심부름도 했으니 잊을수가 없다. 옛 지명은충남 대덕군 북면으로 불렸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신탄진읍으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집에 전화국서 발행한 충청남도 전지역 전화번호부가 있었기에 즐겨보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탄진 전화번호를 열심히 보았다. 전화번호는 국이없는 2자리와 3자리 였고, 석봉리에 사는 주민들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한 곳만이 평촌리만 적혀있었고 연초제조창으로 기억하고 있다. 석봉리와 평촌리만 있고 다른 리는 없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대전에서 신탄진 가는 방법은 좌석버스였고 요금은 3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 성인기분 15원인가 20원) 버스는 많지 않았다. 1973년 아버지는 이모부 친척의 도움으로 신탄진서 포도농사를 지으셨다. 어느날 나랑 동생이랑 함께 포도밭에 갔다. 남경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드넓은 포도밭이 보였다. 지금은 주택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712번 버스 종첨) 남경마을 버스정류장 자리에서 신탄진역이 보이길래 걸어가보자고 하여 같이 걸어갔고 역 옆에 육교가 있어 올라갔다. 어느 할머니가 들고있는 짐을 같이 내려달라고 하여 도와주었다. 신탄진역안 철길을 바라보니 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역무원 2명이 양쪽 폴랫포옴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라 힘들어 했다. 포도밭으로 되돌아와서 동네아이들과 놀았고 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먹으라고 많은 포도를 따서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가 바래다 주었는데 원동시장에서 내려 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느라 힘들었다. 이후로는 신탄진에 가질 않했다. 80년 통일호 열차타고 서울가는데 신탄진역에서 섰으며, 사람들이 제법 탔다. 신탄진에서도 통일호도 서는가 생각했다. 80년대 대청댐을 신탄진을 통해 여러번 갔지만 무관심했다.KT&G에서는 지금처럼 벚꽃 놀이를 했으며 2번 정도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신탄진을 가게 된 계기는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2006년에 동구에서 살다가 법동으로 이사와 대덕구민이 되었고 2007년 1월1일자로 연기군 동면(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았기에 신탄진을 거쳐가야했다. 신탄진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조치원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아침 7시 55분 첫버스 타고 다녔다. 조치원 전의 연서지역에서 근무할땐 신탄진역서 기차타고 다녔다. 연기군이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남지역으로 발령 않받아 퇴직할때까지 계속 신탄진을 거쳤다. 가끔 휴일에는신탄진 시장 로하스공원 수영장 대청댐 대청공원 신탄진공단 등등 친숙해지려고 다녔다. 퇴직 후 유튜버가 되어 신턴진의 다양한 볼거리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으며, 대덕마을신문명예기자가 되어 (구) 신탄진도서관에 가서 취재도 하였고 정보검색과 독서를 하고강좌도 들었다. 지금은새로 지은 석봉도서관이 대신하고 있다. 대덕구 주최로 신탄진서 하는대청호 고래축제와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가 하였다. 최근 대덕국민체육센터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하였으며,새마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구의장상을 받았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경품추첨을 잘하여 많은 상품을 받았다. 추억진행형이되어버린 신탄진 좋은 추억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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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12-24
  • 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1956년 가수 안정애(본명 안순애)는 신곡 대전부르스를 발표 하였다 “잘 있거라 나는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시작되는 노래로 2절까지 있으며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이다. 안정애가수를 간략히 소개하면 193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였으며 부유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녀가 가수가 된 동기는 집 근처가 터미널이 었는 입지적 조건덕에 지방공연을 자주 보아,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서울에 상경하였지만 성과가 없어 하동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시 상경 하여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부른 가수 고복수(처 황금심가수 아들 고영준가수)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악착같이 배웠으며 신인 선발무대에 나가서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백설희‘'봄날은 간다',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서 신인가수로 박탈되었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첫 곡은 밤비의 블루스 였으며 히트를 치자 대전부르스 순정의블루스 연락선불루스 이별의김포비행장 애정산맥 등 주로 블루스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하여 불렀으며 예명을 안정애로 하였고 또 다른 호칭은 “블루스의 여왕”이었다. 대전부르스 노래가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노래를 작사한 최치수는 10년간 열차 승무원을 하였으며 이후 작사자가 되었고, 신세기레코드사 직원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대전역 인근에서 숙박을 했다. 어느날 새벽 0시40분 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보슬비를 맞으며 슬픈 이별하는 모습을 보았고 남자는 천천히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0시50분 출발했고 여자는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끝까지 지켜 보아야 했다.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쓰라린 심정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그시절 열차와 역의 풍경을 잘 담아 가사를 만들었으며 승무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였다. 지은 노래를 김부해에게 전해주었고 김부해는 4/4박자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를 보면 가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주곡부터 나온다. 단번에 들어보면 완전 귀에 익어 대전부르스 곡이구나 알 수 있다. 최치수 작사자는 대전부르스 말고도 용두산엘레지 눈물도말렸오 사랑이냐 돈이냐등 많은 노래를 지었다 작곡가 김부해 역시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대전 부르스가 발표되자마자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음반은 출반 3일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소속사인 신세기 레코드는 야간작업을 강행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특별 상여금을 주었고 가수 작자사 작곡자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인기덕분인가 1963년 대전부르스는 대전발 0시50분 제목으로 영화로 나왔다. 이종기 감독 이성근 제작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엄앵란 남양일 김동원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음악은 김부해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 같이 독촉하지만 젊은 소위는 잊을수 없는 누님을 찾고 그 누님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위는 누님을 만난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누님이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이때 그에게는 전방 수색대장으로서의 임무가 떨어진다. 그는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슬픈 시나리오이다. 1980년 조용필 가수가 대전부르스를 조용필1집에 넣어 불렀으며 역시 히트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가 처음 부른 곡으로 생각했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당시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50년대~60년대에 잠깐 존재했던 열차로 서울역서 저녁 8시 45분에 출발,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한 뒤, 10분의 기관차 교대 시간을 거쳐 0시 50분에 목포역으로 가는 호남선 하행 마지막 열차였다. 그시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해였으며,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고 서울서 목포까지 완행열차를 탄 사람들 열차여행에 매우 힘들어 했으리라 본다, 완행열차 이제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되었지만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고 나 역시 추억이 있다. 그당시 목포는 부산항과 함께 일본,만주,사할린에서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귀향하던 귀향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한국 땅으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으며, 이들이 먹고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리고 몰리던 시대로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1960년 새벽 3시30분으로 열차시간표가 바뀌었다. 대전에 살고있는 나로선 신기했다. 조용필 가수로 인해 대중가요 제목에 대전이라는 이름의 제목이 있다니 주로 부산 목포 인천 서울 제주등 있지만 호기심을 자아냈고 2절까지 열심히 불러 배웠다. 그러나 나중에 안정애 가수가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어떤 가수인가 알게되었다. 1999년 대전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뉴스로도 나왔다.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 라고 써있었고 뒷면에는 대전 부르스 노래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가서 보았으며 멋지게 만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비에 가수 이름이 빠졌다. 안정애가수가 조용필 이름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만일 넣지 않는다면 내 이름마저 빼겠다고 강한 주장으로 넣지 않했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2016년 대전역 복합역사 건설때 노래비가 철거된 뒤 사라졌다.(개인 생각으로는 그 주변 어디에 있으리라 보며 확인 하려 함 몇 년전에 얼핏 본 기억이 있음) 2009년 당시 이장우 대전동구청장이 동구청 주최로 대전부르스 축제를 하였으며 구경 가보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축제였다. 그가 2022년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종의 프리퀄로 대전0시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나서 2023년 8월11일(금)부터 17일(목)까지 2023 대전0시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원도심인 동구 중앙로 길부터 시작하여 목척교 지나 충남도청 앞까지 성황리에 하였다. 본인도 매일 가서 구경하다 시피 하였고 최대로 즐길수 있을만큼 즐겼다. 그리고 유튜브를 제작하기에 그래도 하나 정도는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1편을 올렸다. 2024년 8월 9일~17일까지 진행한 대전0시 축제 나름대로 즐겼으며 생각지않게 상품도 탔다. 유튜버로서 블랙이글에어쇼 시간여행 퍼레이드 의 일부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후 가수 공연은 개인사정상 보질 못했다. 최치수 그가 대전에 도착하지 않고 다른 도시 역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니면 그시간 여관에서 잠을 잤다면 대전부르스는 나오질 못했으리라 본다. 최치수 김부해 안정애 그리고 조용필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전 미래 즐거움의 씨앗을 심어준 영웅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작사자 작곡자는 고인이 되셨지만 안정애 가수는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오래전 TV로 잠깐 본 기억은 있다. 계속 행사를 한다면 고령이지만 한번정도는 초청 해야 하며 조용필 가수도 초청 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행사 참가 때문에 대전부르스를 부른 젊은이들 구경한사람들 행사를 만든 공무원들 이노래가 언제 어떻게 누가 불렀는가 물어보고 싶다. 안정애라는 가수를 알고 있을까 . 마을신문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싶다. 작년 올해 축제를 보면서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을 여러번 하였으며 누구에게도 말을 하였다. 대중가요에 대전을 가사로 넣은 곡도 있다. 대표적으로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 못잊을 대전의밤’ 김혜연 가수가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남인수가 불렀던 울리는경부선 3절가사에도 나온다. 이 노래도 여러번 들어보았으며 울리는 경부선은 3절까지 알고 있지만 못잊을 대전의밤은 나와 정서가 맞지않은지 익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전의 상징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인가 대전부르스 꿈돌이와 함께 대전의 상징이다. 이번 0시 축제에서도 대전부르스 전국가요제를 별도로 열었다. 내년에 이 행사를 한다면 다시한번 재미있게 구경하련다. 가끔이나마 가요무대 혹은 유튜브를 통해 대전부르스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쉽다면 음악성이 전혀 없어 다루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룰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 독주라도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 기본 몇곡은 알고 있는데 안정애 가수가 불렀던 밤비의 블루스 등 2-3곡을 배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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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 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제헌절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과제 제헌절(制憲節)은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의원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만들어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에 의거해 제정된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올해 76주년을 맞았다. 제헌절은 제정될 당시부터 공휴일이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토요휴무일) 시행에 따라 2005년 6월 30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개정되면서 식목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미군정(3년)을 거쳤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국회의원 198명(제주도 2명은 선출 못 함)을 선출하고 5월 31일 제1대 국회가 개원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춰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이제까지 76년의 우리 헌정사는 제1차 발췌개헌으로 시작된 이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헌법개헌 등 총 9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수난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 원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실정법, 국내법, 공법, 실체법에 해당하며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모법이라고 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103조로 구성됐다. 국가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국민주권의 원리, 영토, 국제평화주의를 규정했다. 평등권과 더불어 다양한 자유권을 규정했고 노동3권,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 무능력자 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며,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했고,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탄핵재판소를 뒀다. 경제 질서에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부차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경성제국대학 3천재 중 한 사람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이제까지 9차례나 인위적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반영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보다 현실 적합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행헌법도 시공을 초월하지는 못해 앞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도록 일부 개정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떤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혁신, 정의, 안전, 인권, 상생, 평화통일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당하게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저항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와 애국심이 강해 4 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 10민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저항권을 꾸준히 강화했다. 국회는 제헌절(制憲節) 제76주년을 맞아 제헌(制憲)이념과 정신에 걸맞게 그 정신을 본받고 교훈 삼아 국회로서의 기능이 여,야 정쟁의 도구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든다든지 이용하면 안 되며, 국회의원도 특권을 내려 놓고 이젠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입법부의 국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일반 시민, 국가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현장 중심의 법교육과 정치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 준법정신과 사회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military coup)로 정권을 잡아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후퇴시키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 헌정을 유린한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구속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들에게는 포상과 보상을 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와 내란으로 정권을 잡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해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한 반민주 행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경축하고, 태극기의 올바른 게양과 관리를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 중이다. 제헌절에 태극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하고 날씨가 좋지 않아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지 않는다. 2. 제헌절 제76주년 경축행사 대한민국 국회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제헌 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제76주년 제헌절 경축식은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그리고 최재해 감사원장과 전직 국회의장, 정당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단, 헌정회원, 제헌국회의원유족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경축공연 1, 감사패 수여, 헌정회장 기념사, 국회의장 경축사, 경축공연 2, 제헌절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연하게 합의하는 만큼만 개헌을 추진하자”고 여야 정당에 제안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이를 위한 공식적인 개헌 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헌법의 가치를 기억하고 국회가 국민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주제영상 상영에 이어, 대한민국의 최극단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 경찰 및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영상합창단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경축합창단의 <내 나라 내 겨레> 합창이 진행되며, 참석자 전원이 ‘제헌절 노래’를 부르며 경축식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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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7
  •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와 기념식 실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1980년 5월 18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일어난 민중시위에 대하여 전두환과 신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민중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진압 하여 직접 사망자 193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 65명, 부상자 3천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천589명을 발생시켜 광주 시민들은 지난 44년간 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힘들게 살았다. 그런데 고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아직까지 대부분 호화롭게 생활하면서 사과 한 마디 없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공분을 사고 있다. 불행중 다행이도 전남대 5·18연구소와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난 44년간 수많은 노력을 해온 결과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아무리 은폐하거나 조작해도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29선언과 2017년 촛불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5·18기념식 지정곡인 백기완·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과 대만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애창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나눔과 소통, 공동체 정신은 지금 국가의 복합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크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5월 18일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광주시는 5월 18일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2011년 5월 25일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유례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앞으로 외신 기자와 나종태 사진작가가 목숨을 걸고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과 영상, 전일빌딩 헬기사격 245개 흔적, 고 조비로 카토릭 신부의 청문회 증언, 생존 시민군들의 증언, 생존 게엄군의 양심고백, 북한군 개입설과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공격 사건 조작 규명 등을 참고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그 진상이 만천하에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를 국민과 역사 앞에 하나도 남김없이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 행방불명자 소재를 파악하고, 시민군과 시민군의 편에 섰다가 피해를 입은 경찰공무원과 군인과 해직 기자를 찾아내 명예회복과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만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족들의 한이 풀리고, 왜곡된 사회정의와 역사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2.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식 실황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5·18민주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오월, 희망이 꽃피다'를 주제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헌화·분향, 오월 영령에 대한 묵념, 경과보고, 기념공연, 기념사 순으로 엄수됐다. 기념식장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강기정 광주광역시장,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등 정관계 인사와 5·18민주유공자, 유가족 등 2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윤 대통령과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 오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 “오늘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와 눈물 위에 서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운 연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은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고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오월의 정신을 이어온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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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특별기고 불기 2568(2024)년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불교의 교리와 문제점과 당면 과제 불교는 석교(釋敎)라고도 한다. 불교라는 말은 부처인 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 : 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불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불교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교는 지혜(智慧), 자비(慈悲), 평등(平等)을 강조한다. 불교는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을 강조한다. 불교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 즉 해탈(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는데,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불교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고 있다. 불교는 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아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극복하고 부처가 되고자 항상 수행 정진하는 자력 종교이다. 한국 불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절과 암자에서 스님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고, 각종 시험 합격 기원 불사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등 불교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주지 스님이 수행정진을 게을리 하고, 공금을 횡령하는가 하면, 중요 문화재 관리를 소홀히 해 도난당하고, 여자 신도를 농락해 사회문제가 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 꿈의 사회로 급변하면서 제4차산업혁명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불교 교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절에 가보면 젊은 신도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노쇠한 부인들이 신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도수가 해매다 줄어들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 불교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로 중요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찰이 명산의 명당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사회와 국가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서산대사·사명대사·청담스님·성철 스님·서암 스님·법정 스님 등 수많은 훌륭한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고, 국난을 당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하면, 기독교와 달리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며 종교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어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많이 받고 있다. 한국 불교는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 포교에 성공한 외래 종교의 포교 방법을 벤치마킹해 젊은 층을 대상으로 포교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잘 하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불기 2567주년을 맞이해 스님 대상 재교육 강화, 사찰과 암자에서 스님들의 무속행위 금지, 일탈 스님에 대한 형사처벌 강화, 사찰 중요문화재 관리 강화,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경전 수정보완, 정치와 종교의 분리, 포교 강화, 불교 정화운동 전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시 증가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강력하게 실행해야 한다.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1주일 앞둔 5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연등행렬이 이어졌다. 연등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연등행렬은 형형색색 빛을 밝혔다. 연등회는 지난 2020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인 5월 15일 전국 사찰에서는 불교계 종단들로 구성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가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Peace of Mind, Happiness of the world)'을 올해 봉축 표어로 삼아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법요식을 올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날 오전 10시 총본산인 서울 종로구 소재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과 종정인 성파 대종사, 정관계 인사 등 약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축 법요식을 봉행했다. 진우스님은 앞서 발표한 봉축사에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 깨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온 국민이 모두 부처님의 대자비와 지혜 속에서 내 마음의 평안과 세상의 평화를 일구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한다"고 밝혔다. 대한불교천태종과 한국불교태고종도 이날 오전 각각 봉축 법요식을 열어 부처님이 오신 의미를 기릴 예정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앞서 공개한 메시지에서 "연등의 찬란한 빛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을 환히 밝히길 소망한다"고 밝혔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모든 승가와 불자들께 마음 모아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고 김종생 총무 명의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해 축사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을 언급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 언제나 국민과 함께해 왔다며 한국 불교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늘 부처님의 마음을 새기면서 올바른 국정을 펼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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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5-16
  • 특별기고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92주년을 경축하며
    1.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군인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지 92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본명 尹禹儀, 1908-1932)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오전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로 많은 피해를 당한 일제가 보복으로 임시정부를 밀착감시하며 혹독한 탄압을 가하자 임시정부는 상해, 항저우, 전장, 청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무려 4000Km를 이동하며 광복군을 창설하고 무장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해 11월 일본으로 호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금택형무소 교외 미쓰코치 공병작업장 내 산골짜기에서 잔혹하게 총살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의 파평 윤씨 문중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후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마을의 최병대(崔秉大) 선생에게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 14세부터는 예산군 덕산면 둔2리 노곡 16길에 위치해 있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후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 사서삼경과 한시를 배웠다. 1923년 오치서숙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인 ‘오추嗚推)’ · ‘옥수(玉睡)’ · ‘임추(壬椎)’ 등을 발간했다. 1926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야학을 개설했다. 1927년 20세 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했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기도 했다.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지만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이를 기반으로 농촌 자활운동을 펼쳐나갔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0년 3월 6일 새벽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비장한 출향가를 써놓고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백범(白凡) 김구(金九, 본명 金昌洙, 1876-1949)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애국지사로 항일독립운동가, 낭만적인 시인, 농촌개혁가, 농민계몽가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홍구공원 폭탄투척만 간단하게 기록해 놓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를 단지 테러리스트(terrorist)로만 기억하고 있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로 국사 교과서의 윤봉길 의사 관련 기록을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제92주년 기념행사 2024년 4월 29일 오전 10시 예산군과 매헌 윤봉길 월진회가 충의사에서 주관한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제92주년 기념식은 김태흥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최재구 예산군수, 정창식 해군 윤봉길함 함장, 윤여두 월진회장, 도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해 의거 기념 다례와 추모가 합창 등에 이어 도중도에서 윤봉길 의사 선양 유공자 표창 등 순으로 진행됐다. 김태흥 충남도지사는 “상하이 의거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선생의 피 끓는 마지막 독립투쟁이었다”며 “숭고한 헌신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광복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고 윤봉길 의사를 추모했다. 이어 “올해부터 어느 시군에 사시든지 전국 최고 수준의 참전명예 수당을 드리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의료비 지원한도도 없앴다”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의 명예로운 삶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또 “항일의병의 중심지인 충남은 2027년까지 내포에 의병기념관을 건립해 애국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제대로 기억하겠다”며 “선생의 뜻을 받들어 더 강한 나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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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특별기고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평가 2024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문무를 겸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한양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28세에 무과시험에 처음으로 도전했고 31세 때인 1576년(선조 9년) 2월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선조 16년인 1583년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조(宣祖) 19년인 1586년 40세 때에 사복시 주부(종6품)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추천으로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됐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제1차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선조는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제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이겨 큰 전공을 세웠으나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權慄, 1537-1599)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원균이 1597년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자 일본 해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 1543-1607)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했다. 선조 37년인 1637에는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고, 좌의정이 증직되었으며,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조 21년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효종 10년인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인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95년에는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11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아산에서는 성웅 이순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 중구에서는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제독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1934)는 "세계 해군 역사에서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로 국보 제76호인『난중일기(亂中日記)』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을 맞이하여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쉽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2.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 기념행사 현충사관리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을 맞아 4월 28일 11시에 충남 아산시 현충사 사당 및 경내에서 이충무공의 국난극복 업적과 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9주년 기념행사’를 600여 명(초청인사 250명, 일반 참배객 350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거행했다. 주 행사인 다례는 초헌관 현충사 관리소장의 분향·헌작(술잔을 올림)과 축관의 축문 낭독으로 구성된 초헌례, 아헌관 후손 대표 이범이 헌작하는 아헌례, 종헌관 시민제관 한상우가 헌작하는 종헌례로 진행되었다. 이어 대통령 윤석열 명의의 헌화와 분향, 현충사 청소년 국가유산 지킴이의 헌화가 있었다. 현충사관리소는 기념행사 하루 전인 27일과 28일 양일간 현충사 내 고택·사당·교육관 등 6군데를 돌며 도장을 받으면 기념품(종이접기·스티커 등으로 구성된 체험 꾸러미)을 받을 수 있는 ‘도장 찍기 여행(스탬프 투어)’을 운영했다. 같은 기간 아산시는 이충무공 묘소를 경유하는 ‘백의종군길’ 걷기대회와 마라톤 행사를 개최했다. 탄신제 주간(4월 24~28일)에 ‘성웅 이순신 축제’를 주관하는 아산시는 현충사 고택에서 27일 ‘이순신 창작시 및 시낭송 대회’를, 현충사 충무문에서 사생대회를 각각 개최했다. 28일에는 역시 충무문 앞에서 난중일기 백일장을 개최하고, 현충사 은행나무 활터에서는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제63회 대통령기 전국 시·도대항 궁도대회’가 열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성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충무공께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셨던 이곳 현충사에서, 올해도 여러분과 함께 공(公)의 위대한 업적과 가르침을 기리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공은 일찍이 왜적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거북선을 건조하고 화포를 개량하셨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리더십으로 23전 23승 하여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충절과 애민 정신은 우리 민족이 어떤 위기와 도전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깊은 충무공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공의 큰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선진 한국의 빛나는 미래를 그려 나갑시다. 다시 한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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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특별기고제57회 과학의 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제57회 과학의 날의 유래와 대한민국의 주요 과학기술 정책 2024년 4월 21일은 제57회 과학의날이다. 과학의날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한국인 과학기술자와 민족주의 인사들이 ‘과학데이’를 정하고 민족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대중 행사를 벌였다. 당시 발명학회 전무 김용관(金容瓘)의 제창으로 해마다 다윈(Charles R. Darwin)이 죽은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한 강연회, 활동사진 상영회, 대중 거리행렬, 과학관·박물관·공장 견학 행사를 열었다. 이러한 민족적 움직임은 해방 직후 계승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 투자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의해 국가기념일 형태로 재현됐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한국과학원(KAIS)을 설치해 과학기술 연구·교육을 진흥했고, 과학기술처를 설립해 국가 과학기술 진흥사업을 총괄케 했다. 이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 관심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제고하려는 사업도 기획했는데, 과학의날 제정이 대표 사례다. 과학(科學, Science)은 자연현상과 인간사회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찰해 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법칙·원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행위와 이에 대한 방법론 그리고 이 둘의 결과로 이뤄진 체계적인 지식을 수립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철학의 하위 분류로 여겼으나, 점차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방법론을 이루게 된 학문 범위를 형성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가장 범위가 넓은 학문이며, 보통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을 칭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조선왕조는 문학과 철학과 사학, 즉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서양의 선진 제국에 비해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느려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19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을 탈피하기 위해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이제는 10대 경제대국이 됐고, 과학기술 수준도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해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국내 연구기관·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결과 현재는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나노 등 다양한 최첨단 응용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초과학 분야는 미국·일본 등 과학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강력한 경쟁 대상국인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무려 29명(물리학상 12, 화학상 8, 생리학·의학 5)이나 받아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했다. 그나마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기초과학연구원이 대한민국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최근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된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660만㎡ 규모의 제2대덕연구단지’를 공약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날을 맞아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은 대전 대덕연구단지이다. 대덕 특구 출연 연구원과 연구본부, 대전시가 대덕연구개발특구 출범 50주년을 맞이해 대전을 일류 경제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원팀을 이뤄 나노 반도체와 바이오, 방위산업과 우주산업 중심의 신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제2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할 계획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2024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25조 9,000억 원)을 2023년 대비 16.6%(5조 2,000억 원) 삭감하고, 이 중 기초연구 사업 예산은 6.2%(1,537억 원)나 줄이는 바람에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윤석열 정부가 학계 ․ 연구소 ․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직면하자 2023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미디어 브리핑에서 도전적 연구과제 지원, R&D 규제 혁신, 글로벌 R&D 추진 등이 주요 내용인 R&D 혁신 방안을 내놓았다. 그래도 의대 쏠림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이공계는 전례 없는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 날이 과학계 입장에서는 축제의 날이지만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2. 과학의 날 기념행사 개최 현황 제1회 과학의날 행사는 1968년 4월 2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됐으며, 이후 지금까지 기념식이 중단 없이 이뤄졌다. 과학의날 기념식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부처이지만, 실제 행사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한다. 그 밖에 과학관, 과학창의재단, 각급 학교 등 다양한 기관·단체가 전국적으로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그런데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9월 15일 국회에서 과학의날을 더욱 의미 있는 날로 변경하자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변재일 의원은 세종대왕이 자격루를 국가표준시계로 반포한 8월 5일(1434년)을 새로운 과학의날로 제정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과학 역사와 위업을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부터 매년 과학의 달인 4월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과학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전엑스포시민광장 및 엑스포과학공원 일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과학기술문화 체험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축제'와 국가전략기술 연구성과 전시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기술대전'이 통합 개최되어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축제 참가자들이 꼭 체험해야 할 과학축제 프로그램으로는 과학 실험식, 과학 라운지, 과학 테마파크 등을 들 수가 있다. 대전과 인천 교육청, 특허청과 한국발명진흥회 등이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과학의 도시인 대전 교육청은 지난 4월 19일 대전교육과학연구원 대강당에서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서는 과학활동에 우수한 성과를 이룬 초등학생 148명과 과학기술 진흥에 헌신한 우수 과학교사 6명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과학탐구활동 지도 및 교수학습활동 개선에 기여한 교사 6명, 과학교육 진흥에 공이 있는 대학 등 유관기관 관계자 8명, 과학교육 우수학교인 한밭초등학교·동명중학교·우송고등학교에 교육감 표창이 수여됐다. 설동호 대전 교육감은 “학생들이 미래를 선도하는 창의융합 인재로 성장할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통해 과학교육을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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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와 기념식 현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간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 광주, 대전, 마산, 충주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천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해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청년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해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줬다.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하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19혁명이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 그렇지만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강북구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기념탑·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 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 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됐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서울 강북구는 2013년부터 강북구 일원에서 4·19혁명국민문화제를 개최해 4·19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대중에게 알려 왔다. 2.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현황 국가보훈부는 2024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비상을 이끈 4·19혁명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제64주년 4·19혁명 기념식’을거행했다. ‘4월, 자유를 향해 날다’라는 주제로 열린 4.19혁명 64주년 기념식은 4·19혁명 유공자와 유족, 한덕수 국무총리와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등 정부 주요 인사, 이재명과 조국 등 야당 주요 인사, 미래세대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헌화·분향, 여는 공연, 경과보고, 기념공연 1막, 기념사, 기념공연 2막, 4·19의 노래 제창 순으로 45분 동안 진행되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오늘 우리는 64년 전 그날, 자유·민주·정의를 향해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부정과 불의에 맞서 목숨 바치신 학생과 시민의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의 아픔을 딛고 이 땅에 민주주의 역사를 바로 세워주신 4·19혁명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손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2월의 대구, 3월의 대전과 마산을 지나서 마침내 4월 19일의 혁명을 통해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눈부신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일어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으로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끄는 저력이 되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2·28 민주운동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혁명 과정의 1019점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세계가 4.19혁명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위업을 이룩하신 학생과 시민의 헌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4·19 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주신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데 더욱 힘써나가겠습니다. 더욱 낮은 자세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유와 인권, 상식과 공정이 통하는 반듯한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국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가 4·19혁명의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발전시켜 더 큰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밝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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