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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식의 시간,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귀환한 승전병
    이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장미가 승전보를 알리며 여름날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다. 아름다운 승전병이 된 장미처럼 고결한 어르신의 귀환도 따뜻한 미담으로 남는다. 구순을 넘기셨지만 총기를 잃지 않은 어르신. 교양있는 말씨, 고운 차림새, 어머니는 아직 ‘여자’를 잃지 않으셨다. 95년을 살아내신 어머니의 인생은 연세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수많은 일들을 겪으셨지만 남는 건 ‘사랑’이라고 단언하신다. 사랑의 모체는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세상사 이모양 저모양으로 사랑의 실타래가 엮여있다. 결국,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온통 사랑으로 채워진 유년시절 1931년 음성군 금왕에서 출생하고 무극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서울 외갓집에서 서울여상을 다녔다. 그 시절에 소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집안의 여건이 풍족했다는 방증이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읍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여상 졸업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협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의 행보는 ‘신여성’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꽃 같은 날들이었다. 이제는 그리워하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린 그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2024년 94살이 되었다. 94년을 살고 있는 오늘이 나도 믿기지 않은 세월이다. 열세 살까지 동생이 없던 나는 중학교에 가서 여동생이 태어나 동생은 우리 집안에 보물이었다. 우리는 맏딸인 나 달홍, 정림, 대현, 광현, 정숙, 미숙 이렇게 6남매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13살까지 동생이 없던 것은 그 사이 동생들이 홍역으로 두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더더욱 동생의 탄생은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초등학교만 나와서 여느 집 딸들처럼 집안일을 거드는 일상이 당연하다고 보셨지만 외할아버지께서 앞으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나를 서울 외갓집으로 유학보내셨다. 나는 서울여상에 입학해 홍제동 고개를 넘어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서울여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같이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읍에서 유학을 갔지만 금왕에서 포목점을 하던 집의 딸이라 생활이 궁핍하지 않아서 끈달린 검정 가죽구두를 신고 서울 친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제주, 평양, 부산, 만주 등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도 많았다. 다들 그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집안의 딸들이었다. 학급은 송, 죽, 매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송반에서 공부를 했다. 세라복을 입고 주판을 놓던 ‘열다섯 살 달홍’이를 떠올려보니 너무 눈부신 날들이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방학때 고향에 내려오면 온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주었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나를 챙겨주시던 동네 어르신들까지 온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물난리가 나서 철로가 끊겼다. 기차에서 내려서 급히 전보를 치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돌아 금왕에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복입은 어린 나는 물난리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동네분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남의 자식이 아닌 우리 자식이라고 여겨주던 마을 분들 사랑에 감격스러웠다. 부모님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아서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다. 유년시절 사랑받던 추억을 생각하면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인다. 우리 인생의 풍미는 단맛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여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를 했다. 참하고 성실한 여행원으로 인기도 제법 많았다, 그 와중에 아버님이 음성에서 농협에 다니는 청년(박승식)을 만나보시고 나의 배필감으로 적역이라고 혼사를 진행하셨다. 우리 나이 때는 결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어서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를 운명으로 만나게 되었다. 1953년, 결혼식 당일 날 남편 얼굴을 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라 안심은 했지만 그렇게 얼굴한번 못 본 남자와 혼인을 하던 그 시대를 살았다. 남편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 점잖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대학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운형씨 피살사건이 터지면서 시국이 어수선하여 고향에서 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7남매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평탄하고 고운 길만 걷던 나에게 운명이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나 애꿎은 장난을 걸어왔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진천에서 테니스대회를 마치고 와서 속이 안좋다고 해서 한의원에 갔더니 대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해주었다. 황급히 병원에 갔더니만 위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은 암이 흔한 병이 되기도 했고 의술도 발달해서 완치 확률이 높아졌지만 50년 전만 해도 암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연상하곤 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이었다. 다행히 수술을 하고 그냥저냥 벼텼는데 수술 후 3년 만에 재발을 하고 50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에 큰 굴곡을 만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7남매와 함께 남겨진 그날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여인’ 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옥죄던 시절 유년 시절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고단한 인생길을 걷지 않았다. 50살이 돼서야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생살이 찢기는 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끝 모를 슬픔과 처음으로 직면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스스로 일상의 즐거움을 차단했다. 안경도 쓰지 않았다. 예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을 거 같아 두려웠다. 40년 전의 사고방식은 ‘사별한 여인’이라는 이름을 저울에 올리면 그 삶의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엄마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인내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았던 증인의 입장으로는 지금 여성들의 사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자기 결정권이 있고 혼자서도 당당한 여성들이 보기 좋다. 내가 동년배에 비해서 배움이 넓고 깊었지만 세상 속에서 여성의 한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0살이 가까워오니, 결국 사랑이다 지금은 막내아들 집에서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늘 마음의 저울에서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아직도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 90이 넘은 지금 아직도 나는 현역이다. 오래전 우리 땅이 터미널 부지가 되면서 음성버스 터미날 운영권을 갖고 있어서 전표 관리를 아직 내가 하고 있다. 서울여상에서 공부했던 저력을 지금까지도 발휘하고 있다. 성업 할 때는 대성여객, 서울버스, 신선버스, 경일여객 등 9개 회사를 관리했고 무표가 들어오면 암산으로 계산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사랑이라고 즉답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우리 아이들한테 돌려주었고 이웃들과도 나누었다. 나이 들어 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까닭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정 덕분이었다. 40살부터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내내 봉사활동을 해왔다. 대한어머니회 음성지회장, 육영회회장, 평통위원, 여성단체협의회 음성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면서 봉사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봉사활동때는 늘 호박죽을 직접 끓여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 봉사자들과 푸짐하게 나눠먹곤 했던 추억이 인생 말년의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유년 시절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라 특별한 명분 없이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 “나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라고 했던 말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씩만 실천한다면 세상이 강퍅해졌다는 아쉬운 소리가 줄어들 것 같다. 백살이 가까워오니 가족이나 이웃들이 작은 마음 하나씩만 나눠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결국, 사랑밖에 남는 게 없다. 이제 더 이상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떠날 일은 없겠지만 잠잠해진 바다 위로 유유자적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를 보는 것과 같은 그 안식의 시간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호사다. 오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거친 바다와 싸우고 귀환한 승전병의 미소를 띄고 있다. 지나온 나의 인생이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을 건넨다면 여한이 없다는 말로 화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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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내 인생 마지막 해외 여행지는 대만이 되었다. 2023년 10월에 대만 타이루거 협곡에 무사히 다녀오면서 해외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더 이상 장시간 비행기에 앉아 물맛, 입맛 다른 곳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컨디션과 체력이 아니다. ‘걸을수 있을 때 여행을 다녀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거 같다. 50보만 걸어도 숨이 차는 그 시절을 나도 만나고 말았다. 돌아보면 인생은 이미 끝이 결정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은 우리가 산을 보면서 숲만 바라보는 자세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잘 성장해야 숲이 튼튼하고 보기도 좋은 것은 거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85년도 귀하지만 하루하루가 더 거룩한 시간이다. 대자연 앞에서 작은 나의 존재를 발견하다. 꿈에 그리던 그랜드케니언은 다음 생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창 일할 나이에는 자식 키우고 살림 일구느라 꿈에만 그리던 곳들, 은퇴하고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다음에 다음에 하다보니 정작 때가 왔을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갈 수가 없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번역 글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울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해학적인 묘비명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만 협곡은 거두절미, 심산유곡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곳이다. 깊은 산은 그윽한 물을 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좁디좁은 대리석 협곡이 자로 잰 듯이 서 있었다. 수만 년에 걸쳐 물과 바람의 힘만으로 이토록 가파르고 좁은 협곡이 탄생했다. 그 시간의 폭과 길이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시간이다. 경이로운 협곡 앞에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은 바닥으로 내려가 봐야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요동치지 않는 자연 앞에 서봐야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교만한 태도를 반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가 말하는 수많은 진리 중에 ‘세상은 공짜가 없다’와 ‘자연은 위대하다’라는 말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인생의 만남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살다가 딸아이 육아를 돕느라 대전에 내려왔다. 대전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딸, 세종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사위. 맞벌이 부부의 고단함을 방관할 수만은 없어서 나이 든 우리가 보탬이 되려나 하는 마음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전에 내려왔다. 세종과 대전을 놓고 정주지를 선택하느라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10여 년 전 근교 벚꽃길을 지나며 아내는 대전으로 정주지를 정했다. 누군가 마지막 여생을 보낼 터전을 고르는데 성의가 없다고 훈수 둘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우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사숙고가 반드시 인생 전반에 통용되는 이치는 아니다. ‘운명’이라는 정해진 액자 안에서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의 처음 만남 또한 우연처럼 다가왔다. 나는 수원 사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남산을 오르내리는 게 썩 좋은 락이었는데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무더운 여름날 레이스가 살랑거리는 분홍색 양산을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처음 보았고 얼굴이 궁금해 잰걸음으로 그녀 앞을 앞질러 걸었다. 힐끗 쳐다보니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영리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후로 그녀와 남산 산책길에 말없이 눈인사를 여러 번 했다. 아내는 나팔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머리는 고슬고슬 말아 올려 제법 멋쟁이였다. 용기 내서 말을 걸고 아내도 내가 싫지 않았든지 거절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오다가다 만났어요”라고 한다. 상대방은 웃어넘기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정식으로 매파가 중신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조금 벗어나면 우리는 다들 ‘오다가다’ 만나는 것이다. 우리 인생 자체가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와 필연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와 남자라는 이름으로 ‘차별’하던 혹독한 시절 결혼할 당시 내 나이 29살, 아내 나이 23살이었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아내에게 결혼 프러포즈 선물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주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근 40년을 독서 한 번 제대로 못 하게 만들었다. 외손주들 봐주느라 세종에 내려와서 살면서 그나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평화로운지 아내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결혼하고 열세 식구를 건사했던 아내. 명동 한복판에서 한눈에 눈에 띄던 그 곱던 아내가 이제 열 손가락 모두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50년의 세월 속에서 아내의 몸은 부서졌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전달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위로의 말이 없어 내가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시집오자마자 시할머니 병시중을 시작으로 시누들이 다 시집보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공무원인 나도 박봉에 근근이 살아가다 보니 뾰족한 수가 없어서 때론 삶이 너무 피폐하기도 했다. 아이들 4남매가 착하고 반듯해서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 되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그리운 추억으로 남지만 당시를 지날 때는 인생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결국 승전고를 울렸으니 지금 여기에 와 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필시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표시도 나지 않지만 또 다음날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인생이라고 말하면 좀 서글프려나? 인생의 말미에 ‘대전’ 이라는 친구가 가르쳐준 이치 75년을 수원과 서울에서 살다가 대전에 내려와서 그것도 외손주 육아를 돕는 생활을 했으니 아내나 나나 답답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녀들 크는 재미에 힘든 것도 모른 채 오늘까지 왔다. 이제 우리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10살, 12살 귀염둥이들. 결국 우리 부부가 살면서 이룬 열매들이 몇 개 있다면 그중 으뜸은 손녀들의 성장이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데 온 마을이 힘을 보탠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지만 온 마을은 아니어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10년의 세월도 보탬이 되었다. 자랑이나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이치라고 할까. 우리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10년 전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을 때 만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서울내기 귀촌자가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벗으로 지내면서 적적함도 달래고 일상의 희로애락도 같이 나눴는데 건강하던 그이가 2년 전에 먼저 떠나면서 상실감이 아주 컸다. 매일 등산을 다니던 이가 대장암으로 2년간 투병하고 결국 뼈만 남은 몸을 나에게 보이고 숨을 거두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마음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의지할 친구가 먼저 떠났다는 슬픔도 컸지만 ‘아 이렇게 누구나 죽는구나’라는 상실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먼저 저승의 강으로 건너가는 일들을 겪었지만, 벗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치유하는 데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일상을 공유했던 존재가 사라지는 상실감이 생각보다 컸다. 그렇다면 아내가 먼저 떠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면서 전율이 왔다.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설렜던 마음이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사그라들고 전우라고 부르고 싶다. 전쟁터에서 같이 살아남은 전우, 공무원 박봉으로 열 식구가 넘는 가족을 건사하고 가내수공업 부업거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 나는 촌놈이 출세 한 번 해보겠다고 승진에만 몰두하고 가정은 아내에게 턱 하니 맡겨놓고 남의 집 일처럼 방관했었다. 야속할 텐데도 무심히 나를 인정해 주고 ‘내 꼴을 봐주던’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면? 아마도 팔 한쪽을 잃어버린 상실감보다 더 큰 상실감이 밀려와서 내 삶의 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분명하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반면교사 했던 이치는 바로 ‘있을 때 잘해’라는 세대를 넘나드는 한 줄의 명문이다. 일상을 공유했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얻은 섭리와 이치가 대전에서 얻은 큰 가르침이다. 손녀들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가 내려놓았던 많은 것들이 어린 새싹들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또 한 세대가 가고 다시 한 세대가 오는 자연의 섭리에 우리 부부가 일조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여정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비록 몸은 쇠락해도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서글프지 않다. 이제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눈앞에 파리가 왔다 갔다 하는 비문증이 심해져서 신문도 책도 읽기 어려운 때를 맞이했다. 그저 아내가 끓여주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계절이 지나는 길목을 목격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 내년에도 우리 동네 벚꽃을 볼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자연과 친구가 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지금의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다. 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4계절을 모두 즐겨본 세대라는 것도 우리가 받은 축복이다. 지금 나의 몸은 겨울이지만 마음은 봄이다.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을 보내는 지금이 나의 가장 따뜻한 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범부(凡夫)의 욕심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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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미수(米壽),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다
    미수연(米壽宴)을 마친 어르신이 촌철살인 한마디 건네주신다. ‘회한은 깊지만 나이든 지금이 오히려 삶의 큰 기쁨이 있지.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으니 새털처럼 가벼워’ ■ 비상을 꿈꾸던 小邑(소읍)의 청년 우리 고향은 복숭아 과수원이 유난히 탐스러웠던 곳이다. 봄에는 복숭아 꽃잎이 흐드러져 탄성을 자아냈는데 대문밖만 나가면 지천에 피어있는 복숭아 꽃 귀한 줄은 몰랐다. 곁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귀히 다루는 법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자연의 섭리인 양 고향마을도 그러했고 우리 식구에게도 늘 곁에만 있을 줄 알고 데면데면 했던 나를 반성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에서 잠시 일을 하다 경기도 포천으로 군대에 다녀왔다. 태어나서 가장 멀리 가본 곳이 포천이었다. 촌사람이라는 말이다. 8남매가 코딱지 만한 과수원 땅으로 먹고살려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서 나는 일찌감치 객지로 나가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우선 고향을 떠나 외가가 있는 괴산으로 갔다. 비등비등한 소읍으로 터전을 옮겼더니 별반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가진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젊은 나에게 돈 벌 꺼리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 영사기 돌리는 면서기로 면에서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끼니 걱정은 안하게되어 면장님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영사기를 들고 이마을 저마을 다니면서 영사기를 돌렸다. 당시만 해도 시골마을은 문화혜택을 받기 어려워서 영화를 보는 일이 시골사람들에게는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1년 예산을 지원해주고 우리는 필름을 사서 마을을 다니면서 영화를 틀어주었다. 마을 운동장이나 노인정, 면장 집 앞마당에서 영화를 보여준다. 근방 1키로 거리에서는 다들 모여서 영화를 봤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앉아서 노천영화를 보고 처녀총각이 모여서 서로 눈이 맞기도 했다. 그때 인기좋던 영화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였다. 신영균, 김지미, 김희갑 등이 유명배우였다. 김지미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은 여배우였다. 영화가 돌아가면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김지미는 시골 사람들에게 꿈속에서나 만날 여인이었다. 내 눈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아름다웠다. 끼이끽 거리며 돌아가는 영사기 앞에서 웃고 울던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나도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에게도 지금의 날이 올 것이라는 짐작도 못했던 지난 청춘의 시간이 있었다. ■ 다시 고향으로, 가족의 우환을 온몸으로 받아낸 아내 영사기를 돌리며 사람들이 울고 웃는 희비가 엇갈리는 그속에서 나의 사명이 있을까 했지만 나는 면서기로 정체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괴산에서 결혼을 하고 4남매를 낳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들과 포도 농사를 지었고 농사꾼으로 살아볼 요량이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고 땀 흘린 대가를 반드시 돌려준다. 과수 농사만 해서 언제 돈이 될까 싶어 한눈을 판다는 생각이 아닌, 돈 벌어볼 구상으로 다른 작물도 손을 대었다. 묘목장사 누에농사 안해본 것이 없었다. 돈이 될만한 것들은 손을 다 대어 보았지만 한 우물을 팔지 않아서인지 돈은 벌리지 않았고 안사람 고생만 주야장천 시켰다. 고향으로 돌아와 편찮으신 아버님 병수발을 아내가 12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요양시설이 부재해서 아내는 4남매 뒷바라지 하며 시아버지 병수발까지 매일 몸이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맏며느리라는 올가미가 아내를 옥죄고 아내는 시아버지의 병수발 아니 변수발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저러다 안사람이 먼저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즈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다들 호상이라며 위로했지만 아내의 12년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나는 아버님 돌아가신 자리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애통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눈물 없이 상여 뒤를 따랐던 까닭은 아들 노릇 할 만큼 했다기보다 아내의 진땀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줄곧 1등하던 아들 녀석 서울대학교 들어가더니 데모하느라 늘상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경찰한테 쫓겨다니며 집에는 형사들이 대문밖에서 진을 치고 우리 안식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아들은 한때 정치의 꿈도 가졌지만 밀어줄 형편도 안되고 그 길이 고난의 행군인 것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 스스로 포기하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정착했다. 녀석의 안타까움은 애비인 나도 짐작할수 없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꿈만 쫓기에는 둘러봐야 할 주변이 많다. 복숭아 농사로 몫돈 좀 만지는가 싶었을 때 평범한 사람의 삶을 평가절하했던 나는 큰돈 벌어보겠다고 여기저기 사업에 손을 댔는데 허상만 쫓다가 후회만 남았다. 우리는 사고만 치고 뒤치다꺼리는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가슴 졸이고 위장병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10년 전에 파킨슨이 와서 서서히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왼쪽 편마디가 오더니 손을 못 쓰고 내가 밥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어야 했다. 그것도 하루이틀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아내를 요양병원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병수발 들던 아내를 병원으로 보내는 날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도 위암 수술을 받고 난 후라 아내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평생 아들, 시아버지, 남편 뒤치다꺼리 하다가 본인 병구완은 가족에게 맡길 수 없던 아내에게 미안하고 속상해서 나는 바로 죄인이 되었다. 인생이 끝없이 허무하고 재작년에 아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나에게 안겨진 아내를 보자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아내를 보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보니 나의 거동이 자녀들의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자녀들에게 신세 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옥죄면서 일상이 오히려 더 피폐해졌다. 다시 혼자만의 일상에도 적응하고 어려울 때는 자녀들에게도 기대면서 살아보니 삶의 수레바퀴가 오히려 잘 굴러갔다. 불편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니 노년의 나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큰돈도 벌어보고 싶고 남들처럼 폼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부도, 명예도 운명에 있어야 하는 법. 凡夫(범부)로 살면서 안위해야 했는데 헛된 욕심 꿈꾸느라 마음만 상했던 젊은 날의 그림자가 있다. 이제 노욕이 없는 지금이 그저 평안하다. 이제 몸을 세월에 맡긴다. 그저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고 나를 데려가는대로 따를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삶이 이토록 가볍고 행복한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이제 다산 정약용이 썼던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이 마음에 딱 와닿는 그때를 만났다. 비록 손에 쥔 것은 없으나 자연의 섭리대로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억나는 문구를 떠올려보면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머리를 예찬하고,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하고,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한다라고 했다. 노쇠한 신체를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시를 읽으며, 꼭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어야만 즐거운 것은 아님을 생각해본다. 지금의 나도 비록 거동은 불편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의 밤을 보내는 노인이지만 이제 노욕 없이 나이든 나를 인정하는 일상의 고요를 맞이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언제든 먼저 간 마나님을 만나러 가도 아쉬울 것이 없는 ‘지금’이 가장 기쁠 때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 유쾌하게 한마디 던질 것이다. “나는 인생의 숙제를 다 끝내고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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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 故)용정순(1938~2018) 인생이 설니홍조(雪泥鴻爪)라 하지만 그리움은 남다
    어머니의 기일은 8월 1일이다. 2018년 8월 1일,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폭염이던 날씨 에 어머니는 새벽잠을 곤히 주무시다 꿈꾸듯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고운 어머니는 천생 여자로 살아오셨다. 일곱 살에 해방을 맞고 이후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에 항상 서 계셨던 분이다. 물론 기억 되지 않았지만...선화동에서 오랜 시간 살아 오셨고 인생의 말미에 25년간 대덕구에서 살다가신 분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라 어머니에게 그리움으로 남은 곳이다. ■그리움이 화석이 된 이름들 1963년 삼천포(지금의 사천)제일 사진관에 예쁜 자매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렸다. 스물네 살 때였다. 시집갈 날을 받고 동생 계순이와 견 포플린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한껏 멋을 냈지만 표정은 얼음처럼 굳었다. 고데기로 말아 올린 머리에 뺨이 발그레했던 정순이와 계순이는 눈이 부시게 예뻤던 경상도 가시나들이었다. 그 이후로 60년 동안 계순이와 단둘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경상남도 고성 한적한 바닷가가 고향인 나는 조반석수 넉넉히 하는 집의 딸로 어려움 없이 유년을 보냈다.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1961년 스물네 살에 결혼했다. 남편도 무뚝뚝한 경상도 충무(통영) 사람이었는데 현직에서 한창 바쁠 때라 나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결혼 후 1970년대 군 보안 관련 일을 담당하던 남편 따라서 울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남북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던 시기여서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금촌에서도 2년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했다. ■분단의 시대가 낳은 부산물, 정체 모를 배신감 1975년경 금촌이라는 작은 소읍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서울에 나가려고 국민학교에 다니던 딸아이와 금촌역에 도착했다. 역 앞 느티나무 앞에서 대여 섯 명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귀동냥으 로 들었더니 읍사무소 앞 도장집 황 사장이 20년간 고정간첩이었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워낙 점잖은 양반이라 충격이 컸다. 그렇게 선한 얼굴로 간첩이었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일요일이라 시골 사는 나의 유일한 낙(樂)이었던 서울 나들이 길에 그 사건을 접하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열차는 문산 파주 금촌을 지나 일산 백마를 거쳐 수색 가좌까지 가는 완행열차였다. 추석 전 창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노랗게 익은 벼 이삭이 도도하게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이 하루 종일 걸리는 서울 나들이였지만 한 달에 두 번 주어지는 금쪽같은 낭만이었다. 1976년 큰 딸이 4학년 때 더 이상 금촌에 살고 싶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뉴스를 보면서 몸서리가 쳐졌다. 바로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이었다. 판문점 접경 지역에 사는 불안감은 극에 달았다. 결국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타자의 시선, 요꼬 공장 불빛 아래 그녀들은 치열했다 1970년대 후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요꼬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몇 달이었지만 내 인생 중 가장 공격적인 시간이었다. 큰 오빠는 일류대 출신이었지만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인이 원하는 직장에 다닐 수가 없었다. 시류에 편승한 출세를 포기하고 스웨터 가내 수공업인 요꼬 공장을 차렸다. 요꼬는 니트 편물 기계인데 1980년대 전성기를 맞았으며 쇄도하는 물량 탓에 어려서부터 자수 놓는 솜씨가 좋았 던 나도 소일 삼아 오빠의 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월급이란 걸 처음 받아보고 감격스러워 한 달 내내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만 타쓰던 나에게 근로의 힘으로 받은 월급이 주는 만족감은 엄청났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그늘이 너무 편안해서 짧은 경험담으로 남겨졌다. 나는 생계수단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못하고 추억으로 기억되어 아쉬움은 오래갔다. 작은 공장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여인네들이 바늘에 손가락을 수없이 찔려가며 잠을 쫓고 가정을 지켰다. 그리고 형제들을 키워나갔다. 불빛은 어두웠지만 그녀들의 희생만큼 세상은 밝아졌다. ■우리 부부 ‘헌체(獻體:유체 기증)’를 실천하며 대전 현충원에 보금자리를 틀다 서울살이를 마치고 5.18광주 민주 항쟁이 있던 그 해 4월 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내성적인 나는 터전을 옮기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마침 그해 5.18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터전을 옮기며 내적 갈등이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 도청 뒷동네였던 선화동에서 오랜 기간 살고 나이 들어 대청댐과 계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선비마을로 와서 인생의 말미를 보냈다. 아침마다 계족산을 오르내리며 청량감을 맛보며 대덕구에서 할머니가 되었다. 주말이면 대청댐을 한 바퀴 돌면서 또 자연과 호흡하는 기쁨이 주어졌다. 도심지 선화동에서 맛볼 수 없던 또 하나의 낙이었다. 나는 내 또래의 여느 여인만큼 파란만장 한 질곡의 인생사를 살아오진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마음 놓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동력을 집안에서 만들었다. 물론 외로웠다. 격변의 시기를 살던 가족들은 자기 방식의 삶이 필요했고 나도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76살에 치매를 만났다. 바깥 활동 없이 집에서 책만 읽던 내게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갑장의 친구들은 농사짓고 층층시하 시부모를 모시며 술주정하는 남편을 참아내던 때다. 그녀들이 나를 호강하는 여자라고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어느 만큼은 공평하다고 했나.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때때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북적거리는 삶을 살았고 나는 ‘평안한 고독’을 선택했다. 2010년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만의 성에 나를 가두면서 서서히 치매와 만났다. 말이 좋아 ‘예쁜 치매’라고 위로하지만 땅거미가 질때면 무인도에 혼자 남아 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것도 밧줄에 묶인 채로 말이다. 석양을 바라보면서 황홀하다고 감탄 하던 내가, 사라지는 그 석양이듯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80년간의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나도 남편이 잠들어 있는 대전 현충원으로 돌아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생전에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고 불만이었지만 남편은 나를 험한 세상에서 모진 풍파와 싸우지 않게 해준 큰 울타리였다. 소나무 숲속 한가운 데 햇살이 부서지는 그 한 평짜리 집에 우리 아이들이 간간이 찾아와주면 우리 부부 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우리가 살다간 흔적은 현충원 묘역이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지역 의대에 헌체(獻體:유체 기증)를 서약했다. 설니홍조(雪泥鴻爪 : 기러기가 눈밭에 남기는 선명한 발자국), 소동파 시의 한 구절 이다. 그러나 그 자취는 눈이 녹으면 없어 지고 만다. 인생의 흔적도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작은 발자취들을 누군가 기억해 준다면 그리 헛헛하지 않을 것이다. 고달픈 삶의 흔적과 상처만이 참 인생이라 논할 수는 없다. 나처럼 몸으로 부딪치는 고달픈 상흔이 없어도 인생은 내내 갈등과 혼돈 속에서 연명돼 왔다. 그래서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당신 삶은 덧없지 않았소. 잘 살아왔구려’라고. 김경희 (부모님 자서전 전문 '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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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1938년 용호동 정호택님 굽은 나무는 목수의 눈 밖에 났지만 내내 숲을 지킨다
    ■ 육지 속의 섬마을 소년 어린 시절에는 문의면 수몰지구 동네에 살았다. 보리농사 조금 지어먹으면서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고 있던 집안의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글을 좀 아는 분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중용이며 한학 공부를 즐겨 했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던 아이다. 우리 고향은 백사장이 너무 고와서 가끔씩 눈을 감고 80년 전을 떠올리면 길다란 백사장 길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 진다. 물론 그 그림 속에는 나도 있고 친구 종수 영춘이 대식이도 있다. 지금은 다들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 나만 덩그러니 서있는 외로운 그림이다. 다들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우물안 개구리들은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세상에 눈을 뜨 게 해주신 작은 아버지 유년의 나는 작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시골에 두기에는 아까운 아이였다. 청주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께 “형님 호택이는 제가 데리고 가서 공부 시키겠습니다” 얼마 나 반가운 소리인지 시골에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열두 살, 나는 새로운 세상에 나간다는 마음에 청주로 떠나기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녘 한숨 소리에 툇마루에 나가보니 어머니께서 휘영청 뜬 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계셨다. “어머니 뭐 하세요?” “너는 좋냐? ”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는 그 속 깊은 심정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당신 자식을 시동생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궁색한 형편에 가슴이 찢어지신 것이다. 어머니 마음까지 들여다보기엔 어렸고 다음날 아침 떠나오는 길 어머니가 손 한번 잡아보자며 내 손을 꽉 잡으셨다. 아...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밭일이며 집안일, 할아버지 병수발까지 물기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의 손은 여자 손이 아니었다. 거친 나무껍질 같던 어머니의 손을 지금도 기억한다. ■ 우물 밖으로 나왔지만 세상은 호락호 락 하지 않았다 청주로 나가 작은 아버지 집에 거주하면서 청주 중고등을 거쳐 충북대학교를 다녔다. 작은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으셨다. 작은 아버지의 쥐꼬리만한 교사 월급으로 6남매에 나까지 덤으로 졸지에 7남매를 키우게 되셨다. 시골집에서 간간이 쌀가마니가 왔지만 작은 집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지는 나도 모른다. 한창 먹을 나이였지만 밥상에서 눈치 보면서 밥을 먹고 나로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6명의 사촌들과 모두 잘 지 낼 수 없어 간간이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타협하는 방법도 배워나갔다.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친구들과 백사장에서 회포를 풀기도 했다. 친구들은 섬마을에서 다시 부모의 농사 일을 물려받고 그렇게 작은 마을을 지키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대단해 보였지만 나도 결국 눈칫밥 먹으면서 공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갖고 시골을 떠나있던 그저 그런 사내였다. 영어 교사가 되어 동료 교사인 아내와 만나게 됐다. 그 시절에 연애라는 것을 했다. 아내는 인사성이 아주 바르고 야무진 후배 교사였다. 마음에 들었지만 바로 호감을 표시하기에는 내가 짊어진 짐이 많았다. 동생들 그리고 부모님, 아내는 양조장하던 집의 막내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책상 위에 쪽지를 두고 갔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아내는 대단했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갔고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형편이 당신한테 관심을 표명하기에 너무 부족하다고. 적나라한 나의 여건을 모두 털어 놓고 아내의 처분만 기다렸다. 아내는 이미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마운 사람. 고향 집에 인사드리러 가던 날 작은 배를 타고 마을을 들어가면서 아내는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생 많은 어머니를 알아차린 아내가 너무 감사했다. 50호 정도 시골 마을에 호택이 결혼할 여자가 온다니 동네가 난리가 났다. 더군다나 청주에서 선생님하는 여자라니 장가 잘가게 됐다고 아내를 구경 온 동네 사람들로 우리 집 싸리 대문 앞이 북적거렸다. 싫은 내색 안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는 내 유년 시절을 눈으로 보고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덜커덩 거리는 버스 안에서 손을 꼭 잡았다. 우리 결혼의 걸림돌은 처갓집이었다. 시골 태생에 농사나 겨우 짓고 근근이 먹고 사는 8남매의 장남한테 시집보내려니 양조장집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당연하다. 아내는 금지옥엽 같은 딸이었다. 병원 집 며느리로 시집 보내렸는데 학교에서 연애를 걸어 박봉의 동료 교사를 인사 시키러 데려 왔으니 장모님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주시는 장모님이 서운 했지만 장인어른이 내 품성이 좋아 보인다고 모주를 건네주셨다. 시골에서 많이 먹던 모주, 막걸리 찌끼미에 한약재를 타서 아버님이 해장술로 드시던 술이다. 장인어른과 나눈 모주 한잔에 그날의 서운함이 사라졌다.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결혼이었지만 장인어른의 배려로 우리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우리도 4남매를 낳고 부부 교사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시골에 남은 동생들도 배움은 많지 않지만 농사일이며 목수일로 다들 밥벌이를 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다들 무탈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했다. 우리 아이들도 착해서 아이들은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수제비와 만두가 너무 맛있다”며 불편한 시골집에 가는 걸 꺼려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 막내딸은 할머니가 너무 좋다며 늘 땀에 젖어 쿰쿰한 냄새 나는 어머니 품에서 “할머니 냄새 좋다”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천성이 착한 아이였다. ■ 고1 꽃다운 나이에 천사가 되어 날아간 우리 막내딸 우리 막내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 밥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잠들어 있나 싶어 딸 방으로 가보았더니 우리 아이가 핏기 없이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누워있었다.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을 열자마자 연탄가스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 딸은 그 밤에 연탄가스를 맡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버리고 말았다. 오빠들은 셋이 방을 같이 쓰고 고명딸이라 혼자 방을 쓰게 했었다. 아내의 절규,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통곡은 피가 말라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막내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일상으로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딸을 보내고 그 이듬해 간암으로 복수가 차올라 숨을 쉬기도 어려웠던 어머니의 상여를 매고 선산에 올라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날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아내는 딸을 보내고 너무 힘든 나머지 결국 학교를 퇴직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으로 힘들던 아내는 결국 치매라는 불청객과 만나게 되었다. 아내의 치매는 나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너무 힘들었다. 부잣집 딸이었던 아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장밋빛 인생이었을 텐데 나를 만나고 통스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멈추면 나 또한 견뎌내기 힘들었다. ■ 굽은 나무 지금은 우리 부부 고향 마을 근처로 돌아와 작고 예쁜 집을 짓고 나는 아내를 돌보며 지내고 있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손주를 데리고 찾아와 아내를 기쁘게 하지만 아내는 사실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저 자주 보는 아이들이라 아내도 덩달아 기뻐하지만 아내의 기억은 이미 소실되었다. 나만 알아보는 아내, 둘째 며느리가 우리 딸을 많이 닮아서인지 영주야 영주야 부르며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나는 정신을 놓을 수 없다. 나도 하루 하루 기력이 쇠하지만 지금 소원은 아내와 같이 손잡고 같은 날 먼 여행을 떠나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축복은 나에게 찾아 올까? 아내보다 하루 더 늦게 여행 떠나는 소원만 남아 있다. 결국 시골을 떠나 큰 세상에 나가 꿈도 펼치고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픈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아내와 산보하고 며느리들이 냉장고 칸칸이 쌓아놓은 반찬들을 내 손으로 꺼내서 아내와 겸상을 하는 이 하루하루가 이토록 귀한 줄 이제 알게 되었다. 울창한 숲의 우뚝 선 나무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그 숲을 지키는 굽은 나무가 되어보니 목수의 도끼질도 두렵지 않고 바람냄새 풀냄새 흙냄새까지 향기롭다. 김경희 부모님자서전전문‘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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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이순자 어머니 1936년~ 지는 석양보다 붉은 노을이 좋아
    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어머니댁 낮은 담장 밑으로 키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낮달맞이 꽃, 소담스러운 맨드라미, 과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어머니를 닮았다. ■ 거짓말, 저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살이에요” 시집가서 이웃 형님들이 몇살이냐 물으면 열아홉 살이라고 거짓말을 줄곧 했다. 열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 입하나 덜겠다고 오라버니가 보낸 시집이라 더군다나 키 작은 내가 열다섯 살 때는 언뜻 보면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간다니 더군다나 신랑은 덩치가 산만했다. 초례상에서 나는 창피하기만 해서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첫날밤부터 신랑이 옆에만 오면 엉엉 울어대느라 새신랑도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첫날밤도 결혼하고 여섯 밤을 지난 후에 치렀다. 남편이 점잖은 양반이라 나를 아기처럼 생각하고 존중해주었다. 군대 생활 중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휴가 마지막 날 나는 남편의 여자가 되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데면데면하다가 남편이 군대로 복귀하는 날 어찌나 서운한지 마을 어귀까지 쫓아 가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을 보내는 마음이 아니라 내 울타리가 되어 줄 큰 오라버니가 떠나는 마음이었다. 경기도 연천으로 군복무를 하러 간 남편을 보내고 나는 시집에 홀로 남았다. ■ 아 가여워라, 가련한 생태계에 갇힌 여자들 이제는 헛웃음만 나오는 시집살이 또 시집살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얄밉다고 했나. 고추보다 더 매운 건 시누이 시집살이였다. 남편은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 여동생이 둘 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어쩌면 그리도 매정한지... 내 등에 누에를 넣는 건 예삿일이고 얼음 깨고 빨래해서 널어놓으면 숯검댕이를 마른 옷에 묻혀놓기가 다반사였다. 장난을 넘어선 패악질이었다. 옆 동네로 시집간 시누이는 본인도 시집살이를 하면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다. 본인의 억울함을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우리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고, 다시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는 가련한 생태계에 갇혀서 여자들은 살아왔다. 밭농사와 잠실을 하던 시댁이라 일거리가 너무 많았다. 잠자고 있으면 등 뒤에서 뭔가 꼬물꼬물 엉겨 붙는 느낌이 든다. 누에가 기어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까무라치게 놀랐지만 나중에는 귀여운 녀석을 손에 살며시 잡고 놓아주었다. 시댁의 삶에 익숙해져가는 내 모습이 어느 날 은 가엽기도 했다. ■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 다정 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하루 종일 새벽부터 집안 살림에 막내 시누 업고 우물물 길어오고 밭농사에 누에까지.. 작은 몸으로 무쇠처럼 일만 했다.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한순간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삶에 유일한 희망은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도 나와 같은 고단한 시절을 분명히 보냈던 분인데 나를 예뻐하시고 귀하게 대접해주셨다. 항상 ‘우리 예쁜 아가야’라고 불러주셨다. 밥상에서 김치 한 젓가락이라도 꼭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셨다.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시할머니가 저승으로 떠나시던 날, 새벽 4시면 일어 나시던 할머니가 기척이 없어서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면서 이승을 떠나셨다. 유일한 나의 안식처이던 할머니 상여 뒤를 따르면서 피를 토하듯이 울었다. 다시 남편이 제대를 하고 나의 희망이 되었다. 듬직한 사람이라 식구들 몰래몰래 나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던 건 남편이 꼭 잡아준 그 손이 었다. 내가 그렇게 힘을 얻어서 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꼭 존댓말을 하고 손을 꼭 잡아 준다. 스무 살 나를 붙잡아준 그 힘을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 6남매를 낳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여느 여자들과 비슷한 인생길을 걸었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듬직한 남편 만나서 마음만은 호강했다. 남편은 농사를 나에게 맡기고 청주로 나가 인쇄업을 했다. 나는 시골에 남고 남편만 청주로 나가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요즘 여자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말 부부 아니 월말 부부를 나는 50년 전부터 했다고 며느리들에게 웃으면서 얘기하곤 한다. 없이 살아도 정이 좋아야 한다. 여자들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하나면 고단한 일상을 다 잊을 수 있다. 어디 여자뿐일까, 남자도 마찬가지다. ■ 인생에 정답은 없다 우리들은 80년 세월 속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아껴주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다정해도 우리 6남매 중 서울대 나오고 가장 넉넉한 아들이 이혼을 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아서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아들도 큰 사업하면서 사회활동 하느라 집안건사 안하고 오히려 며느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며느리도 사람인지라 20년 동안 외로웠고 남은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는 둘의 의견을 존중했고 지금은 서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어서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다. 숙제를 잘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인생과 타협하는 방법이다. 나이 드니 몸은 기력이 없어졌지만 길이 보인다. 간간이 30여년 써온 일기장을 넘겨보면 그 안에 이미 길이 나 있었다. 눈이 침침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기쁨이 있다. 나이를 먹어야 볼 수 있는 그것!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여생은 그저 자애로운 할머니로만 살 것이다. 뜻대로 되어야 할 텐데... 밤이면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뜰 있는 집이 주는 낭만이다. 새벽에는 기온이 내려가 이불을 끌어와서 배 위에 얹어야 한다. 아, 가 을이 깊어가고 있구나! 김경희 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 ‘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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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정동자 어머니 1941년~ 호시절 기억의 끝에서 추억을 만나다
    “그랴 거기서 봐”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잔 먹기로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오늘은 내가 계산 하는 날, 지갑도 단디 챙겼다. 70줄에 들어선 동상들이라 10여년 아래지만 친구로 끼어주니 황송하다고 농담을 건넨다. 우리 집으로 와서 장롱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50년 된 가계부를 꺼내서 보여 줬더니 둘이 기절초풍을 한다. 내 역사잖아. 살아온 역사, 귀하고 귀한거지. 하루도 허투루 안 살았던 훈장 같은거야. 그래서 당당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려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으쓱했다. 먼저 간 영감이 나랑 같이 즐거우면 좋으련만 둘이 살다 한사람이 먼저 가는 건 어느 한 집도 예외가 없으니 나는 나대로 잘 살다가야 먼 훗날 영감 만날 때 더 반가울 거다. 동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53년 동안 궂은일도 기쁜 일도 많았지만 애걸복걸 안하고 살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냥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밖에서 요란한 천둥 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겁박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여유있게 잘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말 ‘여한이 없다’라고 감히 말한다. ■ 우리 집 나이도 쉰둘, 중리동에 한창 양옥주택이 들어 설 때 1941년생이여. 우리나라 나이 여든 셋, 요즘은 나라에서 만으로 나이를 맥인다니 여든 둘이지. 어느새 80년을 훌쩍 거슬러 왔나 몰러. 지금 중리동 이집에서는 52년을 살았다. 현도에서 우리 4남매 다 낳고 이집으로 왔으니 반백년이 넘은 집이다. 그 때 젖먹이였던 영주가 쉰셋이다. 아직도 고운 데 벌써 쉰이 넘었다. 우리 옛적 쉰 살이면 할매소리 들었는데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딸만 봐도 새댁 같다. 좋은 세상이 오긴 온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보면 왜 그리 험악한 얘기들이 많은가 몰러. 세상이 좋아지면 사는 것도 더 좋아져야 하는데 우리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리 울 때가 있어. 그 때는 없이 살아도 인심들은 좋았는데 말이야. 옛날엔 우리 집을 동네에서 빨간 기와집이 라고들 불렀다. 동네에서는 그래도 끗발 있는 산림계장 집이라고 방귀깨나 뀌는 집이었다. 그러믄뭐햐 우리 영감님은 곧이 곧대로 살던 양반이라 그 끗발 있는 자리에서도 고지식하게 일하느라 콩고물 한번 얻어먹은 적이 없네. 허울 좋은 끗발이었지만 듬직했던 우리집 양반이 최고였어. 우리 아이들도 영감님 닮아 다들 양반이야. ■ 고향은 부강, 백화점 물 좀 먹었지 내 원 고향은 부강이야. 스물한 살에 남편 만나서 현도로 시집을 왔다. 친정집은 농사를 지었어. 보리쌀 농사짓고 식구들 입에 겨우 풀칠이나 했으니 니집내집 다들 가난하게 살던 때야. 우리 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부모님은 인자하시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어. 부모님 품을 떠난 건 초등학 교 3학년 때였다. 청주 사는 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다가 공부시켜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집으로 갔다. 친정은 가난해서 작은 아버지 젙(곁)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작은 집은 잘사는 집이라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밥값 하느라 그 집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여중에 다니 다가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래도 교복입고 여중 다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으니 큰 추억이다. 백화점에서 심부름도 하고 작은 일들을 도왔어. 일머리가 좋아서 나이는 어렸어도 야무지게 잘했지. 학교 갔다 오면 심부름 하고 애기 봐주고 가게 가서 물건 해놓고 연일 바빴지. 지금 여든이 넘어서도 아직 총기 있다는 소리 듣는 건 어쩌면 작은 집에서 공부도 했지만 백화점 다니면서 여러 가지 배워서 문리를 깨우친 모양이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그렇게 저렇게 고단 했던 시간들이 또 영민한 내가 되었네. 그때 훈련받아서 아직 총기가 있나봐. 백화점에 있을 때 보따리 장사 보부상 할매들이 나한테만 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갖다놓고 “아가씨 이것 좀 끼어 넣고 팔아줘” 하더라고 내가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때라 순진해보여서 그랬을거야. 나는 우리 엄마가 가난해서 보부상 할매들도 가난할 것이 라고 생각하니 엄마 생각이 나서 슬쩍 슬쩍 물건을 끼워서 진열해주기도 했어. 동변상련이라고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 먹고 살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 눈치 껏 할매들 물건을 끼워서 팔아줬지. 순전히 우리 엄마 생각해서 그랬던거야. 백화점에 서 물건 팔려면 머리도 좋아야 돼. 물건마다 가나다라 암호가 있거든. 지금 말로 정가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들어 ‘가’ 하면 천 원짜리, ‘나’ 하면 2천 원짜리들로 정가를 표시하는거야.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스무 살이 됐어. 그때는 친구둘이 보통 열여덟, 열아홉에 시집들을 많이 갔어. 나는 스물한 살에 중매가 들어왔어. 현도 김주사 댁이라고 뼈대 있고 돈 많은 양반가문이라고 해서 시집가서 팔자 고치려나 내심 기대했었지. 시집와서 보니 그 많은 땅을 다 팔아 먹고 빈털터리인거야. 고생문이 훤하더구먼... ■ 현도면 김주사댁으로 호적을 옮기다, 뒷모습 둔둑했던 남편 우리는 결혼 전에 세 번은 만났을거야. 약혼사진 찍으러 가야 되잖아. 청주가서 약혼사진 찍는 날 처음 만나고 그 이후로 세 번은 만났어. 공부하고 백화점에만 다니다가 선을 봤으니 어디 남자 만날 일이 있기를 해쑥스럽지. 그래서 뒤통수만 봤어. 양복입고 왔는데 뒷모습이 둔둑하더라고. 듬직해보였어. 살아보니 천하의 양반이야. 스물 한 살에 첫눈에 보면서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60년 동안 변함이 없었어. 생전 말수가 없었어. 면 산림과에 다녔는데 그 때는 산림과면 최고 끗발이 좋은 과였어. 시집와서 보니 남편은 합격이었는데 중매쟁이 말은 부잣집이라했지만 생각보다 돈이 많은 집은 아니었어도 시댁 식구들 인품은 다들 좋았어. 시집가서 보니 우리남편이 막내라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셨어. 어머니께서 “새아가 너가 밥해먹 어라” 하시며 됫박을 나한테 맡기셨어. 그때부터 살림을 했지. 점잖은 분들이라 깊은 정이 들어서 돌아가시고 선산에 묻으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요령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 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다음호에 이어서!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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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서전
    2024-02-21
  • 정동자 어머니 1941년~(2) 호시절 기억의 끝에서 추억을 만나다
    ■조카들까지 돌보던 새댁, 보따리 장사 로 살림을 보태다 남편은 끗발 좋은 산림과에 있었지만 교과서 같은 양반이라 술 사주면 술 받아먹는 정도는 했지만 눈먼 돈 한번 챙겨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은 낭구(나무)하는 게 돈벌이였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감독하는 남편한테 막걸리를 잔뜩 먹여서 남편이 자전거 타고 오다 저수지에 빠져서 우리 영감님이 물귀신에 끌려가다가 겨우 살아난 일들도 있었다. 휴... 십년감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잘 참고 성실하게 근무해서 정년퇴직까지 깨끗하게 공무원으로 마감했다. 내가 장사를 하게 된 건 시부모님 두 분에 우리 애들, 거기에 조카들을 키울 수밖에 없던 안쓰러운 사연이 있었다. 우리 친정 올케가 일찍 세상 떠나고 친정엄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 집 조카들을 다 키울 수가 없어서 둘을 우리가 보살피게 되었다. 시어머니께 “어머니 조카들이 불쌍해서 어째요” 말씀드리니 어머님이 두말 않고 “데려와라” 하셔서 같이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인정 많은 양반이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머니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점잖은 분들이셨고 돌아가실 때 선산에 모시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다. 요령 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열 식구가 살려니 내가 보따리 장사라도 시작 했어야 했다. 남편 월급봉투만 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쓰던 가계부가 지금까 지 차곡차곡 쌓여 50년 묵은 가보가 되었 다.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 ■우리 부부 夫唱婦隨(부창부수)이야기 한 소절 여러 식구가 살아야 하다 보니 세 얻기도 쉽지 않았다. 셋 방 3만 원을 얻으려고 곗돈을 부었다. 전세 3만 원, 그때 남편 월급이 4500원이었다. 그때 곗돈이 500원인가? 곗돈을 타서 우리 영감님 보고 “그 돈 가져다가 방 얻어요” 하면서 계약하라고 돈을 줬다. 그런데 아 글쎄 다음날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남편이 방얻을 곗돈을 쓰리를 맞았다. 소매치기를 그때는 쓰리꾼이라고 불렀다. 내가 남편보고 “여보 계약했어요? ”했더니 남편이 말을 안하고 양복 주머니를 보여주었는데 아이고 주머니에 쭉 그어놓은 칼자국이 있잖아. 나도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어. “아이고 쓰리 맞았네” 라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던졌다. 남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 것인가. 거기에 내가 불 난데 부채질 하듯이 쏘아댄들 사라진 돈이 돌아올 것도 아니며 남편도 더 속이 상하고 나도 부아가 더 치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무심한 듯 쓰리 맞았네 하고 말았더니 우리 부부는 그날의 일을 잊었다. 전세로 살다가 우리 집을 가질 마땅한 기 회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있어야지. 할 수없이 친척들 신세를 져야 돼서 막내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때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는데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겨울 동짓달이라 캄캄하더라고. 날은 왜 그리 추운지...우리 막내가 젖 먹을 때라 젖을 물려야 하는데 젖이 퉁퉁 불었어. 날은 춥고 초행길이라 울적하긴 했지. 그런데 그때는 그런 마음도 사치야. 빨리 작은 아버지를 뵙고 집 살 돈을 빌리는 게 내 살길이었어. 동네에서 여기저기 헤매는 데 호롱불이 반짝이는 집이 보여서 찾아 들어갔지. 할아버지랑 손자로 보이는 두 이가 가마니를 짜고 있었어. 이 00동네 교장 선생님 사택 찾는다고 했더니 “이 아줌마 모시고 그 집 찾아드려라” 하시는거야. 청년이 호롱불을 들고 첩첩산중을 넘어 작은 아버지집을 찾아갔어. 그런데 세상에 가도 가도 얼마나 산이 깊은지 말도 못해 겨우겨우 산 넘고 작은집을 찾았어. 작은 아버지가 그 밤에 내가 왔으니 깜짝 놀라서 “아니 아가야 이 밤중에 웬일이냐” 그래서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지. 그랬더 니 작은 어머니보고 융통해오라고 하셔서 작은 어머니가 돈 5만 원을 빌려주셨어. 그 밤에 불쑥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있고 은인이지. 나는 빨리 갚는다고 성급히 말하기보다 곗돈 부어서 갚겠다고 1-2년 후가 될 수도 있다고 딱 부러지게 솔직히 말씀드렸어. 약속을 못 지키면 작은 아버지께 불손한 상황을 만드는 거라 확실하게 말하는 게 필요했지. 내 성격이었어. 작은 아버지가 “나 같으면 안 받아도 되는데 작은 엄니 때 문에 어쩔 수 없다” 빌려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돌아오는 길 너무 좋아서 그 칠흑 같은 밤도 두렵지 않았다. 글쎄, 여느 아낙 같으면 그 고생을 하고 젖이 퉁퉁 부은 채로 돈을 빌려 나오는 발걸음이 서글플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신났다. 힘들게 어렵사리 돈을 얻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우리 식구들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다. 젊은데 뭘 해서든 돈은 갚으면 된다. 뭐가 걱정인가. 열심히 살면 되지...너무 좋았다. 그 때는 마음이 힘든 것보다 퉁퉁 불은 젖몸살 이 더 아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밤새 막내를 돌보느라 보리쌀 뜨물에 사카린 타서 밤새 먹이셨다. 인품 좋은 어머니는 “갓난쟁이를 두고 젖 짜는데 얼마나 고생했니 시집 잘 못 와서 고생해서 어쩌니” 어머니의 그 말씀 한마디에 고단했던 발 걸음이 다 녹아내렸다. 나는 장사하고 남편이 봉급 타오면 곗돈 넣고 시골이라 나가면 채소며 고추도 주고 인심이 좋을 때라 허리띠 꽉 졸라 매면 돈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래서 가계부를 50년째 쓰고 있다. 내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빨랫줄에 널린 축 늘어진 남편 메리야스 중에 하나는 내가 입던 것이었다. 그래도 아침마다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은 먹이고 입히는 거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나를 잠시 잊기로 했다. 돈을 모을 때는 집 짓는 것 같았다. 맞지. 집 살돈 빌려온 돈이라 집 짓는 거랑 다름없었다. 고단해도 힘이 나던 때다. ■다시 청춘인 할매의 하루 영감님을 3년 전에 보내고 처음에는 적적하고 쓸쓸하데. 그래도 애들이 수시로 와서 나를 챙겨주면서 위로가 됐어. 그런데 어차피 인생이 둘이 살다 하나가 먼저 가는 건 자연의 이치라 이제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 잔씩 하면서 유유자적이네. 100세 시대라니 여든이 넘은 나는 인생의 8할을 넘게 살았다. 겨울이라고 한들 아니라고 손사래를 저을 수도 없다.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길었는데 어찌 80년은 후루룩 지나왔다. 엊그제 여중 다니던 계집아이였는데 문패에 나란히 같이 섰던 남편 이름은 먼저 가고 나만 남았다. 덧없어 보여도 지난 세월 속에서 사랑하며 행복에 젖고 슬픔에도 잠겨보았다. 수많은 희로 애락의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 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골 깊은 주름은 훈 장처럼 보이고 아직도 영민한 눈매,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 랄까. 거울 앞에선 내가 부끄럽지 않다. 햇 살에 반짝거리던 단풍잎들이 한바탕 비를 맞더니 오히려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낙엽 되기 전 절정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도 한 겨울이 아닌 만추의 한 가운데 섰다고 자부하련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 다운 때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때, 바로 지금이다.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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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진경숙 어머니 1942년~(1) 운명이 덫이 아닌 닻이 되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올거요” 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때 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 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 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 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께서 신자에서 경숙이 되기까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한 많은 세월, 이제 격랑의 파도를 헤쳐 나와 항구에 정박한 고요한 배가 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4대가 10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진경숙 어머니의 가족들. 시골에서도 흔치 않은 가족구성원인데 도심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 향기로운 가족의 대들보인 어머니의 80여년도 파란만장이라는 이름으로 굴곡진 인생사를 담을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생, 큰 따님도 손주를 본 젊은 할머니다. 4대를 이루는 동안 어머님도 80여년, 질곡의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 생이별, 이북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배 엘에스티호의 기적소리 “아가 너 함흥 이정목 살던 00집 딸 아니니” 6,25전쟁 통에 배에서 내려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나에게 천사처럼 나타난 차복남 어머니. 1950년 6,25전쟁 난리통에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배 엘에스티호에서 나는 부모님과 생이별을 했다. 내 나이 겨우 여덟 살... 부모님이 “신자야 배에 먼저 타고 있어라. 집에 가서 짐 정리하고 올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 말 한마디가 부모님이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배가 출발하는 기적소리가 울렸지만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드넓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저 소리내서 울었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지 시작했다. 아, 부모님은 아직 안 오셔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배에 타고 계실 거라 믿고 나는 엄마 아버지를 부르면서 배가 떠나가라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배 안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결국 집에 다녀온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뒷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여덟 살짜리 작은 계집아이는 울면서 며칠을 보내고 거제항에 배가 도착했다. 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를 때 아주머니 한분이 나에게 “아가 너 함흥 이정 목 살던 00집 딸 아니니”라고 나에게 아는 체를 해주셨다. 아무도 없는 남녘 땅, 거제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점잖은 아주머니는 나를 아는 분이었고 나는 그분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천군만마를 만난 것 같 았다. ■전쟁고아의 올가미에서 나를 구해준 차복남 어머니 차복남 어머니... 나의 양 어머니를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머니도 함흥분이라 우리 동네에 살던 분이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바느질을 워낙 잘하셔서 바느질 일감이 들어오면 어머니가 직접 옷감을 갖다 주러 가실 때 나는 어머니 치마 자락을 잡고 따라다니곤 했다. 그때 차복남 어머니가 나를 보시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 운명같은 이야기다. 눈이 똘망똘망하고 피부가 뽀얗던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생면부지의 남녘땅에서 나를 살려준 구원의 여인 차복남 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눈이 퉁퉁 부은 채 발만 동동 구르던 작은 계집아이였을 때다. 차복남 어머니께서 “아가 나랑 같이 가자” 하시면서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당시의 피란민들은 대부분 거제도에서 내려 목적지가 부산인 사람들이 많았다. 차복남 어머니의 친정식구들은 8,15 전에 이미 부산 영도에서 자리를 잡고 계셨고 어머니는 뒤늦게 마지막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어머니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노란 껍질을 까서 한 입에 쏙 넣었더니 달달 한 맛에 혼을 뺏긴 과일이 바로 바나나였다. 어린 나는 그 바나나 맛에 이북에 계신 부모님을 서서히 잊게 되었다. 이북에서도 궁핍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차복남 어머니의 집은 정말 전쟁고아가 될뻔한 나에게 궁궐 같은 집 그리고 구들장처럼 따뜻한 식구들이었다. 다들 온화한 분들이라 나를 친딸처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셨다. 사실 내가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다하더라도 나는 고마워해야 하는 여건 이었다.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인 데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그런 데 나를 식구로 챙겨주던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운명의 여신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내 내 가슴에 피멍처럼 남은 자국이라면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내가 그 배에서 부모님을 애타게 찾던 그 마음보다 우리부모님이 어린 딸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숯검정이 되었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터진다. 나는 차복남 어머니 댁에서 너무 사랑받으면서 성장해서 함흥의 부모님을 서서히 잊었다. 속이 다 타들어갔을 우리 부모님. 그래서 우리 인생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들 일컫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생이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차복남 어머니 집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운명은 고운 길만 걷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또 다시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며 남편을 만나게 된다. 부산 영도시네마 극장에서... (2편은 2023년 2월호에 )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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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진경숙 어머니 1942년~(2) 운명이 덫이 아닌 닻이 되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 올거요”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때 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 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 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께서 신자에서 경숙이 되기까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한 많은 세월, 이제 격랑의 파도를 헤쳐 나와 항구에 정박한 고요한 배가 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4대가 10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진경숙 어머니의 가족들. 시골에서도 흔치 않은 가족구성원인데 도심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 향기로운 가족의 대들보인 어머니의 80여년도 파란만장이라는 이름으로 굴곡진 인생사를 담을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생, 큰 따님도 손주를 본 젊은 할머니다. 4대를 이루는 동안 어머님도 80여년, 질곡의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열아 홉 살, 영도 시네마 극장에서 영화처럼 남편을 만나다 전쟁고아가 될 뻔한 내가 차복남 어머니를 만나 궁핍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또래 아가씨들보다 세상 물정을 알아차릴 경험을 두루두루 하면서 큰 애기로 성장해갔다. 큰 아버지는 현금이 많아서 여기저기 거래처에 돈을 대주고 매일 수금을 하셨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눈치도 빨라서 내가 적역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장부를 들고 거래처를 다니면서 매일 수금을 했다. 극장이 전성기였던 때라 몇 개의 극장도 거래처였는데 영도시네마 극장에 매일 들렸던 나는 수금할 때까지 시간이 남으면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곤 했다. 당신 전옥, 최무룡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영화관을 압도했는데 전옥 배우의 ‘눈내리는 밤’ 최무룡의 ‘외나무다리’ 등 그 시절 흑백영화는 열아홉 살 아가씨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그 때는 사는데 궁핍하지 않아서 목걸이며 반지 예쁜 치장도 하고 한껏 멋도 부리던 예쁜 아가씨였다. 어느 날 영화를 보는 데 뒤에서 남자가 장난을 걸었다. 누군가 돌아보다 어두운 극장안이라 화들짝 놀랐다.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젊은 호기로 살던 남편이라 믿음직한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따끈한 연애는 시작되었다. 네모난 얼음에 팥을 삶아서 넣은 아이스크림이 인기였는데 우리는 석빙고 집에서 만났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남편은 세 번 만나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노래가사처럼 열아홉 순정을 받쳤는데 떠나버린 것이다. 데리러 온다는 말을 철통같이 믿었고 남편은 그 말을 지켰다.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편지를 날마다 보냈다. 나도 그리움으로 적셔진 답장을 매일 보냈다.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어느 날 편지에 “신자야 올라와라” ■결혼, 사랑의 종착역이 아닌 고생문으 로 들어서던 길 나는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야반도주하듯이 옷 보따리를 2층에서 내 던지고 큰집에서 밤에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사랑을 찾아 그 밤에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퇴계로에 살던 남편은 친구와 함께 마중 나왔고 운명처럼 다시 만났지만 나는 고생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안이 되었다. 변변한 일을 하지 않던 남편의 집으로 갔더니 식구들이 색싯감 왔다고 쪽방에 다들 보여 있었고 온 식구가 모여서 쪽방에서 칼잠을 자는 형국이었다. 부산영도에서 편하게 살던 나는 가난이라는 올가미에 갇혀 그야말로 고생문에 들어섰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의 물결을 타던 때라 맘만 먹으면 일할거리도 많았지만 남편은 철없던 시절, 남 밑에서 순종하면서 일할 수 있는 근성이 부족해서 도로공사 아스팔트 까는 현장에 취업했지만 일을 쉽게 놓고 말았다. 그 틈에 아이도 생겼지만 먹거리조차 제대로 없던 때였다. 차복남 어머니가 알게 되시고 어느 날 오셔서 사는 꼴을 보시더니 당장가자고 내 손 을 잡아끄셨다. 어머니가 곱게 키워주셨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지는 말하면 무엇할까. 지금 6남매를 두었지만 나도 첫 아이를 잃은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때 다들 7남매 8남매씩 낳고도 한둘 잃는 일들이 다반사지만 너무 힘든 시기에 아이를 잃어버려서 가슴에 묻으려니 애간장이 끊어졌다. ■하루도 쉼 없던 날들 내 인생도 전쟁고아로 시작되었기에 호적도 바로잡아야 돼서 애를 들쳐 업고 부산까지 다니면서 신자에서 경숙으로 개명도 하고 매일을 발을 동동 구르면서 살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냈다. 우리 큰딸 윤형이가 나 따라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늦게 철든 남편 챙기랴 6남매 챙기랴 수많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려면 책 한권으로는 택도 없는 인생 여정이다. 남편은 본성이 착한 사람이라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서로 애를 태우기도 했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미군부대에서 미장일을 하고 나도 요꼬를 짜면서 생활에 보탰다. 동두천, 파주 등에 살다가 당진으로 내려와서 30년 정도 살고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 인생의 사계 중 겨울을 맞은 우리 부부, 혹한이 아닌 눈꽃 핀 겨울 당진은 서해바다가 좋은 곳이라 가족들끼리 단골배를 타고 나가 회를 떠서 먹기도 했는데 바다에서 갓 잡아 올려 회를 뜨면 말 그대로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 날도 가족들같이 나들이를 나간 날이었다. 남편이 어지럽다고 전조증상을 호소했고 우리는 바로 119를 불러서 골든타임을 놓 치지 않았다. 다행이 거동은 불편하지만 자리보존하고 눕지 않게 되었다. 내가 부축을 하면서 살살 움직일 수 있고 나는 힘들지만 우리 부부 정은 더 깊어졌다. 전쟁고아로 시작해서 열아홉 살에 철부지 같은 남편을 만나서 젊은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던가! 친구들이 남편 얼굴도 안보고 결혼하던 때 세상구경도 하면서 문리가 트이고 남편을 만나 불타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으니 나도 후회는 없다. 이제 내 인생 사계 중 겨울의 시간이지만 혹한이 아닌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솜털처럼 내려앉은 겨울이다. 살을 에는 추위가 위협하는 겨울이 아닌 눈꽃이 핀 아름다운 겨울의 한복판에 섰다. 우리 큰 딸의 손주까지 4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그 숲속에 나와 남편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가족이 그리는 겨울 풍경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그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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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식의 시간, 거친 바다를 항해하고 귀환한 승전병
    이제,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장미가 승전보를 알리며 여름날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다. 아름다운 승전병이 된 장미처럼 고결한 어르신의 귀환도 따뜻한 미담으로 남는다. 구순을 넘기셨지만 총기를 잃지 않은 어르신. 교양있는 말씨, 고운 차림새, 어머니는 아직 ‘여자’를 잃지 않으셨다. 95년을 살아내신 어머니의 인생은 연세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수많은 일들을 겪으셨지만 남는 건 ‘사랑’이라고 단언하신다. 사랑의 모체는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지만 세상사 이모양 저모양으로 사랑의 실타래가 엮여있다. 결국, 아름다운 날들이었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온통 사랑으로 채워진 유년시절 1931년 음성군 금왕에서 출생하고 무극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서울 외갓집에서 서울여상을 다녔다. 그 시절에 소읍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건 집안의 여건이 풍족했다는 방증이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읍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여상 졸업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협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나의 행보는 ‘신여성’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꽃 같은 날들이었다. 이제는 그리워하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린 그 시절이 아득하기만 하다. 2024년 94살이 되었다. 94년을 살고 있는 오늘이 나도 믿기지 않은 세월이다. 열세 살까지 동생이 없던 나는 중학교에 가서 여동생이 태어나 동생은 우리 집안에 보물이었다. 우리는 맏딸인 나 달홍, 정림, 대현, 광현, 정숙, 미숙 이렇게 6남매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13살까지 동생이 없던 것은 그 사이 동생들이 홍역으로 두 살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더더욱 동생의 탄생은 우리 집안의 경사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초등학교만 나와서 여느 집 딸들처럼 집안일을 거드는 일상이 당연하다고 보셨지만 외할아버지께서 앞으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나를 서울 외갓집으로 유학보내셨다. 나는 서울여상에 입학해 홍제동 고개를 넘어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서울여상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같이 4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읍에서 유학을 갔지만 금왕에서 포목점을 하던 집의 딸이라 생활이 궁핍하지 않아서 끈달린 검정 가죽구두를 신고 서울 친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제주, 평양, 부산, 만주 등에서 유학을 온 친구들도 많았다. 다들 그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집안의 딸들이었다. 학급은 송, 죽, 매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송반에서 공부를 했다. 세라복을 입고 주판을 놓던 ‘열다섯 살 달홍’이를 떠올려보니 너무 눈부신 날들이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방학때 고향에 내려오면 온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여주었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나를 챙겨주시던 동네 어르신들까지 온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물난리가 나서 철로가 끊겼다. 기차에서 내려서 급히 전보를 치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돌아 금왕에 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복입은 어린 나는 물난리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동네분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남의 자식이 아닌 우리 자식이라고 여겨주던 마을 분들 사랑에 감격스러웠다. 부모님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아서 그 사랑이 나에게까지 옮겨진 것이다. 유년시절 사랑받던 추억을 생각하면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인다. 우리 인생의 풍미는 단맛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여고를 졸업하고 농협에 입사를 했다. 참하고 성실한 여행원으로 인기도 제법 많았다, 그 와중에 아버님이 음성에서 농협에 다니는 청년(박승식)을 만나보시고 나의 배필감으로 적역이라고 혼사를 진행하셨다. 우리 나이 때는 결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어서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를 운명으로 만나게 되었다. 1953년, 결혼식 당일 날 남편 얼굴을 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이라 안심은 했지만 그렇게 얼굴한번 못 본 남자와 혼인을 하던 그 시대를 살았다. 남편은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 점잖고 자상한 사람이었다. 대학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운형씨 피살사건이 터지면서 시국이 어수선하여 고향에서 농협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7남매를 낳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평탄하고 고운 길만 걷던 나에게 운명이 사나운 모습으로 나타나 애꿎은 장난을 걸어왔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진천에서 테니스대회를 마치고 와서 속이 안좋다고 해서 한의원에 갔더니 대전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해주었다. 황급히 병원에 갔더니만 위암 진단이 나왔다. 지금은 암이 흔한 병이 되기도 했고 의술도 발달해서 완치 확률이 높아졌지만 50년 전만 해도 암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연상하곤 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이었다. 다행히 수술을 하고 그냥저냥 벼텼는데 수술 후 3년 만에 재발을 하고 50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생에 큰 굴곡을 만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7남매와 함께 남겨진 그날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별한 여인’ 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옥죄던 시절 유년 시절부터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고단한 인생길을 걷지 않았다. 50살이 돼서야 세상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남편과의 사별은 생살이 찢기는 그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끝 모를 슬픔과 처음으로 직면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스스로 일상의 즐거움을 차단했다. 안경도 쓰지 않았다. 예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을 거 같아 두려웠다. 40년 전의 사고방식은 ‘사별한 여인’이라는 이름을 저울에 올리면 그 삶의 무게를 측정할 수 없었다. 엄마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인내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았던 증인의 입장으로는 지금 여성들의 사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자기 결정권이 있고 혼자서도 당당한 여성들이 보기 좋다. 내가 동년배에 비해서 배움이 넓고 깊었지만 세상 속에서 여성의 한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0살이 가까워오니, 결국 사랑이다 지금은 막내아들 집에서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늘 마음의 저울에서 그 무게가 다르지 않다. 아직도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 90이 넘은 지금 아직도 나는 현역이다. 오래전 우리 땅이 터미널 부지가 되면서 음성버스 터미날 운영권을 갖고 있어서 전표 관리를 아직 내가 하고 있다. 서울여상에서 공부했던 저력을 지금까지도 발휘하고 있다. 성업 할 때는 대성여객, 서울버스, 신선버스, 경일여객 등 9개 회사를 관리했고 무표가 들어오면 암산으로 계산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를 지탱해주는 원천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사랑이라고 즉답할 수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을 우리 아이들한테 돌려주었고 이웃들과도 나누었다. 나이 들어 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까닭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정 덕분이었다. 40살부터 여성단체 활동을 하면서 내내 봉사활동을 해왔다. 대한어머니회 음성지회장, 육영회회장, 평통위원, 여성단체협의회 음성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면서 봉사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봉사활동때는 늘 호박죽을 직접 끓여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 봉사자들과 푸짐하게 나눠먹곤 했던 추억이 인생 말년의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부모님이 유년 시절 나에게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라 특별한 명분 없이도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 “나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가”라고 했던 말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씩만 실천한다면 세상이 강퍅해졌다는 아쉬운 소리가 줄어들 것 같다. 백살이 가까워오니 가족이나 이웃들이 작은 마음 하나씩만 나눠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결국, 사랑밖에 남는 게 없다. 이제 더 이상 드넓은 바다로 항해를 떠날 일은 없겠지만 잠잠해진 바다 위로 유유자적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를 보는 것과 같은 그 안식의 시간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호사다. 오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거친 바다와 싸우고 귀환한 승전병의 미소를 띄고 있다. 지나온 나의 인생이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을 건넨다면 여한이 없다는 말로 화답하고 싶다.
    • 오피니언
    • 자서전
    2024-06-10
  •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내 인생 마지막 해외 여행지는 대만이 되었다. 2023년 10월에 대만 타이루거 협곡에 무사히 다녀오면서 해외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더 이상 장시간 비행기에 앉아 물맛, 입맛 다른 곳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컨디션과 체력이 아니다. ‘걸을수 있을 때 여행을 다녀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거 같다. 50보만 걸어도 숨이 차는 그 시절을 나도 만나고 말았다. 돌아보면 인생은 이미 끝이 결정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은 우리가 산을 보면서 숲만 바라보는 자세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잘 성장해야 숲이 튼튼하고 보기도 좋은 것은 거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85년도 귀하지만 하루하루가 더 거룩한 시간이다. 대자연 앞에서 작은 나의 존재를 발견하다. 꿈에 그리던 그랜드케니언은 다음 생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창 일할 나이에는 자식 키우고 살림 일구느라 꿈에만 그리던 곳들, 은퇴하고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다음에 다음에 하다보니 정작 때가 왔을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갈 수가 없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번역 글이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울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해학적인 묘비명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만 협곡은 거두절미, 심산유곡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곳이다. 깊은 산은 그윽한 물을 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좁디좁은 대리석 협곡이 자로 잰 듯이 서 있었다. 수만 년에 걸쳐 물과 바람의 힘만으로 이토록 가파르고 좁은 협곡이 탄생했다. 그 시간의 폭과 길이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시간이다. 경이로운 협곡 앞에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은 바닥으로 내려가 봐야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요동치지 않는 자연 앞에 서봐야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교만한 태도를 반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가 말하는 수많은 진리 중에 ‘세상은 공짜가 없다’와 ‘자연은 위대하다’라는 말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인생의 만남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살다가 딸아이 육아를 돕느라 대전에 내려왔다. 대전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딸, 세종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사위. 맞벌이 부부의 고단함을 방관할 수만은 없어서 나이 든 우리가 보탬이 되려나 하는 마음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전에 내려왔다. 세종과 대전을 놓고 정주지를 선택하느라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10여 년 전 근교 벚꽃길을 지나며 아내는 대전으로 정주지를 정했다. 누군가 마지막 여생을 보낼 터전을 고르는데 성의가 없다고 훈수 둘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우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사숙고가 반드시 인생 전반에 통용되는 이치는 아니다. ‘운명’이라는 정해진 액자 안에서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의 처음 만남 또한 우연처럼 다가왔다. 나는 수원 사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남산을 오르내리는 게 썩 좋은 락이었는데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무더운 여름날 레이스가 살랑거리는 분홍색 양산을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처음 보았고 얼굴이 궁금해 잰걸음으로 그녀 앞을 앞질러 걸었다. 힐끗 쳐다보니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영리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후로 그녀와 남산 산책길에 말없이 눈인사를 여러 번 했다. 아내는 나팔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머리는 고슬고슬 말아 올려 제법 멋쟁이였다. 용기 내서 말을 걸고 아내도 내가 싫지 않았든지 거절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오다가다 만났어요”라고 한다. 상대방은 웃어넘기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정식으로 매파가 중신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조금 벗어나면 우리는 다들 ‘오다가다’ 만나는 것이다. 우리 인생 자체가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와 필연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와 남자라는 이름으로 ‘차별’하던 혹독한 시절 결혼할 당시 내 나이 29살, 아내 나이 23살이었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아내에게 결혼 프러포즈 선물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주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근 40년을 독서 한 번 제대로 못 하게 만들었다. 외손주들 봐주느라 세종에 내려와서 살면서 그나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평화로운지 아내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결혼하고 열세 식구를 건사했던 아내. 명동 한복판에서 한눈에 눈에 띄던 그 곱던 아내가 이제 열 손가락 모두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50년의 세월 속에서 아내의 몸은 부서졌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전달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위로의 말이 없어 내가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시집오자마자 시할머니 병시중을 시작으로 시누들이 다 시집보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공무원인 나도 박봉에 근근이 살아가다 보니 뾰족한 수가 없어서 때론 삶이 너무 피폐하기도 했다. 아이들 4남매가 착하고 반듯해서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 되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그리운 추억으로 남지만 당시를 지날 때는 인생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결국 승전고를 울렸으니 지금 여기에 와 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필시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표시도 나지 않지만 또 다음날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인생이라고 말하면 좀 서글프려나? 인생의 말미에 ‘대전’ 이라는 친구가 가르쳐준 이치 75년을 수원과 서울에서 살다가 대전에 내려와서 그것도 외손주 육아를 돕는 생활을 했으니 아내나 나나 답답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녀들 크는 재미에 힘든 것도 모른 채 오늘까지 왔다. 이제 우리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10살, 12살 귀염둥이들. 결국 우리 부부가 살면서 이룬 열매들이 몇 개 있다면 그중 으뜸은 손녀들의 성장이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데 온 마을이 힘을 보탠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지만 온 마을은 아니어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10년의 세월도 보탬이 되었다. 자랑이나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이치라고 할까. 우리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10년 전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을 때 만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서울내기 귀촌자가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벗으로 지내면서 적적함도 달래고 일상의 희로애락도 같이 나눴는데 건강하던 그이가 2년 전에 먼저 떠나면서 상실감이 아주 컸다. 매일 등산을 다니던 이가 대장암으로 2년간 투병하고 결국 뼈만 남은 몸을 나에게 보이고 숨을 거두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마음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의지할 친구가 먼저 떠났다는 슬픔도 컸지만 ‘아 이렇게 누구나 죽는구나’라는 상실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먼저 저승의 강으로 건너가는 일들을 겪었지만, 벗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치유하는 데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일상을 공유했던 존재가 사라지는 상실감이 생각보다 컸다. 그렇다면 아내가 먼저 떠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면서 전율이 왔다.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설렜던 마음이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사그라들고 전우라고 부르고 싶다. 전쟁터에서 같이 살아남은 전우, 공무원 박봉으로 열 식구가 넘는 가족을 건사하고 가내수공업 부업거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 나는 촌놈이 출세 한 번 해보겠다고 승진에만 몰두하고 가정은 아내에게 턱 하니 맡겨놓고 남의 집 일처럼 방관했었다. 야속할 텐데도 무심히 나를 인정해 주고 ‘내 꼴을 봐주던’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면? 아마도 팔 한쪽을 잃어버린 상실감보다 더 큰 상실감이 밀려와서 내 삶의 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분명하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반면교사 했던 이치는 바로 ‘있을 때 잘해’라는 세대를 넘나드는 한 줄의 명문이다. 일상을 공유했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얻은 섭리와 이치가 대전에서 얻은 큰 가르침이다. 손녀들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가 내려놓았던 많은 것들이 어린 새싹들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또 한 세대가 가고 다시 한 세대가 오는 자연의 섭리에 우리 부부가 일조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여정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비록 몸은 쇠락해도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서글프지 않다. 이제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눈앞에 파리가 왔다 갔다 하는 비문증이 심해져서 신문도 책도 읽기 어려운 때를 맞이했다. 그저 아내가 끓여주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계절이 지나는 길목을 목격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 내년에도 우리 동네 벚꽃을 볼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자연과 친구가 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지금의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다. 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4계절을 모두 즐겨본 세대라는 것도 우리가 받은 축복이다. 지금 나의 몸은 겨울이지만 마음은 봄이다.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을 보내는 지금이 나의 가장 따뜻한 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범부(凡夫)의 욕심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오피니언
    • 자서전
    2024-05-01
  • 미수(米壽),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다
    미수연(米壽宴)을 마친 어르신이 촌철살인 한마디 건네주신다. ‘회한은 깊지만 나이든 지금이 오히려 삶의 큰 기쁨이 있지.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으니 새털처럼 가벼워’ ■ 비상을 꿈꾸던 小邑(소읍)의 청년 우리 고향은 복숭아 과수원이 유난히 탐스러웠던 곳이다. 봄에는 복숭아 꽃잎이 흐드러져 탄성을 자아냈는데 대문밖만 나가면 지천에 피어있는 복숭아 꽃 귀한 줄은 몰랐다. 곁에 있는 존재의 가치를 귀히 다루는 법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자연의 섭리인 양 고향마을도 그러했고 우리 식구에게도 늘 곁에만 있을 줄 알고 데면데면 했던 나를 반성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면에서 잠시 일을 하다 경기도 포천으로 군대에 다녀왔다. 태어나서 가장 멀리 가본 곳이 포천이었다. 촌사람이라는 말이다. 8남매가 코딱지 만한 과수원 땅으로 먹고살려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서 나는 일찌감치 객지로 나가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우선 고향을 떠나 외가가 있는 괴산으로 갔다. 비등비등한 소읍으로 터전을 옮겼더니 별반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가진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젊은 나에게 돈 벌 꺼리가 주어질리 만무했다. ■ 영사기 돌리는 면서기로 면에서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끼니 걱정은 안하게되어 면장님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영사기를 들고 이마을 저마을 다니면서 영사기를 돌렸다. 당시만 해도 시골마을은 문화혜택을 받기 어려워서 영화를 보는 일이 시골사람들에게는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1년 예산을 지원해주고 우리는 필름을 사서 마을을 다니면서 영화를 틀어주었다. 마을 운동장이나 노인정, 면장 집 앞마당에서 영화를 보여준다. 근방 1키로 거리에서는 다들 모여서 영화를 봤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앉아서 노천영화를 보고 처녀총각이 모여서 서로 눈이 맞기도 했다. 그때 인기좋던 영화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였다. 신영균, 김지미, 김희갑 등이 유명배우였다. 김지미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은 여배우였다. 영화가 돌아가면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김지미는 시골 사람들에게 꿈속에서나 만날 여인이었다. 내 눈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이 아름다웠다. 끼이끽 거리며 돌아가는 영사기 앞에서 웃고 울던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나도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나에게도 지금의 날이 올 것이라는 짐작도 못했던 지난 청춘의 시간이 있었다. ■ 다시 고향으로, 가족의 우환을 온몸으로 받아낸 아내 영사기를 돌리며 사람들이 울고 웃는 희비가 엇갈리는 그속에서 나의 사명이 있을까 했지만 나는 면서기로 정체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괴산에서 결혼을 하고 4남매를 낳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형님들과 포도 농사를 지었고 농사꾼으로 살아볼 요량이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고 땀 흘린 대가를 반드시 돌려준다. 과수 농사만 해서 언제 돈이 될까 싶어 한눈을 판다는 생각이 아닌, 돈 벌어볼 구상으로 다른 작물도 손을 대었다. 묘목장사 누에농사 안해본 것이 없었다. 돈이 될만한 것들은 손을 다 대어 보았지만 한 우물을 팔지 않아서인지 돈은 벌리지 않았고 안사람 고생만 주야장천 시켰다. 고향으로 돌아와 편찮으신 아버님 병수발을 아내가 12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요양시설이 부재해서 아내는 4남매 뒷바라지 하며 시아버지 병수발까지 매일 몸이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맏며느리라는 올가미가 아내를 옥죄고 아내는 시아버지의 병수발 아니 변수발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저러다 안사람이 먼저 죽는 거 아닌가 싶을 즈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90세에 돌아가셨다. 다들 호상이라며 위로했지만 아내의 12년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나는 아버님 돌아가신 자리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애통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눈물 없이 상여 뒤를 따랐던 까닭은 아들 노릇 할 만큼 했다기보다 아내의 진땀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줄곧 1등하던 아들 녀석 서울대학교 들어가더니 데모하느라 늘상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경찰한테 쫓겨다니며 집에는 형사들이 대문밖에서 진을 치고 우리 안식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아들은 한때 정치의 꿈도 가졌지만 밀어줄 형편도 안되고 그 길이 고난의 행군인 것을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라 스스로 포기하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정착했다. 녀석의 안타까움은 애비인 나도 짐작할수 없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꿈만 쫓기에는 둘러봐야 할 주변이 많다. 복숭아 농사로 몫돈 좀 만지는가 싶었을 때 평범한 사람의 삶을 평가절하했던 나는 큰돈 벌어보겠다고 여기저기 사업에 손을 댔는데 허상만 쫓다가 후회만 남았다. 우리는 사고만 치고 뒤치다꺼리는 아내의 몫이었다. 아내는 가슴 졸이고 위장병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10년 전에 파킨슨이 와서 서서히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왼쪽 편마디가 오더니 손을 못 쓰고 내가 밥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어야 했다. 그것도 하루이틀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아내를 요양병원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 병수발 들던 아내를 병원으로 보내는 날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도 위암 수술을 받고 난 후라 아내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평생 아들, 시아버지, 남편 뒤치다꺼리 하다가 본인 병구완은 가족에게 맡길 수 없던 아내에게 미안하고 속상해서 나는 바로 죄인이 되었다. 인생이 끝없이 허무하고 재작년에 아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화장장에서 한 줌 재로 나에게 안겨진 아내를 보자 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아내를 보내고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보니 나의 거동이 자녀들의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자녀들에게 신세 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옥죄면서 일상이 오히려 더 피폐해졌다. 다시 혼자만의 일상에도 적응하고 어려울 때는 자녀들에게도 기대면서 살아보니 삶의 수레바퀴가 오히려 잘 굴러갔다. 불편한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니 노년의 나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큰돈도 벌어보고 싶고 남들처럼 폼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부도, 명예도 운명에 있어야 하는 법. 凡夫(범부)로 살면서 안위해야 했는데 헛된 욕심 꿈꾸느라 마음만 상했던 젊은 날의 그림자가 있다. 이제 노욕이 없는 지금이 그저 평안하다. 이제 몸을 세월에 맡긴다. 그저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고 나를 데려가는대로 따를 것이다. 순리에 따르는 삶이 이토록 가볍고 행복한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이제 다산 정약용이 썼던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이 마음에 딱 와닿는 그때를 만났다. 비록 손에 쥔 것은 없으나 자연의 섭리대로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억나는 문구를 떠올려보면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머리를 예찬하고,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하고, 귀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한다라고 했다. 노쇠한 신체를 해학으로 받아들이는 시를 읽으며, 꼭 유쾌하고 기쁜 일이 있어야만 즐거운 것은 아님을 생각해본다. 지금의 나도 비록 거동은 불편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의 밤을 보내는 노인이지만 이제 노욕 없이 나이든 나를 인정하는 일상의 고요를 맞이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언제든 먼저 간 마나님을 만나러 가도 아쉬울 것이 없는 ‘지금’이 가장 기쁠 때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 유쾌하게 한마디 던질 것이다. “나는 인생의 숙제를 다 끝내고 양어깨의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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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 故)용정순(1938~2018) 인생이 설니홍조(雪泥鴻爪)라 하지만 그리움은 남다
    어머니의 기일은 8월 1일이다. 2018년 8월 1일,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폭염이던 날씨 에 어머니는 새벽잠을 곤히 주무시다 꿈꾸듯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고운 어머니는 천생 여자로 살아오셨다. 일곱 살에 해방을 맞고 이후 격동의 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에 항상 서 계셨던 분이다. 물론 기억 되지 않았지만...선화동에서 오랜 시간 살아 오셨고 인생의 말미에 25년간 대덕구에서 살다가신 분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라 어머니에게 그리움으로 남은 곳이다. ■그리움이 화석이 된 이름들 1963년 삼천포(지금의 사천)제일 사진관에 예쁜 자매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걸렸다. 스물네 살 때였다. 시집갈 날을 받고 동생 계순이와 견 포플린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한껏 멋을 냈지만 표정은 얼음처럼 굳었다. 고데기로 말아 올린 머리에 뺨이 발그레했던 정순이와 계순이는 눈이 부시게 예뻤던 경상도 가시나들이었다. 그 이후로 60년 동안 계순이와 단둘이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경상남도 고성 한적한 바닷가가 고향인 나는 조반석수 넉넉히 하는 집의 딸로 어려움 없이 유년을 보냈다.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1961년 스물네 살에 결혼했다. 남편도 무뚝뚝한 경상도 충무(통영) 사람이었는데 현직에서 한창 바쁠 때라 나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결혼 후 1970년대 군 보안 관련 일을 담당하던 남편 따라서 울살이가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남북이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던 시기여서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금촌에서도 2년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했다. ■분단의 시대가 낳은 부산물, 정체 모를 배신감 1975년경 금촌이라는 작은 소읍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서울에 나가려고 국민학교에 다니던 딸아이와 금촌역에 도착했다. 역 앞 느티나무 앞에서 대여 섯 명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귀동냥으 로 들었더니 읍사무소 앞 도장집 황 사장이 20년간 고정간첩이었다고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워낙 점잖은 양반이라 충격이 컸다. 그렇게 선한 얼굴로 간첩이었다니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일요일이라 시골 사는 나의 유일한 낙(樂)이었던 서울 나들이 길에 그 사건을 접하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열차는 문산 파주 금촌을 지나 일산 백마를 거쳐 수색 가좌까지 가는 완행열차였다. 추석 전 창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노랗게 익은 벼 이삭이 도도하게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오가는 길이 하루 종일 걸리는 서울 나들이였지만 한 달에 두 번 주어지는 금쪽같은 낭만이었다. 1976년 큰 딸이 4학년 때 더 이상 금촌에 살고 싶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침 뉴스를 보면서 몸서리가 쳐졌다. 바로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이었다. 판문점 접경 지역에 사는 불안감은 극에 달았다. 결국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타자의 시선, 요꼬 공장 불빛 아래 그녀들은 치열했다 1970년대 후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요꼬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몇 달이었지만 내 인생 중 가장 공격적인 시간이었다. 큰 오빠는 일류대 출신이었지만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인이 원하는 직장에 다닐 수가 없었다. 시류에 편승한 출세를 포기하고 스웨터 가내 수공업인 요꼬 공장을 차렸다. 요꼬는 니트 편물 기계인데 1980년대 전성기를 맞았으며 쇄도하는 물량 탓에 어려서부터 자수 놓는 솜씨가 좋았 던 나도 소일 삼아 오빠의 공장에서 일을 도왔다. 월급이란 걸 처음 받아보고 감격스러워 한 달 내내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만 타쓰던 나에게 근로의 힘으로 받은 월급이 주는 만족감은 엄청났다. 하지만 나는 남편의 그늘이 너무 편안해서 짧은 경험담으로 남겨졌다. 나는 생계수단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일하지 못하고 추억으로 기억되어 아쉬움은 오래갔다. 작은 공장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여인네들이 바늘에 손가락을 수없이 찔려가며 잠을 쫓고 가정을 지켰다. 그리고 형제들을 키워나갔다. 불빛은 어두웠지만 그녀들의 희생만큼 세상은 밝아졌다. ■우리 부부 ‘헌체(獻體:유체 기증)’를 실천하며 대전 현충원에 보금자리를 틀다 서울살이를 마치고 5.18광주 민주 항쟁이 있던 그 해 4월 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내성적인 나는 터전을 옮기고 적응해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마침 그해 5.18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터전을 옮기며 내적 갈등이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 도청 뒷동네였던 선화동에서 오랜 기간 살고 나이 들어 대청댐과 계족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선비마을로 와서 인생의 말미를 보냈다. 아침마다 계족산을 오르내리며 청량감을 맛보며 대덕구에서 할머니가 되었다. 주말이면 대청댐을 한 바퀴 돌면서 또 자연과 호흡하는 기쁨이 주어졌다. 도심지 선화동에서 맛볼 수 없던 또 하나의 낙이었다. 나는 내 또래의 여느 여인만큼 파란만장 한 질곡의 인생사를 살아오진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마음 놓고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동력을 집안에서 만들었다. 물론 외로웠다. 격변의 시기를 살던 가족들은 자기 방식의 삶이 필요했고 나도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76살에 치매를 만났다. 바깥 활동 없이 집에서 책만 읽던 내게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갑장의 친구들은 농사짓고 층층시하 시부모를 모시며 술주정하는 남편을 참아내던 때다. 그녀들이 나를 호강하는 여자라고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어느 만큼은 공평하다고 했나. 그녀들은 고단하지만 때때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북적거리는 삶을 살았고 나는 ‘평안한 고독’을 선택했다. 2010년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만의 성에 나를 가두면서 서서히 치매와 만났다. 말이 좋아 ‘예쁜 치매’라고 위로하지만 땅거미가 질때면 무인도에 혼자 남아 있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것도 밧줄에 묶인 채로 말이다. 석양을 바라보면서 황홀하다고 감탄 하던 내가, 사라지는 그 석양이듯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80년간의 이야기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나도 남편이 잠들어 있는 대전 현충원으로 돌아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생전에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고 불만이었지만 남편은 나를 험한 세상에서 모진 풍파와 싸우지 않게 해준 큰 울타리였다. 소나무 숲속 한가운 데 햇살이 부서지는 그 한 평짜리 집에 우리 아이들이 간간이 찾아와주면 우리 부부 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우리가 살다간 흔적은 현충원 묘역이 기억해 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지역 의대에 헌체(獻體:유체 기증)를 서약했다. 설니홍조(雪泥鴻爪 : 기러기가 눈밭에 남기는 선명한 발자국), 소동파 시의 한 구절 이다. 그러나 그 자취는 눈이 녹으면 없어 지고 만다. 인생의 흔적도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작은 발자취들을 누군가 기억해 준다면 그리 헛헛하지 않을 것이다. 고달픈 삶의 흔적과 상처만이 참 인생이라 논할 수는 없다. 나처럼 몸으로 부딪치는 고달픈 상흔이 없어도 인생은 내내 갈등과 혼돈 속에서 연명돼 왔다. 그래서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당신 삶은 덧없지 않았소. 잘 살아왔구려’라고. 김경희 (부모님 자서전 전문 '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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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1938년 용호동 정호택님 굽은 나무는 목수의 눈 밖에 났지만 내내 숲을 지킨다
    ■ 육지 속의 섬마을 소년 어린 시절에는 문의면 수몰지구 동네에 살았다. 보리농사 조금 지어먹으면서 근근이 끼니를 연명하고 있던 집안의 8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도 글을 좀 아는 분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중용이며 한학 공부를 즐겨 했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던 아이다. 우리 고향은 백사장이 너무 고와서 가끔씩 눈을 감고 80년 전을 떠올리면 길다란 백사장 길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 진다. 물론 그 그림 속에는 나도 있고 친구 종수 영춘이 대식이도 있다. 지금은 다들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 나만 덩그러니 서있는 외로운 그림이다. 다들 가난하게 살아서 우리 우물안 개구리들은 그렇게 사는 것인 줄만 알았다. ■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세상에 눈을 뜨 게 해주신 작은 아버지 유년의 나는 작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시골에 두기에는 아까운 아이였다. 청주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께 “형님 호택이는 제가 데리고 가서 공부 시키겠습니다” 얼마 나 반가운 소리인지 시골에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열두 살, 나는 새로운 세상에 나간다는 마음에 청주로 떠나기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새벽녘 한숨 소리에 툇마루에 나가보니 어머니께서 휘영청 뜬 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계셨다. “어머니 뭐 하세요?” “너는 좋냐? ”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는 그 속 깊은 심정을 다 알 수 없었지만 당신 자식을 시동생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궁색한 형편에 가슴이 찢어지신 것이다. 어머니 마음까지 들여다보기엔 어렸고 다음날 아침 떠나오는 길 어머니가 손 한번 잡아보자며 내 손을 꽉 잡으셨다. 아...생각해보니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밭일이며 집안일, 할아버지 병수발까지 물기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의 손은 여자 손이 아니었다. 거친 나무껍질 같던 어머니의 손을 지금도 기억한다. ■ 우물 밖으로 나왔지만 세상은 호락호 락 하지 않았다 청주로 나가 작은 아버지 집에 거주하면서 청주 중고등을 거쳐 충북대학교를 다녔다. 작은 어머니께서 고생이 많으셨다. 작은 아버지의 쥐꼬리만한 교사 월급으로 6남매에 나까지 덤으로 졸지에 7남매를 키우게 되셨다. 시골집에서 간간이 쌀가마니가 왔지만 작은 집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됐을지는 나도 모른다. 한창 먹을 나이였지만 밥상에서 눈치 보면서 밥을 먹고 나로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6명의 사촌들과 모두 잘 지 낼 수 없어 간간이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타협하는 방법도 배워나갔다. 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부모님 일손도 돕고 친구들과 백사장에서 회포를 풀기도 했다. 친구들은 섬마을에서 다시 부모의 농사 일을 물려받고 그렇게 작은 마을을 지키는 이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 눈에는 내가 대단해 보였지만 나도 결국 눈칫밥 먹으면서 공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갖고 시골을 떠나있던 그저 그런 사내였다. 영어 교사가 되어 동료 교사인 아내와 만나게 됐다. 그 시절에 연애라는 것을 했다. 아내는 인사성이 아주 바르고 야무진 후배 교사였다. 마음에 들었지만 바로 호감을 표시하기에는 내가 짊어진 짐이 많았다. 동생들 그리고 부모님, 아내는 양조장하던 집의 막내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책상 위에 쪽지를 두고 갔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아내는 대단했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갔고 내가 먼저 프로포즈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내 형편이 당신한테 관심을 표명하기에 너무 부족하다고. 적나라한 나의 여건을 모두 털어 놓고 아내의 처분만 기다렸다. 아내는 이미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마운 사람. 고향 집에 인사드리러 가던 날 작은 배를 타고 마을을 들어가면서 아내는 한숨을 쉬었지만 우리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고생 많은 어머니를 알아차린 아내가 너무 감사했다. 50호 정도 시골 마을에 호택이 결혼할 여자가 온다니 동네가 난리가 났다. 더군다나 청주에서 선생님하는 여자라니 장가 잘가게 됐다고 아내를 구경 온 동네 사람들로 우리 집 싸리 대문 앞이 북적거렸다. 싫은 내색 안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는 내 유년 시절을 눈으로 보고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덜커덩 거리는 버스 안에서 손을 꼭 잡았다. 우리 결혼의 걸림돌은 처갓집이었다. 시골 태생에 농사나 겨우 짓고 근근이 먹고 사는 8남매의 장남한테 시집보내려니 양조장집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당연하다. 아내는 금지옥엽 같은 딸이었다. 병원 집 며느리로 시집 보내렸는데 학교에서 연애를 걸어 박봉의 동료 교사를 인사 시키러 데려 왔으니 장모님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한테 눈길 한번 안 주시는 장모님이 서운 했지만 장인어른이 내 품성이 좋아 보인다고 모주를 건네주셨다. 시골에서 많이 먹던 모주, 막걸리 찌끼미에 한약재를 타서 아버님이 해장술로 드시던 술이다. 장인어른과 나눈 모주 한잔에 그날의 서운함이 사라졌다.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결혼이었지만 장인어른의 배려로 우리는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우리도 4남매를 낳고 부부 교사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시골에 남은 동생들도 배움은 많지 않지만 농사일이며 목수일로 다들 밥벌이를 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다들 무탈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방학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며칠씩 있다 오곤 했다. 우리 아이들도 착해서 아이들은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수제비와 만두가 너무 맛있다”며 불편한 시골집에 가는 걸 꺼려하지 않았다. 특히 우리 막내딸은 할머니가 너무 좋다며 늘 땀에 젖어 쿰쿰한 냄새 나는 어머니 품에서 “할머니 냄새 좋다”고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 천성이 착한 아이였다. ■ 고1 꽃다운 나이에 천사가 되어 날아간 우리 막내딸 우리 막내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아침 밥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잠들어 있나 싶어 딸 방으로 가보았더니 우리 아이가 핏기 없이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누워있었다.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을 열자마자 연탄가스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 딸은 그 밤에 연탄가스를 맡고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버리고 말았다. 오빠들은 셋이 방을 같이 쓰고 고명딸이라 혼자 방을 쓰게 했었다. 아내의 절규,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통곡은 피가 말라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막내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일상으로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딸을 보내고 그 이듬해 간암으로 복수가 차올라 숨을 쉬기도 어려웠던 어머니의 상여를 매고 선산에 올라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날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아내는 딸을 보내고 너무 힘든 나머지 결국 학교를 퇴직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울증으로 힘들던 아내는 결국 치매라는 불청객과 만나게 되었다. 아내의 치매는 나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너무 힘들었다. 부잣집 딸이었던 아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장밋빛 인생이었을 텐데 나를 만나고 통스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멈추면 나 또한 견뎌내기 힘들었다. ■ 굽은 나무 지금은 우리 부부 고향 마을 근처로 돌아와 작고 예쁜 집을 짓고 나는 아내를 돌보며 지내고 있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손주를 데리고 찾아와 아내를 기쁘게 하지만 아내는 사실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저 자주 보는 아이들이라 아내도 덩달아 기뻐하지만 아내의 기억은 이미 소실되었다. 나만 알아보는 아내, 둘째 며느리가 우리 딸을 많이 닮아서인지 영주야 영주야 부르며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나는 정신을 놓을 수 없다. 나도 하루 하루 기력이 쇠하지만 지금 소원은 아내와 같이 손잡고 같은 날 먼 여행을 떠나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축복은 나에게 찾아 올까? 아내보다 하루 더 늦게 여행 떠나는 소원만 남아 있다. 결국 시골을 떠나 큰 세상에 나가 꿈도 펼치고 싶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시골 마을의 이름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픈 아내를 보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아내와 산보하고 며느리들이 냉장고 칸칸이 쌓아놓은 반찬들을 내 손으로 꺼내서 아내와 겸상을 하는 이 하루하루가 이토록 귀한 줄 이제 알게 되었다. 울창한 숲의 우뚝 선 나무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그 숲을 지키는 굽은 나무가 되어보니 목수의 도끼질도 두렵지 않고 바람냄새 풀냄새 흙냄새까지 향기롭다. 김경희 부모님자서전전문‘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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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이순자 어머니 1936년~ 지는 석양보다 붉은 노을이 좋아
    누구나 꽃 같은 시절이 있다. 어머니댁 낮은 담장 밑으로 키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낮달맞이 꽃, 소담스러운 맨드라미, 과꽃, 이름도 어여쁘고 자태도 얌전하다. 어머니를 닮았다. ■ 거짓말, 저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살이에요” 시집가서 이웃 형님들이 몇살이냐 물으면 열아홉 살이라고 거짓말을 줄곧 했다. 열다섯 살에 시집왔다고 말하기가 너무 창피했다. 입하나 덜겠다고 오라버니가 보낸 시집이라 더군다나 키 작은 내가 열다섯 살 때는 언뜻 보면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런데 시집을 간다니 더군다나 신랑은 덩치가 산만했다. 초례상에서 나는 창피하기만 해서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첫날밤부터 신랑이 옆에만 오면 엉엉 울어대느라 새신랑도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첫날밤도 결혼하고 여섯 밤을 지난 후에 치렀다. 남편이 점잖은 양반이라 나를 아기처럼 생각하고 존중해주었다. 군대 생활 중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하게 되어 휴가 마지막 날 나는 남편의 여자가 되었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데면데면하다가 남편이 군대로 복귀하는 날 어찌나 서운한지 마을 어귀까지 쫓아 가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을 보내는 마음이 아니라 내 울타리가 되어 줄 큰 오라버니가 떠나는 마음이었다. 경기도 연천으로 군복무를 하러 간 남편을 보내고 나는 시집에 홀로 남았다. ■ 아 가여워라, 가련한 생태계에 갇힌 여자들 이제는 헛웃음만 나오는 시집살이 또 시집살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얄밉다고 했나. 고추보다 더 매운 건 시누이 시집살이였다. 남편은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 여동생이 둘 이었다. 같은 여자인데 어쩌면 그리도 매정한지... 내 등에 누에를 넣는 건 예삿일이고 얼음 깨고 빨래해서 널어놓으면 숯검댕이를 마른 옷에 묻혀놓기가 다반사였다. 장난을 넘어선 패악질이었다. 옆 동네로 시집간 시누이는 본인도 시집살이를 하면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였다. 본인의 억울함을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우리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고, 다시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는 가련한 생태계에 갇혀서 여자들은 살아왔다. 밭농사와 잠실을 하던 시댁이라 일거리가 너무 많았다. 잠자고 있으면 등 뒤에서 뭔가 꼬물꼬물 엉겨 붙는 느낌이 든다. 누에가 기어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까무라치게 놀랐지만 나중에는 귀여운 녀석을 손에 살며시 잡고 놓아주었다. 시댁의 삶에 익숙해져가는 내 모습이 어느 날 은 가엽기도 했다. ■ 고단한 삶속에 한줄기 빛, 다정 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하루 종일 새벽부터 집안 살림에 막내 시누 업고 우물물 길어오고 밭농사에 누에까지.. 작은 몸으로 무쇠처럼 일만 했다. 삶이 뭔지 인생이 뭔지 한순간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 삶에 유일한 희망은 시할머니였다. 시할머니도 나와 같은 고단한 시절을 분명히 보냈던 분인데 나를 예뻐하시고 귀하게 대접해주셨다. 항상 ‘우리 예쁜 아가야’라고 불러주셨다. 밥상에서 김치 한 젓가락이라도 꼭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셨다. 그게 할머니의 마음이었다. 시할머니가 저승으로 떠나시던 날, 새벽 4시면 일어 나시던 할머니가 기척이 없어서 방에 들어가 보니 주무시면서 이승을 떠나셨다. 유일한 나의 안식처이던 할머니 상여 뒤를 따르면서 피를 토하듯이 울었다. 다시 남편이 제대를 하고 나의 희망이 되었다. 듬직한 사람이라 식구들 몰래몰래 나를 안아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고단하고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던 건 남편이 꼭 잡아준 그 손이 었다. 내가 그렇게 힘을 얻어서 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꼭 존댓말을 하고 손을 꼭 잡아 준다. 스무 살 나를 붙잡아준 그 힘을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다. 6남매를 낳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여느 여자들과 비슷한 인생길을 걸었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지만 듬직한 남편 만나서 마음만은 호강했다. 남편은 농사를 나에게 맡기고 청주로 나가 인쇄업을 했다. 나는 시골에 남고 남편만 청주로 나가서 먼저 자리를 잡았다. 요즘 여자들이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주말 부부 아니 월말 부부를 나는 50년 전부터 했다고 며느리들에게 웃으면서 얘기하곤 한다. 없이 살아도 정이 좋아야 한다. 여자들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하나면 고단한 일상을 다 잊을 수 있다. 어디 여자뿐일까, 남자도 마찬가지다. ■ 인생에 정답은 없다 우리들은 80년 세월 속에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들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아껴주는 마음만 있다면 뭐든 헤쳐 나갈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아무리 다정해도 우리 6남매 중 서울대 나오고 가장 넉넉한 아들이 이혼을 했다. 처음에는 청천벽력 같아서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아들도 큰 사업하면서 사회활동 하느라 집안건사 안하고 오히려 며느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며느리도 사람인지라 20년 동안 외로웠고 남은 시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는 둘의 의견을 존중했고 지금은 서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어서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다. 숙제를 잘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인생과 타협하는 방법이다. 나이 드니 몸은 기력이 없어졌지만 길이 보인다. 간간이 30여년 써온 일기장을 넘겨보면 그 안에 이미 길이 나 있었다. 눈이 침침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 기쁨이 있다. 나이를 먹어야 볼 수 있는 그것! 그래서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 여생은 그저 자애로운 할머니로만 살 것이다. 뜻대로 되어야 할 텐데... 밤이면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뜰 있는 집이 주는 낭만이다. 새벽에는 기온이 내려가 이불을 끌어와서 배 위에 얹어야 한다. 아, 가 을이 깊어가고 있구나! 김경희 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 ‘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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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정동자 어머니 1941년~ 호시절 기억의 끝에서 추억을 만나다
    “그랴 거기서 봐”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잔 먹기로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오늘은 내가 계산 하는 날, 지갑도 단디 챙겼다. 70줄에 들어선 동상들이라 10여년 아래지만 친구로 끼어주니 황송하다고 농담을 건넨다. 우리 집으로 와서 장롱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50년 된 가계부를 꺼내서 보여 줬더니 둘이 기절초풍을 한다. 내 역사잖아. 살아온 역사, 귀하고 귀한거지. 하루도 허투루 안 살았던 훈장 같은거야. 그래서 당당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려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으쓱했다. 먼저 간 영감이 나랑 같이 즐거우면 좋으련만 둘이 살다 한사람이 먼저 가는 건 어느 한 집도 예외가 없으니 나는 나대로 잘 살다가야 먼 훗날 영감 만날 때 더 반가울 거다. 동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53년 동안 궂은일도 기쁜 일도 많았지만 애걸복걸 안하고 살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냥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밖에서 요란한 천둥 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겁박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여유있게 잘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말 ‘여한이 없다’라고 감히 말한다. ■ 우리 집 나이도 쉰둘, 중리동에 한창 양옥주택이 들어 설 때 1941년생이여. 우리나라 나이 여든 셋, 요즘은 나라에서 만으로 나이를 맥인다니 여든 둘이지. 어느새 80년을 훌쩍 거슬러 왔나 몰러. 지금 중리동 이집에서는 52년을 살았다. 현도에서 우리 4남매 다 낳고 이집으로 왔으니 반백년이 넘은 집이다. 그 때 젖먹이였던 영주가 쉰셋이다. 아직도 고운 데 벌써 쉰이 넘었다. 우리 옛적 쉰 살이면 할매소리 들었는데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딸만 봐도 새댁 같다. 좋은 세상이 오긴 온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보면 왜 그리 험악한 얘기들이 많은가 몰러. 세상이 좋아지면 사는 것도 더 좋아져야 하는데 우리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리 울 때가 있어. 그 때는 없이 살아도 인심들은 좋았는데 말이야. 옛날엔 우리 집을 동네에서 빨간 기와집이 라고들 불렀다. 동네에서는 그래도 끗발 있는 산림계장 집이라고 방귀깨나 뀌는 집이었다. 그러믄뭐햐 우리 영감님은 곧이 곧대로 살던 양반이라 그 끗발 있는 자리에서도 고지식하게 일하느라 콩고물 한번 얻어먹은 적이 없네. 허울 좋은 끗발이었지만 듬직했던 우리집 양반이 최고였어. 우리 아이들도 영감님 닮아 다들 양반이야. ■ 고향은 부강, 백화점 물 좀 먹었지 내 원 고향은 부강이야. 스물한 살에 남편 만나서 현도로 시집을 왔다. 친정집은 농사를 지었어. 보리쌀 농사짓고 식구들 입에 겨우 풀칠이나 했으니 니집내집 다들 가난하게 살던 때야. 우리 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부모님은 인자하시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어. 부모님 품을 떠난 건 초등학 교 3학년 때였다. 청주 사는 작은 아버지가 나를 데려다가 공부시켜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집으로 갔다. 친정은 가난해서 작은 아버지 젙(곁)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작은 집은 잘사는 집이라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밥값 하느라 그 집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여중에 다니 다가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래도 교복입고 여중 다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으니 큰 추억이다. 백화점에서 심부름도 하고 작은 일들을 도왔어. 일머리가 좋아서 나이는 어렸어도 야무지게 잘했지. 학교 갔다 오면 심부름 하고 애기 봐주고 가게 가서 물건 해놓고 연일 바빴지. 지금 여든이 넘어서도 아직 총기 있다는 소리 듣는 건 어쩌면 작은 집에서 공부도 했지만 백화점 다니면서 여러 가지 배워서 문리를 깨우친 모양이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그렇게 저렇게 고단 했던 시간들이 또 영민한 내가 되었네. 그때 훈련받아서 아직 총기가 있나봐. 백화점에 있을 때 보따리 장사 보부상 할매들이 나한테만 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갖다놓고 “아가씨 이것 좀 끼어 넣고 팔아줘” 하더라고 내가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때라 순진해보여서 그랬을거야. 나는 우리 엄마가 가난해서 보부상 할매들도 가난할 것이 라고 생각하니 엄마 생각이 나서 슬쩍 슬쩍 물건을 끼워서 진열해주기도 했어. 동변상련이라고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 먹고 살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 눈치 껏 할매들 물건을 끼워서 팔아줬지. 순전히 우리 엄마 생각해서 그랬던거야. 백화점에 서 물건 팔려면 머리도 좋아야 돼. 물건마다 가나다라 암호가 있거든. 지금 말로 정가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들어 ‘가’ 하면 천 원짜리, ‘나’ 하면 2천 원짜리들로 정가를 표시하는거야.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스무 살이 됐어. 그때는 친구둘이 보통 열여덟, 열아홉에 시집들을 많이 갔어. 나는 스물한 살에 중매가 들어왔어. 현도 김주사 댁이라고 뼈대 있고 돈 많은 양반가문이라고 해서 시집가서 팔자 고치려나 내심 기대했었지. 시집와서 보니 그 많은 땅을 다 팔아 먹고 빈털터리인거야. 고생문이 훤하더구먼... ■ 현도면 김주사댁으로 호적을 옮기다, 뒷모습 둔둑했던 남편 우리는 결혼 전에 세 번은 만났을거야. 약혼사진 찍으러 가야 되잖아. 청주가서 약혼사진 찍는 날 처음 만나고 그 이후로 세 번은 만났어. 공부하고 백화점에만 다니다가 선을 봤으니 어디 남자 만날 일이 있기를 해쑥스럽지. 그래서 뒤통수만 봤어. 양복입고 왔는데 뒷모습이 둔둑하더라고. 듬직해보였어. 살아보니 천하의 양반이야. 스물 한 살에 첫눈에 보면서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60년 동안 변함이 없었어. 생전 말수가 없었어. 면 산림과에 다녔는데 그 때는 산림과면 최고 끗발이 좋은 과였어. 시집와서 보니 남편은 합격이었는데 중매쟁이 말은 부잣집이라했지만 생각보다 돈이 많은 집은 아니었어도 시댁 식구들 인품은 다들 좋았어. 시집가서 보니 우리남편이 막내라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셨어. 어머니께서 “새아가 너가 밥해먹 어라” 하시며 됫박을 나한테 맡기셨어. 그때부터 살림을 했지. 점잖은 분들이라 깊은 정이 들어서 돌아가시고 선산에 묻으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요령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 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다음호에 이어서!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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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서전
    2024-02-21
  • 정동자 어머니 1941년~(2) 호시절 기억의 끝에서 추억을 만나다
    ■조카들까지 돌보던 새댁, 보따리 장사 로 살림을 보태다 남편은 끗발 좋은 산림과에 있었지만 교과서 같은 양반이라 술 사주면 술 받아먹는 정도는 했지만 눈먼 돈 한번 챙겨온 적이 없었다. 그 시절은 낭구(나무)하는 게 돈벌이였다. 그래서 곧이곧대로 감독하는 남편한테 막걸리를 잔뜩 먹여서 남편이 자전거 타고 오다 저수지에 빠져서 우리 영감님이 물귀신에 끌려가다가 겨우 살아난 일들도 있었다. 휴... 십년감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잘 참고 성실하게 근무해서 정년퇴직까지 깨끗하게 공무원으로 마감했다. 내가 장사를 하게 된 건 시부모님 두 분에 우리 애들, 거기에 조카들을 키울 수밖에 없던 안쓰러운 사연이 있었다. 우리 친정 올케가 일찍 세상 떠나고 친정엄마도 일찍 돌아가셔서 그 집 조카들을 다 키울 수가 없어서 둘을 우리가 보살피게 되었다. 시어머니께 “어머니 조카들이 불쌍해서 어째요” 말씀드리니 어머님이 두말 않고 “데려와라” 하셔서 같이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인정 많은 양반이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어머니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점잖은 분들이셨고 돌아가실 때 선산에 모시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었다. 요령 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열 식구가 살려니 내가 보따리 장사라도 시작 했어야 했다. 남편 월급봉투만 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쓰던 가계부가 지금까 지 차곡차곡 쌓여 50년 묵은 가보가 되었 다.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 ■우리 부부 夫唱婦隨(부창부수)이야기 한 소절 여러 식구가 살아야 하다 보니 세 얻기도 쉽지 않았다. 셋 방 3만 원을 얻으려고 곗돈을 부었다. 전세 3만 원, 그때 남편 월급이 4500원이었다. 그때 곗돈이 500원인가? 곗돈을 타서 우리 영감님 보고 “그 돈 가져다가 방 얻어요” 하면서 계약하라고 돈을 줬다. 그런데 아 글쎄 다음날 기막힌 일이 있었다. 남편이 방얻을 곗돈을 쓰리를 맞았다. 소매치기를 그때는 쓰리꾼이라고 불렀다. 내가 남편보고 “여보 계약했어요? ”했더니 남편이 말을 안하고 양복 주머니를 보여주었는데 아이고 주머니에 쭉 그어놓은 칼자국이 있잖아. 나도 그 꼴을 보고 기가 막혔지만 어쩌겠어. “아이고 쓰리 맞았네” 라고 지나가듯이 한마디 던졌다. 남편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 것인가. 거기에 내가 불 난데 부채질 하듯이 쏘아댄들 사라진 돈이 돌아올 것도 아니며 남편도 더 속이 상하고 나도 부아가 더 치밀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저 무심한 듯 쓰리 맞았네 하고 말았더니 우리 부부는 그날의 일을 잊었다. 전세로 살다가 우리 집을 가질 마땅한 기 회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돈이 있어야지. 할 수없이 친척들 신세를 져야 돼서 막내 작은 아버지에게 부탁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때 교장선생님으로 계셨는데 그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겨울 동짓달이라 캄캄하더라고. 날은 왜 그리 추운지...우리 막내가 젖 먹을 때라 젖을 물려야 하는데 젖이 퉁퉁 불었어. 날은 춥고 초행길이라 울적하긴 했지. 그런데 그때는 그런 마음도 사치야. 빨리 작은 아버지를 뵙고 집 살 돈을 빌리는 게 내 살길이었어. 동네에서 여기저기 헤매는 데 호롱불이 반짝이는 집이 보여서 찾아 들어갔지. 할아버지랑 손자로 보이는 두 이가 가마니를 짜고 있었어. 이 00동네 교장 선생님 사택 찾는다고 했더니 “이 아줌마 모시고 그 집 찾아드려라” 하시는거야. 청년이 호롱불을 들고 첩첩산중을 넘어 작은 아버지집을 찾아갔어. 그런데 세상에 가도 가도 얼마나 산이 깊은지 말도 못해 겨우겨우 산 넘고 작은집을 찾았어. 작은 아버지가 그 밤에 내가 왔으니 깜짝 놀라서 “아니 아가야 이 밤중에 웬일이냐” 그래서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지. 그랬더 니 작은 어머니보고 융통해오라고 하셔서 작은 어머니가 돈 5만 원을 빌려주셨어. 그 밤에 불쑥 찾아가서 돈을 빌릴 수도 있고 은인이지. 나는 빨리 갚는다고 성급히 말하기보다 곗돈 부어서 갚겠다고 1-2년 후가 될 수도 있다고 딱 부러지게 솔직히 말씀드렸어. 약속을 못 지키면 작은 아버지께 불손한 상황을 만드는 거라 확실하게 말하는 게 필요했지. 내 성격이었어. 작은 아버지가 “나 같으면 안 받아도 되는데 작은 엄니 때 문에 어쩔 수 없다” 빌려주시는 것만도 황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돌아오는 길 너무 좋아서 그 칠흑 같은 밤도 두렵지 않았다. 글쎄, 여느 아낙 같으면 그 고생을 하고 젖이 퉁퉁 부은 채로 돈을 빌려 나오는 발걸음이 서글플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고맙고 신났다. 힘들게 어렵사리 돈을 얻었지만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우리 식구들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다. 젊은데 뭘 해서든 돈은 갚으면 된다. 뭐가 걱정인가. 열심히 살면 되지...너무 좋았다. 그 때는 마음이 힘든 것보다 퉁퉁 불은 젖몸살 이 더 아팠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님이 밤새 막내를 돌보느라 보리쌀 뜨물에 사카린 타서 밤새 먹이셨다. 인품 좋은 어머니는 “갓난쟁이를 두고 젖 짜는데 얼마나 고생했니 시집 잘 못 와서 고생해서 어쩌니” 어머니의 그 말씀 한마디에 고단했던 발 걸음이 다 녹아내렸다. 나는 장사하고 남편이 봉급 타오면 곗돈 넣고 시골이라 나가면 채소며 고추도 주고 인심이 좋을 때라 허리띠 꽉 졸라 매면 돈이 차곡차곡 모였다. 그래서 가계부를 50년째 쓰고 있다. 내 속옷 한번 제대로 사 입지 못하고 빨랫줄에 널린 축 늘어진 남편 메리야스 중에 하나는 내가 입던 것이었다. 그래도 아침마다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은 먹이고 입히는 거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나를 잠시 잊기로 했다. 돈을 모을 때는 집 짓는 것 같았다. 맞지. 집 살돈 빌려온 돈이라 집 짓는 거랑 다름없었다. 고단해도 힘이 나던 때다. ■다시 청춘인 할매의 하루 영감님을 3년 전에 보내고 처음에는 적적하고 쓸쓸하데. 그래도 애들이 수시로 와서 나를 챙겨주면서 위로가 됐어. 그런데 어차피 인생이 둘이 살다 하나가 먼저 가는 건 자연의 이치라 이제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동네 동상들이랑 막걸리 한 잔씩 하면서 유유자적이네. 100세 시대라니 여든이 넘은 나는 인생의 8할을 넘게 살았다. 겨울이라고 한들 아니라고 손사래를 저을 수도 없다.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길었는데 어찌 80년은 후루룩 지나왔다. 엊그제 여중 다니던 계집아이였는데 문패에 나란히 같이 섰던 남편 이름은 먼저 가고 나만 남았다. 덧없어 보여도 지난 세월 속에서 사랑하며 행복에 젖고 슬픔에도 잠겨보았다. 수많은 희로 애락의 감정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 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골 깊은 주름은 훈 장처럼 보이고 아직도 영민한 눈매,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 랄까. 거울 앞에선 내가 부끄럽지 않다. 햇 살에 반짝거리던 단풍잎들이 한바탕 비를 맞더니 오히려 곱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낙엽 되기 전 절정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도 한 겨울이 아닌 만추의 한 가운데 섰다고 자부하련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아름 다운 때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때, 바로 지금이다.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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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진경숙 어머니 1942년~(1) 운명이 덫이 아닌 닻이 되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올거요” 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때 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 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 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 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께서 신자에서 경숙이 되기까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한 많은 세월, 이제 격랑의 파도를 헤쳐 나와 항구에 정박한 고요한 배가 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4대가 10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진경숙 어머니의 가족들. 시골에서도 흔치 않은 가족구성원인데 도심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 향기로운 가족의 대들보인 어머니의 80여년도 파란만장이라는 이름으로 굴곡진 인생사를 담을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생, 큰 따님도 손주를 본 젊은 할머니다. 4대를 이루는 동안 어머님도 80여년, 질곡의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 생이별, 이북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배 엘에스티호의 기적소리 “아가 너 함흥 이정목 살던 00집 딸 아니니” 6,25전쟁 통에 배에서 내려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는 나에게 천사처럼 나타난 차복남 어머니. 1950년 6,25전쟁 난리통에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배 엘에스티호에서 나는 부모님과 생이별을 했다. 내 나이 겨우 여덟 살... 부모님이 “신자야 배에 먼저 타고 있어라. 집에 가서 짐 정리하고 올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 말 한마디가 부모님이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배가 출발하는 기적소리가 울렸지만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드넓은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저 소리내서 울었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지 시작했다. 아, 부모님은 아직 안 오셔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배에 타고 계실 거라 믿고 나는 엄마 아버지를 부르면서 배가 떠나가라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배 안을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결국 집에 다녀온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뒷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여덟 살짜리 작은 계집아이는 울면서 며칠을 보내고 거제항에 배가 도착했다. 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를 때 아주머니 한분이 나에게 “아가 너 함흥 이정 목 살던 00집 딸 아니니”라고 나에게 아는 체를 해주셨다. 아무도 없는 남녘 땅, 거제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니. 점잖은 아주머니는 나를 아는 분이었고 나는 그분을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천군만마를 만난 것 같 았다. ■전쟁고아의 올가미에서 나를 구해준 차복남 어머니 차복남 어머니... 나의 양 어머니를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머니도 함흥분이라 우리 동네에 살던 분이었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바느질을 워낙 잘하셔서 바느질 일감이 들어오면 어머니가 직접 옷감을 갖다 주러 가실 때 나는 어머니 치마 자락을 잡고 따라다니곤 했다. 그때 차복남 어머니가 나를 보시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 운명같은 이야기다. 눈이 똘망똘망하고 피부가 뽀얗던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생면부지의 남녘땅에서 나를 살려준 구원의 여인 차복남 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눈이 퉁퉁 부은 채 발만 동동 구르던 작은 계집아이였을 때다. 차복남 어머니께서 “아가 나랑 같이 가자” 하시면서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다시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당시의 피란민들은 대부분 거제도에서 내려 목적지가 부산인 사람들이 많았다. 차복남 어머니의 친정식구들은 8,15 전에 이미 부산 영도에서 자리를 잡고 계셨고 어머니는 뒤늦게 마지막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신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어머니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노란 껍질을 까서 한 입에 쏙 넣었더니 달달 한 맛에 혼을 뺏긴 과일이 바로 바나나였다. 어린 나는 그 바나나 맛에 이북에 계신 부모님을 서서히 잊게 되었다. 이북에서도 궁핍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차복남 어머니의 집은 정말 전쟁고아가 될뻔한 나에게 궁궐 같은 집 그리고 구들장처럼 따뜻한 식구들이었다. 다들 온화한 분들이라 나를 친딸처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셨다. 사실 내가 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다하더라도 나는 고마워해야 하는 여건 이었다.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인 데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 그런 데 나를 식구로 챙겨주던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운명의 여신이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내 내 가슴에 피멍처럼 남은 자국이라면 내가 자식을 낳고 키워보니 내가 그 배에서 부모님을 애타게 찾던 그 마음보다 우리부모님이 어린 딸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숯검정이 되었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터진다. 나는 차복남 어머니 댁에서 너무 사랑받으면서 성장해서 함흥의 부모님을 서서히 잊었다. 속이 다 타들어갔을 우리 부모님. 그래서 우리 인생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들 일컫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생이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차복남 어머니 집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나를 둘러싼 운명은 고운 길만 걷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또 다시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며 남편을 만나게 된다. 부산 영도시네마 극장에서... (2편은 2023년 2월호에 )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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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1
  • 진경숙 어머니 1942년~(2) 운명이 덫이 아닌 닻이 되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이 나 올거요”라고 우리 어머니들은 주저 없이 말씀하신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생을 드러냄이 아니다. 인생의 모퉁이를 돌때 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벼랑 끝에 내몰리기도 하고 한고비 넘겼더니 다시 또 산 넘어 산을 만나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다들 살아오셨다. 그래서 한마디로 책 속의 주인공이 될 법하다고 스스로 자평하신다. 진경숙 어머니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또한 책 한권으로 부족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진신자로 태어나 지금은 진경숙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께서 신자에서 경숙이 되기까지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한 많은 세월, 이제 격랑의 파도를 헤쳐 나와 항구에 정박한 고요한 배가 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4대가 10분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진경숙 어머니의 가족들. 시골에서도 흔치 않은 가족구성원인데 도심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 향기로운 가족의 대들보인 어머니의 80여년도 파란만장이라는 이름으로 굴곡진 인생사를 담을 수 있었다. 어머님은 1942년생, 큰 따님도 손주를 본 젊은 할머니다. 4대를 이루는 동안 어머님도 80여년, 질곡의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열아 홉 살, 영도 시네마 극장에서 영화처럼 남편을 만나다 전쟁고아가 될 뻔한 내가 차복남 어머니를 만나 궁핍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또래 아가씨들보다 세상 물정을 알아차릴 경험을 두루두루 하면서 큰 애기로 성장해갔다. 큰 아버지는 현금이 많아서 여기저기 거래처에 돈을 대주고 매일 수금을 하셨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눈치도 빨라서 내가 적역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장부를 들고 거래처를 다니면서 매일 수금을 했다. 극장이 전성기였던 때라 몇 개의 극장도 거래처였는데 영도시네마 극장에 매일 들렸던 나는 수금할 때까지 시간이 남으면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곤 했다. 당신 전옥, 최무룡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영화관을 압도했는데 전옥 배우의 ‘눈내리는 밤’ 최무룡의 ‘외나무다리’ 등 그 시절 흑백영화는 열아홉 살 아가씨의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그 때는 사는데 궁핍하지 않아서 목걸이며 반지 예쁜 치장도 하고 한껏 멋도 부리던 예쁜 아가씨였다. 어느 날 영화를 보는 데 뒤에서 남자가 장난을 걸었다. 누군가 돌아보다 어두운 극장안이라 화들짝 놀랐다.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첫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젊은 호기로 살던 남편이라 믿음직한 구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따끈한 연애는 시작되었다. 네모난 얼음에 팥을 삶아서 넣은 아이스크림이 인기였는데 우리는 석빙고 집에서 만났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남편은 세 번 만나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노래가사처럼 열아홉 순정을 받쳤는데 떠나버린 것이다. 데리러 온다는 말을 철통같이 믿었고 남편은 그 말을 지켰다.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편지를 날마다 보냈다. 나도 그리움으로 적셔진 답장을 매일 보냈다.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았다. 어느 날 편지에 “신자야 올라와라” ■결혼, 사랑의 종착역이 아닌 고생문으 로 들어서던 길 나는 편지를 받고 무작정 야반도주하듯이 옷 보따리를 2층에서 내 던지고 큰집에서 밤에 몰래 빠져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사랑을 찾아 그 밤에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퇴계로에 살던 남편은 친구와 함께 마중 나왔고 운명처럼 다시 만났지만 나는 고생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안이 되었다. 변변한 일을 하지 않던 남편의 집으로 갔더니 식구들이 색싯감 왔다고 쪽방에 다들 보여 있었고 온 식구가 모여서 쪽방에서 칼잠을 자는 형국이었다. 부산영도에서 편하게 살던 나는 가난이라는 올가미에 갇혀 그야말로 고생문에 들어섰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의 물결을 타던 때라 맘만 먹으면 일할거리도 많았지만 남편은 철없던 시절, 남 밑에서 순종하면서 일할 수 있는 근성이 부족해서 도로공사 아스팔트 까는 현장에 취업했지만 일을 쉽게 놓고 말았다. 그 틈에 아이도 생겼지만 먹거리조차 제대로 없던 때였다. 차복남 어머니가 알게 되시고 어느 날 오셔서 사는 꼴을 보시더니 당장가자고 내 손 을 잡아끄셨다. 어머니가 곱게 키워주셨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지는 말하면 무엇할까. 지금 6남매를 두었지만 나도 첫 아이를 잃은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 때 다들 7남매 8남매씩 낳고도 한둘 잃는 일들이 다반사지만 너무 힘든 시기에 아이를 잃어버려서 가슴에 묻으려니 애간장이 끊어졌다. ■하루도 쉼 없던 날들 내 인생도 전쟁고아로 시작되었기에 호적도 바로잡아야 돼서 애를 들쳐 업고 부산까지 다니면서 신자에서 경숙으로 개명도 하고 매일을 발을 동동 구르면서 살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냈다. 우리 큰딸 윤형이가 나 따라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늦게 철든 남편 챙기랴 6남매 챙기랴 수많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려면 책 한권으로는 택도 없는 인생 여정이다. 남편은 본성이 착한 사람이라 살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는 서로 애를 태우기도 했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미군부대에서 미장일을 하고 나도 요꼬를 짜면서 생활에 보탰다. 동두천, 파주 등에 살다가 당진으로 내려와서 30년 정도 살고 대전으로 터전을 옮겼다. ■ 인생의 사계 중 겨울을 맞은 우리 부부, 혹한이 아닌 눈꽃 핀 겨울 당진은 서해바다가 좋은 곳이라 가족들끼리 단골배를 타고 나가 회를 떠서 먹기도 했는데 바다에서 갓 잡아 올려 회를 뜨면 말 그대로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그 날도 가족들같이 나들이를 나간 날이었다. 남편이 어지럽다고 전조증상을 호소했고 우리는 바로 119를 불러서 골든타임을 놓 치지 않았다. 다행이 거동은 불편하지만 자리보존하고 눕지 않게 되었다. 내가 부축을 하면서 살살 움직일 수 있고 나는 힘들지만 우리 부부 정은 더 깊어졌다. 전쟁고아로 시작해서 열아홉 살에 철부지 같은 남편을 만나서 젊은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 않던가! 친구들이 남편 얼굴도 안보고 결혼하던 때 세상구경도 하면서 문리가 트이고 남편을 만나 불타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으니 나도 후회는 없다. 이제 내 인생 사계 중 겨울의 시간이지만 혹한이 아닌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솜털처럼 내려앉은 겨울이다. 살을 에는 추위가 위협하는 겨울이 아닌 눈꽃이 핀 아름다운 겨울의 한복판에 섰다. 우리 큰 딸의 손주까지 4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그 숲속에 나와 남편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 가족이 그리는 겨울 풍경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그래!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김경희작가 부모님 자서전 전문‘추억의 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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