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09(금)
 
  • 김호연재, 그녀는 누구인가? 네번째 이야기

①<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舊聞溪閣自先成(구문계각자선성)

此日登臨感復生(차일등임감부생)

疎竹䓗籠依舊色(소죽총롱의구색)

淺流幽咽作愁聲(천류유열작수성)

千年往跡山猶綠(천년왕적산유록)

一代淸遊月獨明(일대청유월독명)

惆悵秪今追不及(추창지금추불급) 

空留誠意拜尊名(공류성의배존명)

 

<비래암에서 느낌이 있어 덕소의 운에 이어서>

오래전 계각이 선대로부터 이루어졌음을 들었더니

오늘에 오르나니 감회 다시 생겨나는 도다.

성긴 대는 무성하여 옛 모습 그대로인데

얕게 흐르는 물은 그윽이 목메어 시름 소리내네.

천년이나 지난 자취엔 산 빛 오히려 푸르렀고

한 대에 맑게 놀매 달만 홀로 밝았어라.

서글퍼라, 이에 이르러 따르려 해도 미치지 못하나니

속절없이 정성들여 높은 이름에 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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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비래서당좌목- 송병하 등의 이름있음.jpg
▶『비래서당좌목』. 좌목에는 17세기 인물 119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맨 오른쪽에 적혀있는 송병하(宋炳夏)는 김호연재의 시아버지이다.

 

이 시는 김호연재(1681~1722)가 계족산 자락에 있는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가 당질 송사흠(宋思欽, 자 幼安: 1700~1746)의 비래암 시에 차운한 것이다. ②의 시는 김호연재의 증손부 청송심씨(1747~1814)가 『호연ᄌᆡ유고』 에서 ①의 김호연재 한시 <飛來庵感懷次德昭韻(비래암감회차덕소운)> 원작품을 한글 번역시로 정서해 놓은 것이다.  

비래암은 김호연재의 시증조 동춘당 송준길과 그 후손・제자들의 강학 공간이면서 각종 의례가 치러진 곳이다. 비래암은 은진송씨의 유적이기는 하나, 김호연재의 친정 안동김씨 사람들도 즐겨 방문하였던 곳이었다. 비래암은 회덕의 송씨들이 1647년에 중 학조(學祖)를 시켜서 중창하였다. 송준길은 새로 지은 집에 하나의 메모를 벽에 걸어 여러 학생들에게 경계 삼도록 하였다. 일종의 ‘낙서금지’ 안내문이다. 그 내용은 “이 곳에 온 여러 수재들은 벽에다 낙서를 해서 새 집을 더럽히지 말라(來遊諸秀才, 愼勿壁書, 以汚新齋)”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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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암과 옥류각. 비래암은 비래서당의 강학 공간이기도 하다. 사진 속 비래암은 근대기까지 유지되어왔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사진제공: 김정곤)

 

비래암 곁으로는 옥류각이 있다. 옥류각의 건물 기둥 아래로는 계족산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옥류(玉溜)’가 되어 흐르고, 그 옥류는 이내 작은 폭포를 이뤄 소쇄한 공간을 이뤄낸다. 송준길은 이러한 비래암과 옥류각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여 “겹겹의 바위에 옥 같은 물방울이 날린다(層巖飛玉溜)”(<차김옥천수창비래암운(次金沃川壽昌飛來菴韻) 중 3구>)고 노래하였다. ‘옥류각’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제월당 송규렴인데, 바로 송준길의 시구 ‘비옥류(飛玉溜)’에서 ‘옥류’를 취하여 이름 붙인 것이다.

비래암과 옥류각은 근대기까지 호서 사림과 기호학파 선비들의 강학과 소통의 인문지리 공간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역사의 흔적이 『비래서당좌목』(17세기), 『옥류강회록』(1843년), 『옥류각향음주례』(1843년), 『옥류각계첩』(1883년) 등의 문헌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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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각계첩』과 궤. 1888년 봄에 제작한 것이다.[무자춘조(戊子春造)]

 

김호연재는 계족산 밑자락 송촌에 살면서 비래골과 비래암, 옥류각을 간혹 찾았다. 그 때마다 느낀 감회를 시로 창작하여 남겼다. 그 시가 <비동감회기사질(飛洞感懷寄思姪)>・<비동감회(飛洞感懷)>・<차유안상비래암시운(次幼安上飛來菴詩韻)>・<촌등(村燈)> 등이다. 송촌에서 비래암으로 가는 길은 금암(琴巖) 바위 절벽을 돌아 비래골을 거치게 되는데, 그 길은 푸른 이끼가 길게 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김호연재는 비래암에 오르는 오솔길을 걸으며 계족산에서 흘러 내려 온 시냇물이 돌에 부딪는 소리가 사람의 정신을 맑혀준다고 표현하였다. 비래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 ‘비ᄅᆡ골’에는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 유안(幼安)이의 집이 있었다.

김호연재는 시댁의 ‘흠(欽)’자 항렬의 조카들과 교류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넷째 시 숙부 송병익의 손자인 송사흠과 송진흠(宋晉欽, 자 德昭: 1703~1770)은 아들 이상으로 아끼는 관계였다. 그 매개가 된 것이 문학작품이었다. 김호연재의 한시작품 속에서 송사흠은 ‘유안(幼安)・사질(思姪)’, 송진흠은 ‘덕소(德昭)・진질(晉姪)’, 두 사람을 동시에 가리킬 때는 ‘제질(諸姪)・제군(諸君)’으로 불렸다. 이 두 사람은 김호연재 보다 20여 년 나이가 어린데 당숙모 김호연재에게 시를 배웠다. 당숙모 김호연재가 그들의 문학 스승이었던 것이다. 김호연재는 두 사람이 지은 시에 차운하여 화답시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먼저 시를 지어 주면서 그들에게 화답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숙모가 시집 조카들에게 한시를 가르치는 이러한 문화는 조선이라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드물고 특수한 사례인 것만은 분명하다.

잠시 김호연재가 비래암과 옥류각을 찾아 걸어갔던 숲속 오솔길을 상상해 본다. 그 길은 오르락내리락 좁은 암벽 길이요, 그 사이로 계족산의 계곡물이 목메어 시름 소리를 내며 흐르는 길이다. 계족산 천년의 빛은 언제나처럼 푸르고, 비래암과 옥류각엔 휘영청 하얀 달빛만이 숨 막히게 뿜어져 나려온다. 시증조 동춘당이 다니던 그 발자취 앞에 서서 조상의 흔적과 남긴 뜻을 회억하며, 그녀의 선비적 사유와 성현을 따르고자하는[學聖賢] 마음을 새기고 또 새겼다.

김호연재는 자신의 ‘탕탕한 군자의 마음[蕩蕩君子心]’을 아깝고 또 아깝게 여겼다. 계족산 깊은 산골짜기의 비래암과 옥류각! 그 곳은 호연당 규방여인의 숨 막히는 삶속에서 한 줄기 숨구멍 그 이상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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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암과 옥류각, 그 맑은 자취에 달빛만 홀로 밝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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