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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300년 전 회덕 땅에 살았던 김호연재(1681~1722)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닌 자기 자신이 너무도 아깝다고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유학을 근본이념으로 한 조선사회에서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 단계의 인간형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남성들조차도 자기 자신을 ‘군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군자지향(君子志向)’ 정도로 은근히 에둘러 표현하기가 일쑤였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닌 김호연재. 그러나 자신의 역량과 욕망을 펼칠 사회적 여건이 아니었던 조선사회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슬퍼하였다. 밝은 달처럼, 맑고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깨끗한 흰 구름처럼, 그녀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결하였다. 화려하게 몸치장하고 남성의 사랑이나 기다리는 성정이 아니었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슬퍼하였다. 그녀의 영혼은 속된 세상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외톨이였다. 김호연재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도 다 펼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奈何無所爲]’라고 말하며, 통곡 또 통곡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노래한 시가 다음의 <자상(自傷)>이다. <슬퍼서>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겉과 속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 도리어 그르다 하네. 규방 여인의 몸 된 것 슬퍼하노니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자상(自傷)> 可惜此吾心(가석차오심) 蕩蕩君子心(탕탕군자심) 表裏無一隱(표리무일은) 明月照胸襟(명월조흉금) 淸淸若流水(청청약유수) 潔潔似白雲(결결사백운) 不樂華麗物(불락화려물) 志在雲水痕(지재운수흔) 弗與俗徒合(불여속도합) 還爲世人非(환위세인비) 自傷閨女身(자상규녀신) 蒼天不可知(창천불가지) 奈何無所爲(내하무소위) 但能各守志(단능각수지) 김호연재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시대의 시대적 환경을 “뜻이 있어도 말하기 어렵고, 문필 있으나 감히 다하지 못한다네. 다만 홀로 소리를 삼켜 통곡하고, 흐르는 눈물에 옷깃을 적실 뿐(有志難言, 有文未敢. 秪獨呑聲, 有淚沾衣. <失題>)”이라고 읊었다. 김호연재는 당당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지적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나 녹녹치 않은 여성의 삶과 문학 환경, 시대의 절벽에 좌절하였다. 그리하여 “시와 술 뜻에 따라 맡기나니, 세상이 미치광이라 일컬어도 혐의치 않으리라(詩酒任隨意, 不嫌世稱狂. <閑情)>)!”라고 그 궁극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며>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사립문 위의 구름과 물, 호연함을 즐기네.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니 이 또한 호연한 일일세. <乞米三山守(걸미삼산수)> 浩然堂上浩然氣(호연당상호연기) 雲水柴門樂浩然(운수시문락호연) 浩然雖樂生於穀(호연수락생어곡) 乞米三山亦浩然(걸미삼산역호연) 김호연재는 쌀을 빌리면서도 이처럼 당당하고 의연하다. 일반 사람들은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한다. 생활, 곧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변함없는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호연재는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다. 사람을 대할 때 덕(德)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의식(衣食)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였다. 안빈낙도 · 안빈호학을 실천한 선비의 모습이다. 요즈음 우리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배짱이,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아름답다. <취하여>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편안하구나. 고요히 자리 위에 누웠노라니 즐거움에 잠시 세상의 정 잊노라. <醉作(취작)> 醉後乾坤濶(취후건곤활) 開心萬事平(개심만사평) 悄然臥席上(초연와석상) 唯樂暫忘情(유락잠망정) <만음> 녹수는 콸콸 울타리 밖에 흐르고 청산은 은은히 난간 앞에 펼쳐있네. 공명은 다만 인간사 한바탕 꿈일 뿐 무엇을 구구하게 세상과 다투리오. <謾吟(만음)> 綠水冷冷籬外在(녹수냉냉리외재) 靑山隱隱檻前生(청산은은함전생) 功名秪是黃梁夢(공명지시황량몽) 何事區區與世爭(하사구구여세쟁) 김호연재의 시집은 몇 종류가 있다. [오두추도(鰲頭追到)]·[호연재유고(浩然亝遺稿)]·[호연재시집(浩然齋詩集)]·[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호연ᄌᆡ유고] 등이다. 현전 총 작품 수는 250여수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집들의 존재는 김호연재의 한시가 송씨 가문에서 세대 간에 상당한 관심 속에 향유 · 유통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김호연재의 9세손 송용억이 1995년에 발간한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는 이러한 시집들을 정리하고, 여기에 [자경편], 부록으로 외손 김종최의 <사실기>, 아들 송익흠의 <유사>, 종질 송명흠의 <천장시제문>, 친정 조카 김겸행의 <제문> 2편, 사위 김치공의 <제문>, 김종최의 <제문> 2편, 김원행의 <소대헌공묘표> 등을 실어 발간하였다. 현재 김호연재 시작품의 전모는 이 책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제, 당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달게 받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절규한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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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6-06
  • 기획특집비래암과 옥류각, 그 맑은 자취에 달빛만 홀로 밝았어라!
    ①<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舊聞溪閣自先成(구문계각자선성) 此日登臨感復生(차일등임감부생) 疎竹䓗籠依舊色(소죽총롱의구색) 淺流幽咽作愁聲(천류유열작수성) 千年往跡山猶綠(천년왕적산유록) 一代淸遊月獨明(일대청유월독명) 惆悵秪今追不及(추창지금추불급) 空留誠意拜尊名(공류성의배존명) <비래암에서 느낌이 있어 덕소의 운에 이어서> 오래전 계각이 선대로부터 이루어졌음을 들었더니 오늘에 오르나니 감회 다시 생겨나는 도다. 성긴 대는 무성하여 옛 모습 그대로인데 얕게 흐르는 물은 그윽이 목메어 시름 소리내네. 천년이나 지난 자취엔 산 빛 오히려 푸르렀고 한 대에 맑게 놀매 달만 홀로 밝았어라. 서글퍼라, 이에 이르러 따르려 해도 미치지 못하나니 속절없이 정성들여 높은 이름에 절하노라. 이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계족산 자락에 있는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가 당질 송사흠(宋思欽, 자 幼安: 1700~1746)의 비래암 시에 차운한 것이다. ②의 시는 김호연재의 증손부 청송심씨(1747~1814)가 『호연ᄌᆡ유고』 에서 ①의 김호연재 한시 <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원작품을 한글 번역시로 정서해 놓은 것이다. 비래암은 김호연재의 시증조 동춘당 송준길과 그 후손・제자들의 강학 공간이면서 각종 의례가 치러진 곳이다. 비래암은 은진송씨의 유적이기는 하나, 김호연재의 친정 안동김씨 사람들도 즐겨 방문하였던 곳이었다. 비래암은 회덕의 송씨들이 1647년에 중 학조(學祖)를 시켜서 중창하였다. 송준길은 새로 지은 집에 하나의 메모를 벽에 걸어 여러 학생들에게 경계 삼도록 하였다. 일종의 ‘낙서금지’ 안내문이다. 그 내용은 “이 곳에 온 여러 수재들은 벽에다 낙서를 해서 새 집을 더럽히지 말라(來遊諸秀才, 愼勿壁書, 以汚新齋)”는 것이다. 비래암 곁으로는 옥류각이 있다. 옥류각의 건물 기둥 아래로는 계족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옥류(玉溜)’가 되어 흐르고, 그 옥류는 이내 작은 폭포를 이뤄 소쇄한 공간을 이뤄낸다. 송준길은 이러한 비래암과 옥류각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여 “겹겹의 바위에 옥 같은 물방울이 날린다(層巖飛玉溜)”(<차김옥천수창비래암운(次金沃川壽昌飛來菴韻) 중 3구>)고 노래하였다. ‘옥류각’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제월당 송규렴인데, 바로 송준길의 시구 ‘비옥류(飛玉溜)’에서 ‘옥류’를 취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비래암과 옥류각은 근대기까지 호서 사림과 기호학파 선비들의 강학과 소통의 인문지리 공간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역사의 흔적이 『비래서당좌목』(17세기), 『옥류강회록』(1843년), 『옥류각향음주례』(1843년), 『옥류각계첩』(1883년) 등의 문헌으로 남아있다. 김호연재는 계족산 밑자락 송촌에 살면서 비래골과 비래암, 옥류각을 간혹 찾았다. 그 때마다 느낀 감회를 시로 창작하여 남겼다. 그 시가 <비동감회기사질(飛洞感懷寄思姪)>・<비동감회(飛洞感懷)>・<차유안상비래암시운(次幼安上飛來菴詩韻)>・<촌등(村燈)> 등이다. 송촌에서 비래암으로 가는 길은 금암(琴巖) 바위 절벽을 돌아 비래골을 거치게 되는데, 그 길은 푸른 이끼가 길게 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김호연재는 비래암에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 온 시냇물이 돌에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정신을 맑혀준다고 표현하였다. 비래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 ‘비ᄅᆡ골’에는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 유안(幼安)이의 집이 있었다. 김호연재는 시댁의 ‘흠(欽)’자 항렬의 조카들과 교류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넷째 시 숙부 송병익의 손자인 송사흠과 송진흠(宋晉欽, 자 德昭: 1703~1770)은 아들 이상으로 아끼는 관계였다. 그 매개가 된 것이 문학작품이었다. 김호연재의 한시작품 속에서 송사흠은 ‘유안(幼安)・사질(思姪)’, 송진흠은 ‘덕소(德昭)・진질(晉姪)’, 두 사람을 동시에 가리킬 때는 ‘제질(諸姪)・제군(諸君)’으로 불렸다. 이 두 사람은 김호연재 보다 20여 년 나이가 어린데 당숙모 김호연재에게 시를 배웠다. 당숙모 김호연재가 그들의 문학 스승이었던 것이다. 김호연재는 두 사람이 지은 시에 차운하여 화답시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먼저 시를 지어 주면서 그들에게 화답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숙모가 시집 조카들에게 한시를 가르치는 이러한 문화는 조선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드물고 특수한 사례인 것만은 분명하다. 잠시 김호연재가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 걸어갔던 숲속 오솔길을 상상해 본다. 그 길은 오르락내리락 좁은 암벽 길이요, 그 사이로 계족산의 계곡물이 목메어 시름 소리를 내며 흐르는 길이다. 계족산 천년의 빛은 언제나처럼 푸르고, 비래암과 옥류각엔 휘영청 하얀 달빛만이 숨 막히게 뿜어져 나려온다. 시증조 동춘당이 다니던 그 발자취 앞에 서서 조상의 흔적과 남긴 뜻을 회억하며, 그녀의 선비적 사유와 성현을 따르고자하는[學聖賢] 마음을 새기고 또 새겼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탕탕한 군자의 마음[蕩蕩君子心]’을 아깝고 또 아깝게 여겼다. 계족산 깊은 산골짜기의 비래암과 옥류각! 그 곳은 호연당 규방여인의 숨 막히는 삶속에서 한 줄기 숨구멍 그 이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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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5-01
  • 소대헌 송요화와 혼인, 회덕 법천의 여성이 되다!
    <춘한> 복숭아꽃 어지러이 흩날리고 오얏꽃 향기로운데 나비는 분분히 작은 집을 둘러싸며 도네. 적막한 공산에 봄은 절로 흘러가고 법천의 저녁나절 이별의 시름 길도다. <春恨(춘한)> 桃花亂發李花香(도화난발이화향) 胡蝶紛紛繞小堂(호접분분요소당) 寂寞空山春自去(적막공산춘자거) 法泉斜日別愁長(법천사일별수장) 위의 <춘한(春恨)>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법천의 봄 풍경과 이별의 시름을 노래한 것이다. 김호연재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宋堯和, 1682~1764)와 혼인을 함으로써 회덕 법천(法泉)의 여성이 되었다. 열아홉 살(1699년)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김호연재는 친정오라버니들로부터 ‘법천누이[法泉妹]’로 불렸다. 법천누이로 불린 것은 혼인 후 첫 번째 집이 지금의 송촌동 고택이 아닌 법동이었기 때문이다. 법동 집은 시부모 송병하와 안정나씨 부부가 송촌에서 분가하여 이주하여 살았던 집이다. 지금의 법동초등학교 근처로 파악된다. 이곳에 김호연재의 시아버지 송병하는 시냇가 너럭바위 위에 작은 정자를 건립하고(1689년), 바위에 ‘법천석총(法泉石潨)’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지금 법천석총 바윗돌은 중리동 송애당 앞으로 옮겨져 있다. 법천은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법동 일대를 관통하여 읍내네거리와 대화공단 옆을 지나 원촌교 밑을 통과, 갑천으로 합류하는 큰 시냇물이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인하여 모두 복개 도로가 되어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법천의 물줄기만큼은 복개된 도로 밑으로 변함없이 흘러내려가고 있다. 도시 개발 이전에는 계족산과 맑은 시내가 어우러져 천혜의 형국을 이룬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김호연재의 시집 은진송씨는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가 회덕 백달촌(白達村)에 거주하면서부터 대전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송유는 오늘날 중리동에 있는 자신의 집 동쪽에 사당을 짓고, 별당인 쌍청당(雙淸堂)을 건립하여 당대의 인사들과 맑은 교유를 즐기며 시를 창작하였다. 그 때 함께한 벗들이 박연・박팽년・안평대군・김수온・조위 등이다. ‘쌍청’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맑고 밝은 바람과 달을 의미한다. 그 바람과 달은 비가 개고 난 뒤의 상쾌한 바람과 달이다. 송유가 자신의 삶속에서 추구하고자했던 삶의 모습을 반영한 당호이다. 그 뒤, 송유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한 마을은 자연스레 ‘송촌(宋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일부가 지금의 송촌동이 되었다. 김호연재의 친정은 선대부터 시집 은진송씨와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송유의 증손녀 송씨(宋順年의 딸)는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 1462~1539)의 처인데, 정광필과 송씨 부부는 김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의 외고조부와 외고조모이다. 송・김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는 문중의 위선사업 곧, 무덤의 비석이나 각종 건축물들의 편액과 기문(記文) 등을 써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쌍청당의 현판과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 무덤에 있는 빗돌의 두전(頭篆), <쌍청당송공묘표음기>・<선무랑송여집묘갈명>・<사헌부장령송희진묘갈명> ・<병조좌랑송방조묘갈명> 등을 쓰고 지었다. 김상헌은 <쌍청당송공묘표음기>에서, 송준길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송유의 무덤 앞에 세울 빗돌에 글을 지어주길 바란다는 요청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지평 준길이 나 상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저의 선조이신 쌍청공의 묘소에 예전에 묘표를 새겨 놓은 것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깎여 문드러졌습니다. 이에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도 역시 송씨의 외손이시니, 삼가 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고 말하였다. 이 글에서 송준길이 김상헌에게 ‘당신도 송씨 외손[子亦宋氏之彌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김상헌의 외고조모가 송순년의 딸 은진송씨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송유→송계사→송순년→정광필(송순년 사위)→정복겸→정유길→김극효→김상헌(송순년의 외5대손)으로 내려오는 가족관계이다. 송・김 두 집안이 본격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제월당 송규렴(宋奎濂, 1630~ 1709)과 안동김씨(1632~1701)의 혼인이다. 송규렴은 송준길의 11촌 조카, 안동김씨는 김상헌의 손녀이다. 그 다음으로 이루어진 혼인이 김호연재와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이다. 김호연재는 김상용의 현손녀로 송준길의 둘째손자 송병하의 며느리로, 김제겸은 김상헌의 현손자로 송준길의 셋째손자 송병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김호연재의 친정과 시집 사람들은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송준길과 송시열, 김창흡・김창협 등은 상호간에 사제 관계를 맺어 학통을 형성하였다. 송요화도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흡에게 『주역』을 배웠다. 이렇듯 두 집안은 학맥 또는 혼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연재와 송요화 부부는 선대로부터 맺어온 두 집안 간의 깊은 인연으로 하여 성사된 혼인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을 즐겨 노래했다. 법천을 떠나 송촌으로 이사하고(1714년) 난 뒤에도 자주 법천을 방문하였고 또 법천시를 썼다. 김호연재가 읊은 법천은 개울이 휘돌아 흐르고, 위태로운 돌을 밟아 물을 건너 오솔길과 모퉁이를 돌면, 무성한 풀 속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 찌르르 울어대고, 그 곳 어느 지점에 초당과 정자가 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일라치면 달빛이 숨 막히게 쏟아지는 그런 곳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의 하늘 아래에서 스물 세 해를 살다 갔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독에 온 몸을 떨 때, 고향 오두리 바다 물결과 형제를 그릴 때, 자신의 능력이 아까우나 규방 여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귀밑머리 흰 가닥 두어 서넛 비칠 때, 괴로이 잠 못 이룰 때 마다 법천의 산・바람・달・구름・안개・물소리・새소리・소나무・매화・복숭아꽃・대숲・사립문・나비・이슬 등을 친구 삼아 시로써 달래곤 하였다. 이러한 법천의 벗들이 있었기에 고독을 참아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300여 년 전 김호연재가 살아냈던 법천의 하루가 아스라하기만 하다. 문희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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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4-02
  • 화목한 아홉 남매, 뜰 가에 자형(紫荊) 나무 심은 뜻은!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아홉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김호연재 10세 때(1690년) 어머니 이옥재가, 16세 때(1696년) 아버지 김성달이 세상을 떠났다. 김호연재는 오빠와 언니들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김호연재의 큰 오라버니 김시택(金時澤, 1660~1713)은 남매 중 일곱째인 김시흡이 2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1699년), 이명세에게 시집간 첫째 여동생도 죽자(1702년), 부모와 형제들의 잇따른 죽음에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시택은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형나무를 주제로 한시와 시조로 창작하였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요청하는 한편, 동생들이 이미 지어놓은 한시작품들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남매의 시집이 『聯珠錄(연주록)』이다. 다음은 자형나무 시의 창작배경에 얽힌 김시택의 글이다. “북정에 자형나무를 심은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형제들이 매번 그 아래에 나아가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요즘 우리 형제들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이고 흩어진 한이 있으나, 꽃만은 스스로 이전과 변함이 없으니 슬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시조 한 수를 완성하고 이어서 절구시를 지었다. 이를 나란히 기록하여 여러 아우들에게 보여주었다.(北庭紫荊樹, 種來二十餘年, 兄弟每就其下, 遊歌以娛矣. 比者, 吾兄弟有存沒聚散之恨, 而花自如旧, 不勝感愴. 遂成一歌, 仍倚爲絶句, 並錄示諸弟.)” 다음은 김시택의 시조와 한시이다. <자형> <紫荊(자형)> 뜰 가에 처음 자형 나무 심은 것은 형제들의 화락을 꽃과 함께 기약함이지. 생사 이별에 쓸쓸함은 깊어만 가고 봄바람에 꽃이 피니 사람을 슬프게 하네. 庭畔初栽紫荊枝(정반초재자형지) 弟兄湛樂與花期(제형담락여화기). 死別生離蕭索甚(사별생리소삭심). 春風花發使人悲(춘풍화발사인비). 자형나무는 우리나라말로 박태기나무라고도 불리는데,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인 4월 초 중순에 진보라 빛 꽃을 피운다. 그런데 집안에 박태기나무를 심는 뜻은 이 나무가 형제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중국 양(梁)나라의 오균(吳均)이라는 사람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전진(田眞) 삼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분배하면서, 정원에 심겨있는 자형나무 한 그루까지도 3등분하여 나누어 갖기로 하였다. 이튿날 나무를 쪼개려고 하니 도끼를 대기도 전에 나무가 말라 죽어있었다. 이러한 일을 목격한 전진의 형제들은 크게 뉘우치고, 사람이 나무만도 못한 짓을 하였다고 흐느껴 울었다. 형제가 감동하여 딴살림 차려 나갈 것을 철회하자, 그 자형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이다. 김호연재의 형제자매들은 뜰 가에 자형나무를 심어 놓고 그 꽃그늘 아래에서 놀며 형제 화목을 노래 부르곤 하였다. 김시택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하직한 형제도 생기고, 또 혼인과 각각의 사연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으나, 오직 뜰 가의 자형만은 변함없이 정원을 지키며 피고 지는 것을 보고 형제들 생각에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위의 평시조 한 수와 한시를 완성하여 여러 아우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김시택의 시조와 한시작품은 형제를 그리는 큰 오라버니의 애절함이 작품 속에 잘 녹아져 있다. 『연주록』에 화답시가 전해지는 사람은 이지평댁으로 불리는 첫째 딸(이명세 부인), 이연기댁으로 불리는 셋째 딸(이항수 부인), 송광주댁으로 불리는 넷째 딸 김호연재(송요화 부인)이다. 세 자매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①김호연재의 큰언니(이명세 부인) <자형시에 화답하여> <和紫荊絶句(화자형절구)> 봄바람은 한스럽게 자형의 가지에 들고 함께 즐기자던 옛 기약 헛되어졌다네. 꽃 아래 형제들 모이지 못하나니 생사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春風恨入紫荊枝(춘풍한입자형지) 湛樂空逮昔日期(담락공체석일기) 花下未成兄弟會(화하미성형제회) 生離死別不勝悲(생리사별불승비) ②김호연재의 셋째언니(이항수 부인) <큰오라버니의 자형시에 화답하여> <和伯氏紫荊絶句次仲氏韻 (화백씨자형절구차중씨운> 옛 동산 자형의 가지에 봄이 드니 꽃은 의연히 피었으나 사람은 기약을 저버렸네. 죽은 사람 좇지 못하고 산 사람도 멀리 있으니 처음 뜻 생각하매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어라. 故園春入紫荊枝(고원춘입자형지) 花發依然人負期(화발의연인부기) 死者莫追生亦遠(사자막추생역원) 想來初意不堪悲(상래초의불감비) ③김호연재(송요화 부인) <자형시에 차운하여> <次紫荊詩韻(차자형시운)> 멀리서 알겠노라, 북쪽 뜰의 자형 가지 해마다 꽃이 피어 기약이 있는 듯하네. 사별하고 남은 인생 나 또한 멀리 있으니 봄바람에 머리 돌리매 슬픔 절로 나는 것을. 遙知庭北紫荊枝(요지정북자형지) 花發年年似有期(화발년년사유기) 死別餘生吾亦遠(사별여생오역원) 春風回首自生悲(춘풍회수자생비) 김호연재의 형제자매들은 오두리 바닷가 고향집의 뜰에 심어있는 자형나무 한그루를 회억(回憶)하며 그 끈끈한 동기간의 정을 표현해 내었다. 형제자매들은 위의 시에서 ‘우애 좋은 형제(兄弟湛樂)⋅고향 뜰(庭畔‧庭北)⋅옛 동산(故園)⋅자형나무(紫荊)⋅봄바람(春風)⋅꽃(花)⋅시간의 흐름(年年)⋅죽음과 이별(死別生離)⋅공간적 거리감(遠‧遙)⋅저버린 기약(負期)⋅한스러움(恨)⋅슬픔(悲)’ 등의 시어로 각자 그 심연의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김호연재는 깊은 밤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오두리 바닷가의 일렁이는 파도소리, 친정집 마당에 한가득히 울려 퍼졌던 그때 그 유년시절의 화목한 아홉 남매 웃음소리 환청으로 자신을 위로하곤 하였다. 문희순(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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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3-07
  • 기획특집김호연재의 출생, ‘나는 당당한 명문가의 후손!’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강원도 고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김성달(金盛達, 1642~1696)과 어머니 이옥재(李玉齋, 1643~1690) 사이에서 여덟 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청나라가 요구한 조선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1645년 2월까지 볼모생활의 고초를 치렀다. 이렇듯 김상용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김상헌은 굽힐 수 없는 척화의리로 각각 혹독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후인들에게 영원한 충절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김호연재는 이렇듯 드높은 충절과 학문 전통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김호연재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가문의 역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으므로 집안에 대한 긍지가 높았다. 그러한 의식의 한 단면이 한시와 <자경편(自警篇)> 등의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구현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비록 여자의 몸일지라도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주신 은혜를 입어 명문가에서 생장하였으니, 어찌 용렬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의 전통은 김호연재의 삶에 원천적 자존이 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삶이 금수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근신하고 경계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김호연재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며 존중하였다. 부부는 한가로울 때면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로 집을 떠나 있게 될 때면 안부 편지와 시를 써서 부인에게 보냈다. 부부의 사랑과 믿음에 바탕 한 연가적 한시 작품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독보적이다. 고전 문학사에서 남녀가 시를 주고받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 예는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시집 『안동세고』, 자녀 9남매의 시집 『연주록(聯珠錄』은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鴨東古今未曾有)’ 문학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읍이군서(泣李君書)>아내의 유묵 펼쳐보노라니눈길 머무는 곳마다 처연히 눈물 떨어지네.이제야 지난해 초여름의 편지를 보게 되었나니병중의 사연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슬픔인 것을. 李君遺墨若爲披看到悽然輒淚垂今得去年初夏札病中辭說最堪悲 김호연재는 19세에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의 증손부가 되어 회덕의 여성으로 살다 갔다. 두 명문가의 위상과 가통(家統)을 이어나간 그 삶이 결코 녹록치 많은 않았으리라. 김호연재가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이 지난 오늘. 이제 김호연재는 대전과 충남을 너머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녀의 자존이, 그녀의 삶이, 그녀가 남긴 많은 문자향(文字香)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호연재는 우리 대덕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역사, 그리고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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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2-02

실시간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기사

  •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300년 전 회덕 땅에 살았던 김호연재(1681~1722)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닌 자기 자신이 너무도 아깝다고 말하였다. ‘군자(君子)’는 유학을 근본이념으로 한 조선사회에서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 단계의 인간형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남성들조차도 자기 자신을 ‘군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군자지향(君子志向)’ 정도로 은근히 에둘러 표현하기가 일쑤였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닌 김호연재. 그러나 자신의 역량과 욕망을 펼칠 사회적 여건이 아니었던 조선사회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슬퍼하였다. 밝은 달처럼, 맑고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깨끗한 흰 구름처럼, 그녀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결하였다. 화려하게 몸치장하고 남성의 사랑이나 기다리는 성정이 아니었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슬퍼하였다. 그녀의 영혼은 속된 세상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으므로 언제나 외톨이였다. 김호연재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도 다 펼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의 운명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奈何無所爲]’라고 말하며, 통곡 또 통곡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노래한 시가 다음의 <자상(自傷)>이다. <슬퍼서> 아까워라, 이내마음 탕탕한 군자의 마음. 겉과 속 숨김없으니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않고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 도리어 그르다 하네. 규방 여인의 몸 된 것 슬퍼하노니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 <자상(自傷)> 可惜此吾心(가석차오심) 蕩蕩君子心(탕탕군자심) 表裏無一隱(표리무일은) 明月照胸襟(명월조흉금) 淸淸若流水(청청약유수) 潔潔似白雲(결결사백운) 不樂華麗物(불락화려물) 志在雲水痕(지재운수흔) 弗與俗徒合(불여속도합) 還爲世人非(환위세인비) 自傷閨女身(자상규녀신) 蒼天不可知(창천불가지) 奈何無所爲(내하무소위) 但能各守志(단능각수지) 김호연재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시대의 시대적 환경을 “뜻이 있어도 말하기 어렵고, 문필 있으나 감히 다하지 못한다네. 다만 홀로 소리를 삼켜 통곡하고, 흐르는 눈물에 옷깃을 적실 뿐(有志難言, 有文未敢. 秪獨呑聲, 有淚沾衣. <失題>)”이라고 읊었다. 김호연재는 당당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지적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나 녹녹치 않은 여성의 삶과 문학 환경, 시대의 절벽에 좌절하였다. 그리하여 “시와 술 뜻에 따라 맡기나니, 세상이 미치광이라 일컬어도 혐의치 않으리라(詩酒任隨意, 不嫌世稱狂. <閑情)>)!”라고 그 궁극의 아픔을 노래하였다.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며>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사립문 위의 구름과 물, 호연함을 즐기네.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삼산군수에게 쌀을 빌리니 이 또한 호연한 일일세. <乞米三山守(걸미삼산수)> 浩然堂上浩然氣(호연당상호연기) 雲水柴門樂浩然(운수시문락호연) 浩然雖樂生於穀(호연수락생어곡) 乞米三山亦浩然(걸미삼산역호연) 김호연재는 쌀을 빌리면서도 이처럼 당당하고 의연하다. 일반 사람들은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한다. 생활, 곧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변함없는 마음을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김호연재는 “가난은 선비의 떳떳한 도이다. 사람을 대할 때 덕(德)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 의식(衣食)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였다. 안빈낙도 · 안빈호학을 실천한 선비의 모습이다. 요즈음 우리네의 삶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배짱이, 풍요로운 정신세계가 아름답다. <취하여>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편안하구나. 고요히 자리 위에 누웠노라니 즐거움에 잠시 세상의 정 잊노라. <醉作(취작)> 醉後乾坤濶(취후건곤활) 開心萬事平(개심만사평) 悄然臥席上(초연와석상) 唯樂暫忘情(유락잠망정) <만음> 녹수는 콸콸 울타리 밖에 흐르고 청산은 은은히 난간 앞에 펼쳐있네. 공명은 다만 인간사 한바탕 꿈일 뿐 무엇을 구구하게 세상과 다투리오. <謾吟(만음)> 綠水冷冷籬外在(녹수냉냉리외재) 靑山隱隱檻前生(청산은은함전생) 功名秪是黃梁夢(공명지시황량몽) 何事區區與世爭(하사구구여세쟁) 김호연재의 시집은 몇 종류가 있다. [오두추도(鰲頭追到)]·[호연재유고(浩然亝遺稿)]·[호연재시집(浩然齋詩集)]·[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호연ᄌᆡ유고] 등이다. 현전 총 작품 수는 250여수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집들의 존재는 김호연재의 한시가 송씨 가문에서 세대 간에 상당한 관심 속에 향유 · 유통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김호연재의 9세손 송용억이 1995년에 발간한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는 이러한 시집들을 정리하고, 여기에 [자경편], 부록으로 외손 김종최의 <사실기>, 아들 송익흠의 <유사>, 종질 송명흠의 <천장시제문>, 친정 조카 김겸행의 <제문> 2편, 사위 김치공의 <제문>, 김종최의 <제문> 2편, 김원행의 <소대헌공묘표> 등을 실어 발간하였다. 현재 김호연재 시작품의 전모는 이 책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제, 당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달게 받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절규한 김호연재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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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6-06
  • 기획특집비래암과 옥류각, 그 맑은 자취에 달빛만 홀로 밝았어라!
    ①<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舊聞溪閣自先成(구문계각자선성) 此日登臨感復生(차일등임감부생) 疎竹䓗籠依舊色(소죽총롱의구색) 淺流幽咽作愁聲(천류유열작수성) 千年往跡山猶綠(천년왕적산유록) 一代淸遊月獨明(일대청유월독명) 惆悵秪今追不及(추창지금추불급) 空留誠意拜尊名(공류성의배존명) <비래암에서 느낌이 있어 덕소의 운에 이어서> 오래전 계각이 선대로부터 이루어졌음을 들었더니 오늘에 오르나니 감회 다시 생겨나는 도다. 성긴 대는 무성하여 옛 모습 그대로인데 얕게 흐르는 물은 그윽이 목메어 시름 소리내네. 천년이나 지난 자취엔 산 빛 오히려 푸르렀고 한 대에 맑게 놀매 달만 홀로 밝았어라. 서글퍼라, 이에 이르러 따르려 해도 미치지 못하나니 속절없이 정성들여 높은 이름에 절하노라. 이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계족산 자락에 있는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가 당질 송사흠(宋思欽, 자 幼安: 1700~1746)의 비래암 시에 차운한 것이다. ②의 시는 김호연재의 증손부 청송심씨(1747~1814)가 『호연ᄌᆡ유고』 에서 ①의 김호연재 한시 <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원작품을 한글 번역시로 정서해 놓은 것이다. 비래암은 김호연재의 시증조 동춘당 송준길과 그 후손・제자들의 강학 공간이면서 각종 의례가 치러진 곳이다. 비래암은 은진송씨의 유적이기는 하나, 김호연재의 친정 안동김씨 사람들도 즐겨 방문하였던 곳이었다. 비래암은 회덕의 송씨들이 1647년에 중 학조(學祖)를 시켜서 중창하였다. 송준길은 새로 지은 집에 하나의 메모를 벽에 걸어 여러 학생들에게 경계 삼도록 하였다. 일종의 ‘낙서금지’ 안내문이다. 그 내용은 “이 곳에 온 여러 수재들은 벽에다 낙서를 해서 새 집을 더럽히지 말라(來遊諸秀才, 愼勿壁書, 以汚新齋)”는 것이다. 비래암 곁으로는 옥류각이 있다. 옥류각의 건물 기둥 아래로는 계족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옥류(玉溜)’가 되어 흐르고, 그 옥류는 이내 작은 폭포를 이뤄 소쇄한 공간을 이뤄낸다. 송준길은 이러한 비래암과 옥류각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여 “겹겹의 바위에 옥 같은 물방울이 날린다(層巖飛玉溜)”(<차김옥천수창비래암운(次金沃川壽昌飛來菴韻) 중 3구>)고 노래하였다. ‘옥류각’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제월당 송규렴인데, 바로 송준길의 시구 ‘비옥류(飛玉溜)’에서 ‘옥류’를 취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비래암과 옥류각은 근대기까지 호서 사림과 기호학파 선비들의 강학과 소통의 인문지리 공간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역사의 흔적이 『비래서당좌목』(17세기), 『옥류강회록』(1843년), 『옥류각향음주례』(1843년), 『옥류각계첩』(1883년) 등의 문헌으로 남아있다. 김호연재는 계족산 밑자락 송촌에 살면서 비래골과 비래암, 옥류각을 간혹 찾았다. 그 때마다 느낀 감회를 시로 창작하여 남겼다. 그 시가 <비동감회기사질(飛洞感懷寄思姪)>・<비동감회(飛洞感懷)>・<차유안상비래암시운(次幼安上飛來菴詩韻)>・<촌등(村燈)> 등이다. 송촌에서 비래암으로 가는 길은 금암(琴巖) 바위 절벽을 돌아 비래골을 거치게 되는데, 그 길은 푸른 이끼가 길게 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김호연재는 비래암에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 온 시냇물이 돌에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정신을 맑혀준다고 표현하였다. 비래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 ‘비ᄅᆡ골’에는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 유안(幼安)이의 집이 있었다. 김호연재는 시댁의 ‘흠(欽)’자 항렬의 조카들과 교류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넷째 시 숙부 송병익의 손자인 송사흠과 송진흠(宋晉欽, 자 德昭: 1703~1770)은 아들 이상으로 아끼는 관계였다. 그 매개가 된 것이 문학작품이었다. 김호연재의 한시작품 속에서 송사흠은 ‘유안(幼安)・사질(思姪)’, 송진흠은 ‘덕소(德昭)・진질(晉姪)’, 두 사람을 동시에 가리킬 때는 ‘제질(諸姪)・제군(諸君)’으로 불렸다. 이 두 사람은 김호연재 보다 20여 년 나이가 어린데 당숙모 김호연재에게 시를 배웠다. 당숙모 김호연재가 그들의 문학 스승이었던 것이다. 김호연재는 두 사람이 지은 시에 차운하여 화답시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먼저 시를 지어 주면서 그들에게 화답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숙모가 시집 조카들에게 한시를 가르치는 이러한 문화는 조선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드물고 특수한 사례인 것만은 분명하다. 잠시 김호연재가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 걸어갔던 숲속 오솔길을 상상해 본다. 그 길은 오르락내리락 좁은 암벽 길이요, 그 사이로 계족산의 계곡물이 목메어 시름 소리를 내며 흐르는 길이다. 계족산 천년의 빛은 언제나처럼 푸르고, 비래암과 옥류각엔 휘영청 하얀 달빛만이 숨 막히게 뿜어져 나려온다. 시증조 동춘당이 다니던 그 발자취 앞에 서서 조상의 흔적과 남긴 뜻을 회억하며, 그녀의 선비적 사유와 성현을 따르고자하는[學聖賢] 마음을 새기고 또 새겼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탕탕한 군자의 마음[蕩蕩君子心]’을 아깝고 또 아깝게 여겼다. 계족산 깊은 산골짜기의 비래암과 옥류각! 그 곳은 호연당 규방여인의 숨 막히는 삶속에서 한 줄기 숨구멍 그 이상이었으리라.
    • 오피니언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5-01
  • 소대헌 송요화와 혼인, 회덕 법천의 여성이 되다!
    <춘한> 복숭아꽃 어지러이 흩날리고 오얏꽃 향기로운데 나비는 분분히 작은 집을 둘러싸며 도네. 적막한 공산에 봄은 절로 흘러가고 법천의 저녁나절 이별의 시름 길도다. <春恨(춘한)> 桃花亂發李花香(도화난발이화향) 胡蝶紛紛繞小堂(호접분분요소당) 寂寞空山春自去(적막공산춘자거) 法泉斜日別愁長(법천사일별수장) 위의 <춘한(春恨)>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법천의 봄 풍경과 이별의 시름을 노래한 것이다. 김호연재는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宋堯和, 1682~1764)와 혼인을 함으로써 회덕 법천(法泉)의 여성이 되었다. 열아홉 살(1699년)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김호연재는 친정오라버니들로부터 ‘법천누이[法泉妹]’로 불렸다. 법천누이로 불린 것은 혼인 후 첫 번째 집이 지금의 송촌동 고택이 아닌 법동이었기 때문이다. 법동 집은 시부모 송병하와 안정나씨 부부가 송촌에서 분가하여 이주하여 살았던 집이다. 지금의 법동초등학교 근처로 파악된다. 이곳에 김호연재의 시아버지 송병하는 시냇가 너럭바위 위에 작은 정자를 건립하고(1689년), 바위에 ‘법천석총(法泉石潨)’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 지금 법천석총 바윗돌은 중리동 송애당 앞으로 옮겨져 있다. 법천은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법동 일대를 관통하여 읍내네거리와 대화공단 옆을 지나 원촌교 밑을 통과, 갑천으로 합류하는 큰 시냇물이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인하여 모두 복개 도로가 되어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법천의 물줄기만큼은 복개된 도로 밑으로 변함없이 흘러내려가고 있다. 도시 개발 이전에는 계족산과 맑은 시내가 어우러져 천혜의 형국을 이룬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김호연재의 시집 은진송씨는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가 회덕 백달촌(白達村)에 거주하면서부터 대전에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송유는 오늘날 중리동에 있는 자신의 집 동쪽에 사당을 짓고, 별당인 쌍청당(雙淸堂)을 건립하여 당대의 인사들과 맑은 교유를 즐기며 시를 창작하였다. 그 때 함께한 벗들이 박연・박팽년・안평대군・김수온・조위 등이다. ‘쌍청’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맑고 밝은 바람과 달을 의미한다. 그 바람과 달은 비가 개고 난 뒤의 상쾌한 바람과 달이다. 송유가 자신의 삶속에서 추구하고자했던 삶의 모습을 반영한 당호이다. 그 뒤, 송유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형성한 마을은 자연스레 ‘송촌(宋村)’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일부가 지금의 송촌동이 되었다. 김호연재의 친정은 선대부터 시집 은진송씨와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송유의 증손녀 송씨(宋順年의 딸)는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 1462~1539)의 처인데, 정광필과 송씨 부부는 김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의 외고조부와 외고조모이다. 송・김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는 문중의 위선사업 곧, 무덤의 비석이나 각종 건축물들의 편액과 기문(記文) 등을 써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쌍청당의 현판과 송준길의 아버지 송이창 무덤에 있는 빗돌의 두전(頭篆), <쌍청당송공묘표음기>・<선무랑송여집묘갈명>・<사헌부장령송희진묘갈명> ・<병조좌랑송방조묘갈명> 등을 쓰고 지었다. 김상헌은 <쌍청당송공묘표음기>에서, 송준길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송유의 무덤 앞에 세울 빗돌에 글을 지어주길 바란다는 요청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지평 준길이 나 상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저의 선조이신 쌍청공의 묘소에 예전에 묘표를 새겨 놓은 것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지나 깎여 문드러졌습니다. 이에 다시 세우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도 역시 송씨의 외손이시니, 삼가 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지었다.”고 말하였다. 이 글에서 송준길이 김상헌에게 ‘당신도 송씨 외손[子亦宋氏之彌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김상헌의 외고조모가 송순년의 딸 은진송씨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송유→송계사→송순년→정광필(송순년 사위)→정복겸→정유길→김극효→김상헌(송순년의 외5대손)으로 내려오는 가족관계이다. 송・김 두 집안이 본격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제월당 송규렴(宋奎濂, 1630~ 1709)과 안동김씨(1632~1701)의 혼인이다. 송규렴은 송준길의 11촌 조카, 안동김씨는 김상헌의 손녀이다. 그 다음으로 이루어진 혼인이 김호연재와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이다. 김호연재는 김상용의 현손녀로 송준길의 둘째손자 송병하의 며느리로, 김제겸은 김상헌의 현손자로 송준길의 셋째손자 송병원의 사위가 된 것이다. 김호연재의 친정과 시집 사람들은 학맥으로도 연결되어 있다. 송준길과 송시열, 김창흡・김창협 등은 상호간에 사제 관계를 맺어 학통을 형성하였다. 송요화도 김상헌의 증손자 김창흡에게 『주역』을 배웠다. 이렇듯 두 집안은 학맥 또는 혼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호연재와 송요화 부부는 선대로부터 맺어온 두 집안 간의 깊은 인연으로 하여 성사된 혼인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을 즐겨 노래했다. 법천을 떠나 송촌으로 이사하고(1714년) 난 뒤에도 자주 법천을 방문하였고 또 법천시를 썼다. 김호연재가 읊은 법천은 개울이 휘돌아 흐르고, 위태로운 돌을 밟아 물을 건너 오솔길과 모퉁이를 돌면, 무성한 풀 속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 찌르르 울어대고, 그 곳 어느 지점에 초당과 정자가 있다.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날일라치면 달빛이 숨 막히게 쏟아지는 그런 곳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의 하늘 아래에서 스물 세 해를 살다 갔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독에 온 몸을 떨 때, 고향 오두리 바다 물결과 형제를 그릴 때, 자신의 능력이 아까우나 규방 여인이라는 한계에 부딪쳤을 때, 귀밑머리 흰 가닥 두어 서넛 비칠 때, 괴로이 잠 못 이룰 때 마다 법천의 산・바람・달・구름・안개・물소리・새소리・소나무・매화・복숭아꽃・대숲・사립문・나비・이슬 등을 친구 삼아 시로써 달래곤 하였다. 이러한 법천의 벗들이 있었기에 고독을 참아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300여 년 전 김호연재가 살아냈던 법천의 하루가 아스라하기만 하다. 문희순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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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4-02
  • 화목한 아홉 남매, 뜰 가에 자형(紫荊) 나무 심은 뜻은!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아홉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김호연재 10세 때(1690년) 어머니 이옥재가, 16세 때(1696년) 아버지 김성달이 세상을 떠났다. 김호연재는 오빠와 언니들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김호연재의 큰 오라버니 김시택(金時澤, 1660~1713)은 남매 중 일곱째인 김시흡이 2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1699년), 이명세에게 시집간 첫째 여동생도 죽자(1702년), 부모와 형제들의 잇따른 죽음에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시택은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자형나무를 주제로 한시와 시조로 창작하였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요청하는 한편, 동생들이 이미 지어놓은 한시작품들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남매의 시집이 『聯珠錄(연주록)』이다. 다음은 자형나무 시의 창작배경에 얽힌 김시택의 글이다. “북정에 자형나무를 심은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형제들이 매번 그 아래에 나아가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요즘 우리 형제들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이고 흩어진 한이 있으나, 꽃만은 스스로 이전과 변함이 없으니 슬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시조 한 수를 완성하고 이어서 절구시를 지었다. 이를 나란히 기록하여 여러 아우들에게 보여주었다.(北庭紫荊樹, 種來二十餘年, 兄弟每就其下, 遊歌以娛矣. 比者, 吾兄弟有存沒聚散之恨, 而花自如旧, 不勝感愴. 遂成一歌, 仍倚爲絶句, 並錄示諸弟.)” 다음은 김시택의 시조와 한시이다. <자형> <紫荊(자형)> 뜰 가에 처음 자형 나무 심은 것은 형제들의 화락을 꽃과 함께 기약함이지. 생사 이별에 쓸쓸함은 깊어만 가고 봄바람에 꽃이 피니 사람을 슬프게 하네. 庭畔初栽紫荊枝(정반초재자형지) 弟兄湛樂與花期(제형담락여화기). 死別生離蕭索甚(사별생리소삭심). 春風花發使人悲(춘풍화발사인비). 자형나무는 우리나라말로 박태기나무라고도 불리는데, 봄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인 4월 초 중순에 진보라 빛 꽃을 피운다. 그런데 집안에 박태기나무를 심는 뜻은 이 나무가 형제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중국 양(梁)나라의 오균(吳均)이라는 사람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전진(田眞) 삼 형제가 부모의 유산을 분배하면서, 정원에 심겨있는 자형나무 한 그루까지도 3등분하여 나누어 갖기로 하였다. 이튿날 나무를 쪼개려고 하니 도끼를 대기도 전에 나무가 말라 죽어있었다. 이러한 일을 목격한 전진의 형제들은 크게 뉘우치고, 사람이 나무만도 못한 짓을 하였다고 흐느껴 울었다. 형제가 감동하여 딴살림 차려 나갈 것을 철회하자, 그 자형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이다. 김호연재의 형제자매들은 뜰 가에 자형나무를 심어 놓고 그 꽃그늘 아래에서 놀며 형제 화목을 노래 부르곤 하였다. 김시택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하직한 형제도 생기고, 또 혼인과 각각의 사연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으나, 오직 뜰 가의 자형만은 변함없이 정원을 지키며 피고 지는 것을 보고 형제들 생각에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위의 평시조 한 수와 한시를 완성하여 여러 아우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김시택의 시조와 한시작품은 형제를 그리는 큰 오라버니의 애절함이 작품 속에 잘 녹아져 있다. 『연주록』에 화답시가 전해지는 사람은 이지평댁으로 불리는 첫째 딸(이명세 부인), 이연기댁으로 불리는 셋째 딸(이항수 부인), 송광주댁으로 불리는 넷째 딸 김호연재(송요화 부인)이다. 세 자매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①김호연재의 큰언니(이명세 부인) <자형시에 화답하여> <和紫荊絶句(화자형절구)> 봄바람은 한스럽게 자형의 가지에 들고 함께 즐기자던 옛 기약 헛되어졌다네. 꽃 아래 형제들 모이지 못하나니 생사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春風恨入紫荊枝(춘풍한입자형지) 湛樂空逮昔日期(담락공체석일기) 花下未成兄弟會(화하미성형제회) 生離死別不勝悲(생리사별불승비) ②김호연재의 셋째언니(이항수 부인) <큰오라버니의 자형시에 화답하여> <和伯氏紫荊絶句次仲氏韻 (화백씨자형절구차중씨운> 옛 동산 자형의 가지에 봄이 드니 꽃은 의연히 피었으나 사람은 기약을 저버렸네. 죽은 사람 좇지 못하고 산 사람도 멀리 있으니 처음 뜻 생각하매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어라. 故園春入紫荊枝(고원춘입자형지) 花發依然人負期(화발의연인부기) 死者莫追生亦遠(사자막추생역원) 想來初意不堪悲(상래초의불감비) ③김호연재(송요화 부인) <자형시에 차운하여> <次紫荊詩韻(차자형시운)> 멀리서 알겠노라, 북쪽 뜰의 자형 가지 해마다 꽃이 피어 기약이 있는 듯하네. 사별하고 남은 인생 나 또한 멀리 있으니 봄바람에 머리 돌리매 슬픔 절로 나는 것을. 遙知庭北紫荊枝(요지정북자형지) 花發年年似有期(화발년년사유기) 死別餘生吾亦遠(사별여생오역원) 春風回首自生悲(춘풍회수자생비) 김호연재의 형제자매들은 오두리 바닷가 고향집의 뜰에 심어있는 자형나무 한그루를 회억(回憶)하며 그 끈끈한 동기간의 정을 표현해 내었다. 형제자매들은 위의 시에서 ‘우애 좋은 형제(兄弟湛樂)⋅고향 뜰(庭畔‧庭北)⋅옛 동산(故園)⋅자형나무(紫荊)⋅봄바람(春風)⋅꽃(花)⋅시간의 흐름(年年)⋅죽음과 이별(死別生離)⋅공간적 거리감(遠‧遙)⋅저버린 기약(負期)⋅한스러움(恨)⋅슬픔(悲)’ 등의 시어로 각자 그 심연의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김호연재는 깊은 밤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오두리 바닷가의 일렁이는 파도소리, 친정집 마당에 한가득히 울려 퍼졌던 그때 그 유년시절의 화목한 아홉 남매 웃음소리 환청으로 자신을 위로하곤 하였다. 문희순(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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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3-07
  • 기획특집김호연재의 출생, ‘나는 당당한 명문가의 후손!’
    김호연재(金浩然齋, 1681~1722)는 강원도 고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김성달(金盛達, 1642~1696)과 어머니 이옥재(李玉齋, 1643~1690) 사이에서 여덟 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은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청나라가 요구한 조선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 11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1645년 2월까지 볼모생활의 고초를 치렀다. 이렇듯 김상용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김상헌은 굽힐 수 없는 척화의리로 각각 혹독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후인들에게 영원한 충절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김호연재는 이렇듯 드높은 충절과 학문 전통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김호연재는 어렸을 때부터 익히 가문의 역사를 들으면서 성장하였으므로 집안에 대한 긍지가 높았다. 그러한 의식의 한 단면이 한시와 <자경편(自警篇)> 등의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구현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비록 여자의 몸일지라도 부모님께서 낳아 길러주신 은혜를 입어 명문가에서 생장하였으니, 어찌 용렬하게 금수의 무리와 더불어 길고 짧은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의 전통은 김호연재의 삶에 원천적 자존이 되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삶이 금수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근신하고 경계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김호연재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며 존중하였다. 부부는 한가로울 때면 바둑 두기를 즐겨하였다. 김성달은 벼슬살이로 집을 떠나 있게 될 때면 안부 편지와 시를 써서 부인에게 보냈다. 부부의 사랑과 믿음에 바탕 한 연가적 한시 작품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한시사에서 독보적이다. 고전 문학사에서 남녀가 시를 주고받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 예는 적지 않다. 그러나 정작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미흡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성달⋅이옥재 부부의 시집 『안동세고』, 자녀 9남매의 시집 『연주록(聯珠錄』은 그리하여 ‘우리나라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鴨東古今未曾有)’ 문학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읍이군서(泣李君書)>아내의 유묵 펼쳐보노라니눈길 머무는 곳마다 처연히 눈물 떨어지네.이제야 지난해 초여름의 편지를 보게 되었나니병중의 사연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슬픔인 것을. 李君遺墨若爲披看到悽然輒淚垂今得去年初夏札病中辭說最堪悲 김호연재는 19세에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의 증손부가 되어 회덕의 여성으로 살다 갔다. 두 명문가의 위상과 가통(家統)을 이어나간 그 삶이 결코 녹록치 많은 않았으리라. 김호연재가 세상을 떠난 지 300여 년이 지난 오늘. 이제 김호연재는 대전과 충남을 너머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사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녀의 자존이, 그녀의 삶이, 그녀가 남긴 많은 문자향(文字香)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호연재는 우리 대덕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역사, 그리고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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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호연재,그녀는누구인가?
    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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