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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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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4
  • 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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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7
  •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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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2
  • 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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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5
  • 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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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6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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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7
  • 역 맹모삼천지교
    예전 어느 일간지에서 역 맹모삼천지교 칼럼을 읽었다. 신선한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감동을 받았다.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산다는게 다는 아니며 아무리 열약한 환경일지라도 슬기롭게 잘 이용하여 배울 것은 배우면서 극복하면 더욱 좋다는 내용이다. 맹자의 어머니 급씨가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열약한 환경이 부정으로만 볼수 있는가 첫 번째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교육 시킬곳이 아니구나 한탄하여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인하여 공동묘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엔 공동묘지가 많았다. 공동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한다. 장례 행위를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삶을 살으려고 노력 했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가지지 않는가 혹은 부와 명예는 없지만 가치있는 진정한 삶을 살았는가.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시장이었다. 어린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도 아니구나 하고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시장 사전적 정의로는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정한 장소 또는.상품으로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범위나 영역이다. 즉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려하는 소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끄러운 환경이 반드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장소이다. 과연 시장은 아동 교육에 꼭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 그속에서 사람들의 어울림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시장은 경제의 축소이다. 그나라의 경제를 보려면 시장을 가보라고, 사람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도 말이다. 노동의 중요성을 깨닭고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재화를 올바르게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낭비적인 재화 사용은 안되며, 노동 없이 벌어오는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은 엄청난 죄이다. 이런 재화는 쉽게 나가버린다.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가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가 종종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부닺치기 마련이다. 부딪친다해서 그냥 주저 앉을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서 맹자의 어머니가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며 맹자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한 어머니 속에서 자란 맹자가 위대한 현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폭 넓게 생각해볼 필요 있다. 다시말해 정신과 물질을 잘 음미 할 필요가 있으며, 않좋은 환경속에서 자랐다고서 반드시 잘못되는 것도 아니며 극복 잘해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진화론 과학자인 다윈은 종의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종이라고 하였다. 자녀들을 위한 진전한 교육 지식을 많이 배우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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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3
  • 추억 진행형 신탄진
    신탄진은 나름대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신탄진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땐 전매청(지금 KT&G)에서 파고다 아리랑 신탄진 은하수라는 이름 가진 담배들이 나왔다. 정부에서는 1965년 신탄진에 연초제조창(지금 KT&G)을 만들었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정한 모양인 것 같다. 대전에 살면서 신탄진 지명소리를 많이 들었고 담배가계 보면 신탄진담배를 많이 보았고 담배심부름도 했으니 잊을수가 없다. 옛 지명은충남 대덕군 북면으로 불렸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신탄진읍으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집에 전화국서 발행한 충청남도 전지역 전화번호부가 있었기에 즐겨보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탄진 전화번호를 열심히 보았다. 전화번호는 국이없는 2자리와 3자리 였고, 석봉리에 사는 주민들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한 곳만이 평촌리만 적혀있었고 연초제조창으로 기억하고 있다. 석봉리와 평촌리만 있고 다른 리는 없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대전에서 신탄진 가는 방법은 좌석버스였고 요금은 3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 성인기분 15원인가 20원) 버스는 많지 않았다. 1973년 아버지는 이모부 친척의 도움으로 신탄진서 포도농사를 지으셨다. 어느날 나랑 동생이랑 함께 포도밭에 갔다. 남경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드넓은 포도밭이 보였다. 지금은 주택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712번 버스 종첨) 남경마을 버스정류장 자리에서 신탄진역이 보이길래 걸어가보자고 하여 같이 걸어갔고 역 옆에 육교가 있어 올라갔다. 어느 할머니가 들고있는 짐을 같이 내려달라고 하여 도와주었다. 신탄진역안 철길을 바라보니 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역무원 2명이 양쪽 폴랫포옴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라 힘들어 했다. 포도밭으로 되돌아와서 동네아이들과 놀았고 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먹으라고 많은 포도를 따서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가 바래다 주었는데 원동시장에서 내려 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느라 힘들었다. 이후로는 신탄진에 가질 않했다. 80년 통일호 열차타고 서울가는데 신탄진역에서 섰으며, 사람들이 제법 탔다. 신탄진에서도 통일호도 서는가 생각했다. 80년대 대청댐을 신탄진을 통해 여러번 갔지만 무관심했다.KT&G에서는 지금처럼 벚꽃 놀이를 했으며 2번 정도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신탄진을 가게 된 계기는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2006년에 동구에서 살다가 법동으로 이사와 대덕구민이 되었고 2007년 1월1일자로 연기군 동면(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았기에 신탄진을 거쳐가야했다. 신탄진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조치원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아침 7시 55분 첫버스 타고 다녔다. 조치원 전의 연서지역에서 근무할땐 신탄진역서 기차타고 다녔다. 연기군이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남지역으로 발령 않받아 퇴직할때까지 계속 신탄진을 거쳤다. 가끔 휴일에는신탄진 시장 로하스공원 수영장 대청댐 대청공원 신탄진공단 등등 친숙해지려고 다녔다. 퇴직 후 유튜버가 되어 신턴진의 다양한 볼거리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으며, 대덕마을신문명예기자가 되어 (구) 신탄진도서관에 가서 취재도 하였고 정보검색과 독서를 하고강좌도 들었다. 지금은새로 지은 석봉도서관이 대신하고 있다. 대덕구 주최로 신탄진서 하는대청호 고래축제와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가 하였다. 최근 대덕국민체육센터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하였으며,새마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구의장상을 받았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경품추첨을 잘하여 많은 상품을 받았다. 추억진행형이되어버린 신탄진 좋은 추억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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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4
  • 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1956년 가수 안정애(본명 안순애)는 신곡 대전부르스를 발표 하였다 “잘 있거라 나는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시작되는 노래로 2절까지 있으며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이다. 안정애가수를 간략히 소개하면 193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였으며 부유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녀가 가수가 된 동기는 집 근처가 터미널이 었는 입지적 조건덕에 지방공연을 자주 보아,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서울에 상경하였지만 성과가 없어 하동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시 상경 하여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부른 가수 고복수(처 황금심가수 아들 고영준가수)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악착같이 배웠으며 신인 선발무대에 나가서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백설희‘'봄날은 간다',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서 신인가수로 박탈되었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첫 곡은 밤비의 블루스 였으며 히트를 치자 대전부르스 순정의블루스 연락선불루스 이별의김포비행장 애정산맥 등 주로 블루스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하여 불렀으며 예명을 안정애로 하였고 또 다른 호칭은 “블루스의 여왕”이었다. 대전부르스 노래가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노래를 작사한 최치수는 10년간 열차 승무원을 하였으며 이후 작사자가 되었고, 신세기레코드사 직원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대전역 인근에서 숙박을 했다. 어느날 새벽 0시40분 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보슬비를 맞으며 슬픈 이별하는 모습을 보았고 남자는 천천히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0시50분 출발했고 여자는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끝까지 지켜 보아야 했다.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쓰라린 심정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그시절 열차와 역의 풍경을 잘 담아 가사를 만들었으며 승무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였다. 지은 노래를 김부해에게 전해주었고 김부해는 4/4박자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를 보면 가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주곡부터 나온다. 단번에 들어보면 완전 귀에 익어 대전부르스 곡이구나 알 수 있다. 최치수 작사자는 대전부르스 말고도 용두산엘레지 눈물도말렸오 사랑이냐 돈이냐등 많은 노래를 지었다 작곡가 김부해 역시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대전 부르스가 발표되자마자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음반은 출반 3일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소속사인 신세기 레코드는 야간작업을 강행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특별 상여금을 주었고 가수 작자사 작곡자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인기덕분인가 1963년 대전부르스는 대전발 0시50분 제목으로 영화로 나왔다. 이종기 감독 이성근 제작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엄앵란 남양일 김동원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음악은 김부해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 같이 독촉하지만 젊은 소위는 잊을수 없는 누님을 찾고 그 누님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위는 누님을 만난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누님이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이때 그에게는 전방 수색대장으로서의 임무가 떨어진다. 그는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슬픈 시나리오이다. 1980년 조용필 가수가 대전부르스를 조용필1집에 넣어 불렀으며 역시 히트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가 처음 부른 곡으로 생각했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당시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50년대~60년대에 잠깐 존재했던 열차로 서울역서 저녁 8시 45분에 출발,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한 뒤, 10분의 기관차 교대 시간을 거쳐 0시 50분에 목포역으로 가는 호남선 하행 마지막 열차였다. 그시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해였으며,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고 서울서 목포까지 완행열차를 탄 사람들 열차여행에 매우 힘들어 했으리라 본다, 완행열차 이제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되었지만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고 나 역시 추억이 있다. 그당시 목포는 부산항과 함께 일본,만주,사할린에서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귀향하던 귀향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한국 땅으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으며, 이들이 먹고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리고 몰리던 시대로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1960년 새벽 3시30분으로 열차시간표가 바뀌었다. 대전에 살고있는 나로선 신기했다. 조용필 가수로 인해 대중가요 제목에 대전이라는 이름의 제목이 있다니 주로 부산 목포 인천 서울 제주등 있지만 호기심을 자아냈고 2절까지 열심히 불러 배웠다. 그러나 나중에 안정애 가수가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어떤 가수인가 알게되었다. 1999년 대전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뉴스로도 나왔다.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 라고 써있었고 뒷면에는 대전 부르스 노래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가서 보았으며 멋지게 만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비에 가수 이름이 빠졌다. 안정애가수가 조용필 이름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만일 넣지 않는다면 내 이름마저 빼겠다고 강한 주장으로 넣지 않했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2016년 대전역 복합역사 건설때 노래비가 철거된 뒤 사라졌다.(개인 생각으로는 그 주변 어디에 있으리라 보며 확인 하려 함 몇 년전에 얼핏 본 기억이 있음) 2009년 당시 이장우 대전동구청장이 동구청 주최로 대전부르스 축제를 하였으며 구경 가보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축제였다. 그가 2022년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종의 프리퀄로 대전0시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나서 2023년 8월11일(금)부터 17일(목)까지 2023 대전0시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원도심인 동구 중앙로 길부터 시작하여 목척교 지나 충남도청 앞까지 성황리에 하였다. 본인도 매일 가서 구경하다 시피 하였고 최대로 즐길수 있을만큼 즐겼다. 그리고 유튜브를 제작하기에 그래도 하나 정도는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1편을 올렸다. 2024년 8월 9일~17일까지 진행한 대전0시 축제 나름대로 즐겼으며 생각지않게 상품도 탔다. 유튜버로서 블랙이글에어쇼 시간여행 퍼레이드 의 일부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후 가수 공연은 개인사정상 보질 못했다. 최치수 그가 대전에 도착하지 않고 다른 도시 역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니면 그시간 여관에서 잠을 잤다면 대전부르스는 나오질 못했으리라 본다. 최치수 김부해 안정애 그리고 조용필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전 미래 즐거움의 씨앗을 심어준 영웅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작사자 작곡자는 고인이 되셨지만 안정애 가수는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오래전 TV로 잠깐 본 기억은 있다. 계속 행사를 한다면 고령이지만 한번정도는 초청 해야 하며 조용필 가수도 초청 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행사 참가 때문에 대전부르스를 부른 젊은이들 구경한사람들 행사를 만든 공무원들 이노래가 언제 어떻게 누가 불렀는가 물어보고 싶다. 안정애라는 가수를 알고 있을까 . 마을신문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싶다. 작년 올해 축제를 보면서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을 여러번 하였으며 누구에게도 말을 하였다. 대중가요에 대전을 가사로 넣은 곡도 있다. 대표적으로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 못잊을 대전의밤’ 김혜연 가수가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남인수가 불렀던 울리는경부선 3절가사에도 나온다. 이 노래도 여러번 들어보았으며 울리는 경부선은 3절까지 알고 있지만 못잊을 대전의밤은 나와 정서가 맞지않은지 익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전의 상징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인가 대전부르스 꿈돌이와 함께 대전의 상징이다. 이번 0시 축제에서도 대전부르스 전국가요제를 별도로 열었다. 내년에 이 행사를 한다면 다시한번 재미있게 구경하련다. 가끔이나마 가요무대 혹은 유튜브를 통해 대전부르스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쉽다면 음악성이 전혀 없어 다루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룰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 독주라도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 기본 몇곡은 알고 있는데 안정애 가수가 불렀던 밤비의 블루스 등 2-3곡을 배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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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9
  • 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제헌절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과제 제헌절(制憲節)은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의원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만들어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에 의거해 제정된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올해 76주년을 맞았다. 제헌절은 제정될 당시부터 공휴일이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토요휴무일) 시행에 따라 2005년 6월 30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개정되면서 식목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미군정(3년)을 거쳤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국회의원 198명(제주도 2명은 선출 못 함)을 선출하고 5월 31일 제1대 국회가 개원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춰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이제까지 76년의 우리 헌정사는 제1차 발췌개헌으로 시작된 이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헌법개헌 등 총 9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수난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 원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실정법, 국내법, 공법, 실체법에 해당하며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모법이라고 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103조로 구성됐다. 국가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국민주권의 원리, 영토, 국제평화주의를 규정했다. 평등권과 더불어 다양한 자유권을 규정했고 노동3권,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 무능력자 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며,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했고,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탄핵재판소를 뒀다. 경제 질서에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부차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경성제국대학 3천재 중 한 사람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이제까지 9차례나 인위적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반영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보다 현실 적합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행헌법도 시공을 초월하지는 못해 앞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도록 일부 개정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떤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혁신, 정의, 안전, 인권, 상생, 평화통일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당하게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저항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와 애국심이 강해 4 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 10민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저항권을 꾸준히 강화했다. 국회는 제헌절(制憲節) 제76주년을 맞아 제헌(制憲)이념과 정신에 걸맞게 그 정신을 본받고 교훈 삼아 국회로서의 기능이 여,야 정쟁의 도구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든다든지 이용하면 안 되며, 국회의원도 특권을 내려 놓고 이젠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입법부의 국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일반 시민, 국가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현장 중심의 법교육과 정치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 준법정신과 사회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military coup)로 정권을 잡아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후퇴시키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 헌정을 유린한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구속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들에게는 포상과 보상을 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와 내란으로 정권을 잡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해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한 반민주 행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경축하고, 태극기의 올바른 게양과 관리를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 중이다. 제헌절에 태극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하고 날씨가 좋지 않아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지 않는다. 2. 제헌절 제76주년 경축행사 대한민국 국회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제헌 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제76주년 제헌절 경축식은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그리고 최재해 감사원장과 전직 국회의장, 정당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단, 헌정회원, 제헌국회의원유족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경축공연 1, 감사패 수여, 헌정회장 기념사, 국회의장 경축사, 경축공연 2, 제헌절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연하게 합의하는 만큼만 개헌을 추진하자”고 여야 정당에 제안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이를 위한 공식적인 개헌 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헌법의 가치를 기억하고 국회가 국민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주제영상 상영에 이어, 대한민국의 최극단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 경찰 및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영상합창단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경축합창단의 <내 나라 내 겨레> 합창이 진행되며, 참석자 전원이 ‘제헌절 노래’를 부르며 경축식은 마무리되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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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와 기념식 실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 과제 5·18광주민주화운동이란 1980년 5월 18부터 27일까지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일어난 민중시위에 대하여 전두환과 신군부 등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을 말한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이 민중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진압 하여 직접 사망자 193명,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 65명, 부상자 3천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천589명을 발생시켜 광주 시민들은 지난 44년간 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힘들게 살았다. 그런데 고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아직까지 대부분 호화롭게 생활하면서 사과 한 마디 없이 사건을 은폐하거나 조작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어 공분을 사고 있다. 불행중 다행이도 전남대 5·18연구소와 광주지역 시민단체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난 44년간 수많은 노력을 해온 결과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아무리 은폐하거나 조작해도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7년 6·29선언과 2017년 촛불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5·18기념식 지정곡인 백기완·황석영 작사, 김종률 작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홍콩과 대만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애창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나눔과 소통, 공동체 정신은 지금 국가의 복합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크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5월 18일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광주시는 5월 18일을 공휴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2011년 5월 25일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유례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앞으로 외신 기자와 나종태 사진작가가 목숨을 걸고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과 영상, 전일빌딩 헬기사격 245개 흔적, 고 조비로 카토릭 신부의 청문회 증언, 생존 시민군들의 증언, 생존 게엄군의 양심고백, 북한군 개입설과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공격 사건 조작 규명 등을 참고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그 진상이 만천하에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니 이제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 행위를 국민과 역사 앞에 하나도 남김없이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하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5·18 행방불명자 소재를 파악하고, 시민군과 시민군의 편에 섰다가 피해를 입은 경찰공무원과 군인과 해직 기자를 찾아내 명예회복과 피해를 보상해 주어야만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족들의 한이 풀리고, 왜곡된 사회정의와 역사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2. 5·18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식 실황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5·18민주영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제44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오월, 희망이 꽃피다'를 주제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헌화·분향, 오월 영령에 대한 묵념, 경과보고, 기념공연, 기념사 순으로 엄수됐다. 기념식장에는 윤석열 대통령과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강기정 광주광역시장,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등 정관계 인사와 5·18민주유공자, 유가족 등 2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윤 대통령과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 오월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 “오늘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와 눈물 위에 서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운 연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룬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윤 대통령은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표하고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오월의 정신을 이어온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유가족에게 위로와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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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5-18
  • 특별기고 불기 2568(2024)년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불교의 교리와 문제점과 당면 과제 불교는 석교(釋敎)라고도 한다. 불교라는 말은 부처인 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 : 불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불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불교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교는 지혜(智慧), 자비(慈悲), 평등(平等)을 강조한다. 불교는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을 강조한다. 불교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 즉 해탈(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는데,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불교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고 있다. 불교는 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아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를 극복하고 부처가 되고자 항상 수행 정진하는 자력 종교이다. 한국 불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부 절과 암자에서 스님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고, 각종 시험 합격 기원 불사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등 불교의 타락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주지 스님이 수행정진을 게을리 하고, 공금을 횡령하는가 하면, 중요 문화재 관리를 소홀히 해 도난당하고, 여자 신도를 농락해 사회문제가 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정보사회, 꿈의 사회로 급변하면서 제4차산업혁명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불교 교리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다. 실제로 절에 가보면 젊은 신도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노쇠한 부인들이 신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도수가 해매다 줄어들어 점점 교세가 약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 불교는 우리 전통문화의 보고로 중요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찰이 명산의 명당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사회와 국가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원효대사 ·서산대사·사명대사·청담스님·성철 스님·서암 스님·법정 스님 등 수많은 훌륭한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고, 국난을 당할 때마다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하면, 기독교와 달리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며 종교평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어 일반 국민들의 호응을 많이 받고 있다. 한국 불교는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 포교에 성공한 외래 종교의 포교 방법을 벤치마킹해 젊은 층을 대상으로 포교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잘 하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불기 2567주년을 맞이해 스님 대상 재교육 강화, 사찰과 암자에서 스님들의 무속행위 금지, 일탈 스님에 대한 형사처벌 강화, 사찰 중요문화재 관리 강화,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경전 수정보완, 정치와 종교의 분리, 포교 강화, 불교 정화운동 전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시 증가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강력하게 실행해야 한다.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을 1주일 앞둔 5월 20일 오후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연등행렬이 이어졌다. 연등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연등행렬은 형형색색 빛을 밝혔다. 연등회는 지난 2020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2.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불기 2568(2024)년 부처님오신날인 5월 15일 전국 사찰에서는 불교계 종단들로 구성된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가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Peace of Mind, Happiness of the world)'을 올해 봉축 표어로 삼아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법요식을 올렸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날 오전 10시 총본산인 서울 종로구 소재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과 종정인 성파 대종사, 정관계 인사 등 약 1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축 법요식을 봉행했다. 진우스님은 앞서 발표한 봉축사에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마음 깨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온 국민이 모두 부처님의 대자비와 지혜 속에서 내 마음의 평안과 세상의 평화를 일구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한다"고 밝혔다. 대한불교천태종과 한국불교태고종도 이날 오전 각각 봉축 법요식을 열어 부처님이 오신 의미를 기릴 예정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앞서 공개한 메시지에서 "연등의 찬란한 빛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 세상을 환히 밝히길 소망한다"고 밝혔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모든 승가와 불자들께 마음 모아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고 김종생 총무 명의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해 축사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을 언급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 언제나 국민과 함께해 왔다며 한국 불교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늘 부처님의 마음을 새기면서 올바른 국정을 펼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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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특별기고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92주년을 경축하며
    1.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군인들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지 92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본명 尹禹儀, 1908-1932)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오전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 葵)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리었고,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1887-1975)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로 많은 피해를 당한 일제가 보복으로 임시정부를 밀착감시하며 혹독한 탄압을 가하자 임시정부는 상해, 항저우, 전장, 청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무려 4000Km를 이동하며 광복군을 창설하고 무장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그해 11월 일본으로 호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이시카와현 금택형무소 교외 미쓰코치 공병작업장 내 산골짜기에서 잔혹하게 총살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의 파평 윤씨 문중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후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마을의 최병대(崔秉大) 선생에게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 14세부터는 예산군 덕산면 둔2리 노곡 16길에 위치해 있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후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 사서삼경과 한시를 배웠다. 1923년 오치서숙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인 ‘오추嗚推)’ · ‘옥수(玉睡)’ · ‘임추(壬椎)’ 등을 발간했다. 1926년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야학을 개설했다. 1927년 20세 때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했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기도 했다.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됐지만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이를 기반으로 농촌 자활운동을 펼쳐나갔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0년 3월 6일 새벽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비장한 출향가를 써놓고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백범(白凡) 김구(金九, 본명 金昌洙, 1876-1949)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하여 윤봉길 의사는 문무를 겸비한 애국지사로 항일독립운동가, 낭만적인 시인, 농촌개혁가, 농민계몽가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홍구공원 폭탄투척만 간단하게 기록해 놓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를 단지 테러리스트(terrorist)로만 기억하고 있어, 국사편찬위원회 주도로 국사 교과서의 윤봉길 의사 관련 기록을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제92주년 기념행사 2024년 4월 29일 오전 10시 예산군과 매헌 윤봉길 월진회가 충의사에서 주관한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해 의거 제92주년 기념식은 김태흥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최재구 예산군수, 정창식 해군 윤봉길함 함장, 윤여두 월진회장, 도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상해 의거 기념 다례와 추모가 합창 등에 이어 도중도에서 윤봉길 의사 선양 유공자 표창 등 순으로 진행됐다. 김태흥 충남도지사는 “상하이 의거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선생의 피 끓는 마지막 독립투쟁이었다”며 “숭고한 헌신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광복의 길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고 윤봉길 의사를 추모했다. 이어 “올해부터 어느 시군에 사시든지 전국 최고 수준의 참전명예 수당을 드리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에 대한 의료비 지원한도도 없앴다”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의 명예로운 삶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는 또 “항일의병의 중심지인 충남은 2027년까지 내포에 의병기념관을 건립해 애국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제대로 기억하겠다”며 “선생의 뜻을 받들어 더 강한 나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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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특별기고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과 평가 2024년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생 479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이다. 문무를 겸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은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한양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28세에 무과시험에 처음으로 도전했고 31세 때인 1576년(선조 9년) 2월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선조 16년인 1583년에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선조(宣祖) 19년인 1586년 40세 때에 사복시 주부(종6품)로 다시 관직에 나갔다. 그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추천으로 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전라도로 파견되었다. 선조 24년인 1591년에는 진도군수로 임명됐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제1차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선조는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제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이겨 큰 전공을 세웠으나 원균(元均, 1540-1597)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權慄, 1537-1599)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원균이 1597년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충청수사 최호(崔湖, 1536-1597)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죽자 일본 해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 1543-1607)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은 조정은 우의정을 추증했다. 선조 37년인 1637에는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고, 좌의정이 증직되었으며, 덕풍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인조 21년인 1643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효종 10년인 1659년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숙종 33년인 1707년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17년인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1795년에는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011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되어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하여 아산에서는 성웅 이순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 중구에서는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제독 도고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848-1934)는 "세계 해군 역사에서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로 국보 제76호인『난중일기(亂中日記)』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을 맞이하여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쉽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2.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479주년 기념행사 현충사관리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을 맞아 4월 28일 11시에 충남 아산시 현충사 사당 및 경내에서 이충무공의 국난극복 업적과 정신을 국민과 함께 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탄신 제479주년 기념행사’를 600여 명(초청인사 250명, 일반 참배객 350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거행했다. 주 행사인 다례는 초헌관 현충사 관리소장의 분향·헌작(술잔을 올림)과 축관의 축문 낭독으로 구성된 초헌례, 아헌관 후손 대표 이범이 헌작하는 아헌례, 종헌관 시민제관 한상우가 헌작하는 종헌례로 진행되었다. 이어 대통령 윤석열 명의의 헌화와 분향, 현충사 청소년 국가유산 지킴이의 헌화가 있었다. 현충사관리소는 기념행사 하루 전인 27일과 28일 양일간 현충사 내 고택·사당·교육관 등 6군데를 돌며 도장을 받으면 기념품(종이접기·스티커 등으로 구성된 체험 꾸러미)을 받을 수 있는 ‘도장 찍기 여행(스탬프 투어)’을 운영했다. 같은 기간 아산시는 이충무공 묘소를 경유하는 ‘백의종군길’ 걷기대회와 마라톤 행사를 개최했다. 탄신제 주간(4월 24~28일)에 ‘성웅 이순신 축제’를 주관하는 아산시는 현충사 고택에서 27일 ‘이순신 창작시 및 시낭송 대회’를, 현충사 충무문에서 사생대회를 각각 개최했다. 28일에는 역시 충무문 앞에서 난중일기 백일장을 개최하고, 현충사 은행나무 활터에서는 대한궁도협회가 주최하는 ‘제63회 대통령기 전국 시·도대항 궁도대회’가 열였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성웅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 47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충무공께서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셨던 이곳 현충사에서, 올해도 여러분과 함께 공(公)의 위대한 업적과 가르침을 기리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충무공은 우리의 영원한 리더이자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 총 3천만 명의 관객을 기록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입니다. 공은 일찍이 왜적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유비무환의 자세로 거북선을 건조하고 화포를 개량하셨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리더십으로 23전 23승 하여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두 차례에 걸친 백의종군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충절과 애민 정신은 우리 민족이 어떤 위기와 도전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뜻깊은 충무공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공의 큰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선진 한국의 빛나는 미래를 그려 나갑시다. 다시 한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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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특별기고제57회 과학의 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제57회 과학의 날의 유래와 대한민국의 주요 과학기술 정책 2024년 4월 21일은 제57회 과학의날이다. 과학의날 유래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년 한국인 과학기술자와 민족주의 인사들이 ‘과학데이’를 정하고 민족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대중 행사를 벌였다. 당시 발명학회 전무 김용관(金容瓘)의 제창으로 해마다 다윈(Charles R. Darwin)이 죽은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하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한 강연회, 활동사진 상영회, 대중 거리행렬, 과학관·박물관·공장 견학 행사를 열었다. 이러한 민족적 움직임은 해방 직후 계승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 투자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의해 국가기념일 형태로 재현됐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한국과학원(KAIS)을 설치해 과학기술 연구·교육을 진흥했고, 과학기술처를 설립해 국가 과학기술 진흥사업을 총괄케 했다. 이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 관심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제고하려는 사업도 기획했는데, 과학의날 제정이 대표 사례다. 과학(科學, Science)은 자연현상과 인간사회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찰해 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법칙·원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행위와 이에 대한 방법론 그리고 이 둘의 결과로 이뤄진 체계적인 지식을 수립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철학의 하위 분류로 여겼으나, 점차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방법론을 이루게 된 학문 범위를 형성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가장 범위가 넓은 학문이며, 보통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을 칭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조선왕조는 문학과 철학과 사학, 즉 인문학을 중시하는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서양의 선진 제국에 비해 과학기술 발전 속도가 느려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19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을 탈피하기 위해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이제는 10대 경제대국이 됐고, 과학기술 수준도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해 세계 여러 나라가 부러워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기술 정책을 수립하고, 국내 연구기관·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결과 현재는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나노 등 다양한 최첨단 응용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초과학 분야는 미국·일본 등 과학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처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강력한 경쟁 대상국인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무려 29명(물리학상 12, 화학상 8, 생리학·의학 5)이나 받아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했다. 그나마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기초과학연구원이 대한민국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최근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어 앞으로 기대가 많이 된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 후보는 ‘660만㎡ 규모의 제2대덕연구단지’를 공약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날을 맞아 가장 각광을 받는 곳은 대전 대덕연구단지이다. 대덕 특구 출연 연구원과 연구본부, 대전시가 대덕연구개발특구 출범 50주년을 맞이해 대전을 일류 경제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원팀을 이뤄 나노 반도체와 바이오, 방위산업과 우주산업 중심의 신규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제2대덕연구단지를 조성할 계획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2024년도 정부 연구개발(R&D) 예산(25조 9,000억 원)을 2023년 대비 16.6%(5조 2,000억 원) 삭감하고, 이 중 기초연구 사업 예산은 6.2%(1,537억 원)나 줄이는 바람에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윤석열 정부가 학계 ․ 연구소 ․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직면하자 2023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미디어 브리핑에서 도전적 연구과제 지원, R&D 규제 혁신, 글로벌 R&D 추진 등이 주요 내용인 R&D 혁신 방안을 내놓았다. 그래도 의대 쏠림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이공계는 전례 없는 위기에 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57회 과학의 날이 과학계 입장에서는 축제의 날이지만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2. 과학의 날 기념행사 개최 현황 제1회 과학의날 행사는 1968년 4월 21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됐으며, 이후 지금까지 기념식이 중단 없이 이뤄졌다. 과학의날 기념식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부처이지만, 실제 행사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관한다. 그 밖에 과학관, 과학창의재단, 각급 학교 등 다양한 기관·단체가 전국적으로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행사를 개최한다. 그런데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지난해 9월 15일 국회에서 과학의날을 더욱 의미 있는 날로 변경하자는 결의안을 발의했다. 변재일 의원은 세종대왕이 자격루를 국가표준시계로 반포한 8월 5일(1434년)을 새로운 과학의날로 제정해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과학 역사와 위업을 승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부터 매년 과학의 달인 4월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과학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4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전엑스포시민광장 및 엑스포과학공원 일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2024년 대한민국 과학축제는 과학기술문화 체험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축제'와 국가전략기술 연구성과 전시 중심의 대한민국 과학기술대전'이 통합 개최되어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축제 참가자들이 꼭 체험해야 할 과학축제 프로그램으로는 과학 실험식, 과학 라운지, 과학 테마파크 등을 들 수가 있다. 대전과 인천 교육청, 특허청과 한국발명진흥회 등이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과학의 도시인 대전 교육청은 지난 4월 19일 대전교육과학연구원 대강당에서 제57회 과학의 날 기념식을 개최했다. 기념식에서는 과학활동에 우수한 성과를 이룬 초등학생 148명과 과학기술 진흥에 헌신한 우수 과학교사 6명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과학탐구활동 지도 및 교수학습활동 개선에 기여한 교사 6명, 과학교육 진흥에 공이 있는 대학 등 유관기관 관계자 8명, 과학교육 우수학교인 한밭초등학교·동명중학교·우송고등학교에 교육감 표창이 수여됐다. 설동호 대전 교육감은 “학생들이 미래를 선도하는 창의융합 인재로 성장할 수 있게 다양한 지원을 통해 과학교육을 활성화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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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2
  •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와 기념식 현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4.19혁명 64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간 대한민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 광주, 대전, 마산, 충주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천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해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청년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해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줬다.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하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19혁명이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 그렇지만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강북구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기념탑·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 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 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됐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서울 강북구는 2013년부터 강북구 일원에서 4·19혁명국민문화제를 개최해 4·19혁명의 의의와 가치를 대중에게 알려 왔다. 2.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현황 국가보훈부는 2024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비상을 이끈 4·19혁명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제64주년 4·19혁명 기념식’을거행했다. ‘4월, 자유를 향해 날다’라는 주제로 열린 4.19혁명 64주년 기념식은 4·19혁명 유공자와 유족, 한덕수 국무총리와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 등 정부 주요 인사, 이재명과 조국 등 야당 주요 인사, 미래세대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헌화·분향, 여는 공연, 경과보고, 기념공연 1막, 기념사, 기념공연 2막, 4·19의 노래 제창 순으로 45분 동안 진행되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4.19혁명 64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오늘 우리는 64년 전 그날, 자유·민주·정의를 향해 뜨겁게 타올랐던 민주 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부정과 불의에 맞서 목숨 바치신 학생과 시민의 숭고한 희생에 머리 숙여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의 아픔을 딛고 이 땅에 민주주의 역사를 바로 세워주신 4·19혁명 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손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2월의 대구, 3월의 대전과 마산을 지나서 마침내 4월 19일의 혁명을 통해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눈부신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일어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의 정신으로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끄는 저력이 되었습니다. 2023년 5월에는 2·28 민주운동에서 4·19혁명에 이르는 혁명 과정의 1019점의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세계가 4.19혁명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위업을 이룩하신 학생과 시민의 헌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쉽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4·19 열사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주신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데 더욱 힘써나가겠습니다. 더욱 낮은 자세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유와 인권, 상식과 공정이 통하는 반듯한 나라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국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가 4·19혁명의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발전시켜 더 큰 희망과 번영의 미래를 밝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 오피니언
    • 기고
    2024-04-19
  • 특별기고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5주년을 경축하며
    대산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1.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5주년의 역사적 의의 2024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5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1919년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최대 염원인 독립으로 곧장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갖게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14년 연해주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했고, 3.1 운동 기간에는 13도 대표가 한성 정부를 만들었다. 3.1 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그런데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전 국민의 열망인 독립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여러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폐합했다. 105년 전인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한 양옥집에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한국 독립운동가 29명이 모였다. 이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12시간에 걸친 치열한 회의 끝에 정부조직을 구성하고, 조소앙 선생이 기초한 첫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선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 정신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조국 독립을 쟁취한 날까지 27년간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옮겨 다니면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흩어진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민주공화제의 틀을 정립했고,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선포해 대한민국 건국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국민의 자유와 평등, 선거권을 천명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을 다 갖추지 못한 망명정부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으로 대한민국이 정통성을 유지하며 국통맥을 이어나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미를 기리고, 독립운동사를 통해 민족 공동체 의식을 확립해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국가 기념일이다. 이날은 상해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인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10개조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철야 심의한 후, 4월 11일 오전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발포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1920년부터 계속 4월 13일로 기념해 오다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부터는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은 1989년까지는 한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기념식을 주관했다. 그러다가 1989년 12월 30일에 국가 기념일로 지정됨에 따라 1990년 기념식부터는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하는 행사가 되었다. 2.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5주년 기념식 국가보훈부는 2024년 11일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임정기념관)에서 1919년 4월 11일 조국독립을 위해 수립한 임시정부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국민과 함께 기억·계승하기 위한 제105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식을 ‘새벽으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독립유공자 유족, 정부 주요인사, 각계 대표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여는 공연, 국민의례, 기념공연(1), 기념사, 기념공연(2),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축하가 제창 순으로 45분 동안 엄숙하게 개최했다. 국가 보훈부는 이번 기념식 주제인 ‘새벽으로 가는 길’은 광복군 출신의 독립유공가 김문택 지사가 남긴 수기의 제목을 인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여는 공연은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 모여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는 장면을 영상과 무대에서 배우들이 재연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낭독함으로써 105년 전 그 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기념공연(1)은 기념식을 거행하는 당일부터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에서 특별전시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수기인 정정화 ‘장강일기’, 양우조·최선화 ‘제시의 일기’, 김준엽 ‘장정’의 일부를 바탕으로 구성한 세 편의 낭독극을 통해 수많은 위기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특히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 등을 도왔던 정정화(1990년 애족장) 수기 ‘장강일기’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임시정부의 이야기, 부부 독립운동가 양우조(1963년 독립장)·최선화(1991년 애국장) 수기 ‘제시의 일기’는 조국독립을 위한 임시정부의 힘든 여정, 광복군 김준엽(1990년 애국장) 수기 ‘장정’에서는 임시정부의 멈춤 없는 독립 의지와 마침내 광복을 맞이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각 낭독극 사이에는 독립운동 관련 노래 거국행(안창호 작사, 이상준 작곡), 여명의 노래(이해평 작사, 한형석 작곡)가 기념식장에 울려 퍼졌다. 기념사에 이은 기념공연(2)에서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어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시대적 흐름을 영상으로 만나본 후 조국 광복의 내일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던 대한민국의 여정을 기억하자는 노래 ‘새벽’을 가수 정동하의 목소리로 들었다. 끝으로 참석자들이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축하가’를 제창하며 기념식을 마무리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념사에서 “자유와 평화를 더욱 굳건하게 지키겠다"며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는 압도적인 국방력으로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와 협력의 길은 열어두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는 선열들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해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전력을 다하고 있다"며 "단단한 동맹과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를 실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한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 확보와 다자간 협력을 통해 우리의 경제 안보를 강화하겠다"며 "수출과 투자와 내수에 활력을 불어넣고, 물가안정과 일자리 창출, 체감경기 회복에 노력하고,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전략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기술 혁신과 신산업 육성을 통해 경제의 혁신 성장과 글로벌 도약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한덕수 총리는 "인구 위기 극복, 지역 균형발전, 의료 개혁 등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며 "국민의 화합과 상생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한덕수 국무총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선열들의 헌신에서 위기 극복의 힘과 통합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라며 "지역, 이념, 세대, 양극화 등의 갈등을 넘어 국민의 통합된 저력으로 여러 도전을 이겨나자. 영광된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 총리는 "선열들의 고귀한 헌신의 토대 위에서 지금처럼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며 "선열들의 위업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며, 정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예우하고, 독립운동의 가치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강정애 보훈부 장관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이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도 조국 독립이라는 찬란한 아침을 맞이할 새벽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갔던 임시정부 선열들의 숭고함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뜻깊은 기념식이 되기를 바란다”며 “보훈부는 우리 국민과 미래세대가 숭고한 임시정부의 여정과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2023), 『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6권. .주요 논문 :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대덕문학회․백수문학회 회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의원, 평화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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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특별기고제주 4.3사건 76주년을 추념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의의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중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2011년 1월 26일 현재 신고된 희생자 14,032명(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764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2. 제주 4·3사건 당시 활약한 군경 의인들 이야기 제주 4·3사건 당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의인들이 있다.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해군 중령은 1950년 8월30일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검속자를 총살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무고한 주민을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해당 공문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후 명령을 거부했다. 덕분에 강순주 씨를 포함해 200여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서장으로 부임하기 전인 1949년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도 주민 100여명을 훈방했다. 강순주 씨는 “계엄이 선포된 시절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셨다”면서 “문형순 서장님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애국자로 당시 우리를 풀어주면서 ‘나라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다. 평안남도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1953년 경찰 퇴직 후 제주에서 대한극장 매표원 등으로 일하다가 1966년 향년 70세 나이로 유족 없이 제주도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경찰청은 2018년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추모 흉상을 제주경찰청에 세웠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로는 선정되지 못했다. 그간 네 차례에 걸쳐 문형순 서장에 대한 국가유공자 신청이 접수됐지만 입증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통과하지 못했다. 김익렬 9연대장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며 유혈사태를 막고 4·3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려고 노력한 군인이다. 하지만 방해 세력에 의해 평화협정은 깨졌고 강경 진압작전을 거부한 김익렬 연대장은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됐다. 이외에도 1948년 11월1일 함덕리 평사동 모래밭에서 주민 6명을 총살하려는 토벌대에게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만류하다 함께 희생된 한백흥·송정옥 씨가 있다. 경찰이지만 최대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노력한 장성순·김순철·방상규·강계봉 씨 등도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건 ‘4·3 의인’들이다.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민주화가 되기 이전에 4.3사건 피해자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간첩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서로 불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인권 탄압을 받았고, 연좌제에 묶여 취업이 막혀 일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강순주 씨와 독립유공자 한백흥 지사의 후손들은 의인들의 뜻을 받들고, 4·3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확산시키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며 자신들이 받은 국가보상금을 4·3 유족회에 기부했다. 이들 외에도 4·3의 완전한 해결과 미래세대를 위해 국가보상금을 유족회와 마을 등에 쾌척하는 기부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3. 제주 4.3사건 76주년 추념식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 4.3사건 76주년을 맞이하여 4월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한덕수 국무총리,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국민의미래 인요한 선거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더불어민주연합 윤영덕·백승아 공동대표, 녹색정의당은 김준우 상임선대위원장, 새로운미래 오영환 총괄선대위원장, 개혁신당 천하람 총괄선대위원장,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제주․경기․인천·대구·광주·울산 등 13개 시도 교육감, 제주4·3희생자유족회 임계령 회장 등 1만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추념식을 엄숙하게 개최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4.3추념식에 일제히 불참한 것은 4.3사건 자체의 모순적인 성격 때문이다. 4.3사건은 1948년 남한 내 5.10 단독선거를 막기 위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최초 촉발된 후,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다수의 제주도민이 사망한 사건이다. 4.3사건 주동자인 제주지역 남로당 총책 김달삼은 사건 직후 월북해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묘역이 조성돼 있다.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추념하기가 조금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이후 4.3사건은 여순(여수ㆍ순천)군사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에 국가원수로는 지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초로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이후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때는 줄곧 대통령이 불참했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세 차례나 4.3추념식을 찾은 바 있다. 한덕수 총리는 추념사를 통해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며 “정부는 4.3사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화합과 통합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 총리는 “올해 초에는 4.3특별법을 개정해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법적토대를 마련했다”며 “2025년까지 추가 진상조사를 빈틈없이 마무리해 미진했던 부분도 한층 더 보완해 나가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상범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냉전과 분단의 정세 속에 빚어진 국가폭력으로 인한 집단 희생의 아픔을 딛고 ‘진실·화해·상생’을 이뤄낸 제주 4·3의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2025년 유네스코 본부에 ‘제주 4·3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제주시는 추념식장에 도민 2,200여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행사장으로의 이동 편의를 위해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임계령)와 함께 차량을 지원하고 별도로 시민을 위한 차량도 운행했다. 특히 제주4·3 역사를 왜곡하는 현수막에 대한 대응체계를 갖추고 안전한 추념식 봉행을 위해 행정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제주4·3 희생자들을 추념하고 화해와 상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조기 게양에 적극 동참을 당부했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제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 전략』(2024) 등 6권. .주요 논문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윤동주와 생애와 작품세계」(2019.3),「박용래 시인의 생애와 업적과 작품세계」(2024)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 ․ <오늘의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대전 <시도(詩圖)> 동인,『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동양일보포럼 연구위원, 평화대사,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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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특별기고서해수호의 날 9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향토사학자) 신상구 1. 서해수호의 날 9주년의 역사적 의의 해마다 3월의 넷째 주 금요일은 2016년부터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서해수호의 날’이다. 2024년 3월 22일은 서해수호의 날 9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서해수호의 날은 서해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로, 서해에서 발생한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3월 26일), 연평도 포격 사건(2010년 11월 23일) 등 북한의 도발을 상기하면서 국토 수호 결의를 다지고, 서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서해수호 55용사의 희생을 기리며,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서해수호의 날이 3월 넷째 주 금요일인 이유는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 공격으로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사망해 대한민국 국군의 피해 중 가장 컸던 천안함 피격 사건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서해를 수호하는 데 목숨을 바친 제2연평해전에서 6명,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2명을 포함한 55명의 호국영웅들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호국영웅의 희생을 기리고 서해 도발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북한의 서해상을 포위하고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수역은 백령도를 포함해 연평도, 우도, 대청도 등 중요한 섬들이 많고 어족자원 또한 매우 풍부한 지역으로, 북한은 서해 5도에서 자신들의 영토와 세력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해 왔다. 이 같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대한민국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북의 수역은 북한의 주된 대남 도발 지역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반도에 평화가 뿌리 내리면 남북 교류협력과 민족 공동번영의 보고가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 서해수호의 날 9주년 기념행사 국가보훈부는 조국 바다를 수호한 영웅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는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오는 22일 경기도 평택 소재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거행된다고 3월 21일 밝혔다. 2024년 서해수호의 날 9주년 기념행사는 북한 어뢰에 폭침된 뒤 13년 만에 최신 호위함으로 다시 태어나 지난해 12월 실전 배치된 새 천안함(FFG-826)을 배경으로 거행됐다. 새 천안함은 2800t급으로 구형(1000t급)보다 함급이 격상됐다. '영웅들이 지켜낸 서해바다! 영원히 지켜나갈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에는 서해수호 영웅의 유가족과 참전 장병, 정부 주요 인사, 군 주요 직위자, 시민, 학생 등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승전의 역사(영상), 헌정 공연, 기념사, 기념공연 순으로 40분간 진행되었다. 먼저, 서해수호 3개 사건 및 대청해전, 제1연평해전 승전의 역사를 경과보고 형식으로 구성한 승전의 역사 영상이 상영되었다. 헌정 공연 ‘불멸의 빛’은 신학기를 맞아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 자녀가 서해수호 영웅인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추억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밝히는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무대에 올라 직접 낭독했다. 이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서해수호 55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영원히 기억하자는 취지의 국민들이 부르는 ‘서해수호 55영웅 다시 부르기’가 영상으로 송출되었다. 윤석열 대통렬 기념사에 이은 기념공연 ‘승리의 대한민국’은 서해수호 3개 사건 참전 장병들이 해군·해병대 군가에 맞추어 입장하여 성악병들과 군가 ‘바다로 가자’와 ‘해병혼’을 대합창했다. 합창 마지막 부분에 36발의 천안함 함포발사 묘사를 비롯해 22대의 공군 전투기 공중분열로 강한 국토수호 의지를 역동적으로 표출하며 기념식이 마무리되었다. 한편, 기념식 후에는 제2연평해전 전승비와 천안함 46용사 추모비에서 서해수호 55영웅의 유족과 참전 장병들이 함께한 가운데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전사자 참배가 진행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늘 우리는 아홉 번째 ‘서해수호의 날’을 맞아 불굴의 의지로 서해를 지켜낸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다"며 "목숨을 바쳐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영웅들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한이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이라 부르며 무모한 도발을 감행한다면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 것"이라며 "우리 정부와 군은 어떠한 북한의 도발과 위협에도 결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우리 안보의 핵심인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우방국들과 더 강력하게 연대해 북한군을 격퇴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다가 부상을 입을 장병들, 그리고 전사한 분들의 유가족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원할 것"이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윤 대통령은 "저와 정부는 서해수호 영웅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며 "국민의 마음속에 자유와 애국의 정신을 깊이 새겨주신 자랑스러운 서해수호 55명 영웅들을 다시 한번 추모한다"고 밝혔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서해수호 55영웅과 참전 장병 한분 한분이 조국을 위해 보여줬던 용기와 헌신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호국의 역사이자 꺼지지 않는 불멸의 빛”이라며 “이번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서해수호 영웅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29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3.15) 『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도서출판 대흥사,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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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특별기고대전 문단의 거목, 백강 조남익 작가 타계를 애도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지난 2024년 3월 11일 정오에 대전과 충남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중등학교 교육자인 백강 조남익 선생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지역 문인들과 교육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백강(白崗) 조남익(趙南翼) 작가는 1935년 4월 1일 충남 부여군 세도면 수고리에서 태어나 1960년에 현 고려대 전신인 국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6년『현대문학』에 <산(山)바람소리>가 추천되어 중앙문단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는 충남의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집과 수필집과 평론집을 다수 발간하고, 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 지회장 ․ 충남중등국어교육연구회장 ․ 충남 정산고와 부여고 교장 ․ 재단 풍육장학회 이사장 ․ 공주대와 건양대 강사 등을 역임하면서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박용래 ․ 김관식 시비를 건립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대전문학회 초대 회장으로 조직의 기틀을 다지며 대전문학 후원회를 조직하여『대전문학』창간을 주도하고 대전문학상을 제정했다. 또한 1989년 대전문화상 제정 당시 문학 분야를 독립시켰다. 그런가 하면 1977년에『현대시해설』을 발간하여 시 창작 이론을 정립하고, 대전문예대학에서 문학 인재 육성에 열과 성을 다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충남문화상(1970) ․ 공산교육상(1997) ․ 국민훈장 석류장(1999) ․ 정훈문학상(2004) ․ 윤동주문학상(2010) 등을 수상하여 대전과 충남의 대표 문인과 교육자로 자리매김했다. 백강 조남익 작가의 작품은 깊이가 있어 사색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고 향토색이 짙어 애향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많이 나타났으나 너무 난해하고 고답적이어서 독자들을 많이 확보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백강 조남익 작가는 시와 수필의 소재로 한국의 상고사를 많이 활용하여 독자들의 역사의식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데에 많이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례는 대전문인협회장으로 3월 12일 오후 4시에 추모식을 거행하고 추도사는 대전문협 7~9대 회장을 역임한 리헌석이 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리헌석은 추도사에서 “시방 남녘에서는 노란 산수유꽃이 세상을 밝히며 올라오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우리 후진들에게 새롭고 크신 발자국을 남기고 갑자기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비옵나니 이제 평안한 곳에서 부디 강건하소서. 이곳에서 이끌어주시던 것처럼 목소리 카랑카랑하게 여일(如一)하소서. 언젠가 저희들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가거든 선생님께서 두 손을 잡고 반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고 백강 조남익 작가의 시신은 3월 13일 오전에 고향 부여 선영에 안장되었다. 고 백강 조남익 선생이시여! 89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으니, 이제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저승에서 명복(冥福)을 누리시며 평안하게 영면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주요 약력> .1950년 6월 26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부친 신종순(辛鍾淳), 모친 유옥임(兪玉任)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2)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8)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학교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3.15),『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 전략』(2023.12.28) 등 5권. .주요 논문 :「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2010),「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2012) 등 127편 .주요 발굴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수상 실적 : 예산군수 감사장, 대천시장상(2회), 천안시장상(2회),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한통국문화원연합회장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2회) 교육부장관상(푸른기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문학 21』시부문 신인작품상,『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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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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