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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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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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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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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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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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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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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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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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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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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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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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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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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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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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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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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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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맹모삼천지교
- 예전 어느 일간지에서 역 맹모삼천지교 칼럼을 읽었다. 신선한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감동을 받았다.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산다는게 다는 아니며 아무리 열약한 환경일지라도 슬기롭게 잘 이용하여 배울 것은 배우면서 극복하면 더욱 좋다는 내용이다. 맹자의 어머니 급씨가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열약한 환경이 부정으로만 볼수 있는가 첫 번째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교육 시킬곳이 아니구나 한탄하여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인하여 공동묘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엔 공동묘지가 많았다. 공동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한다. 장례 행위를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삶을 살으려고 노력 했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가지지 않는가 혹은 부와 명예는 없지만 가치있는 진정한 삶을 살았는가.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시장이었다. 어린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도 아니구나 하고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시장 사전적 정의로는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정한 장소 또는.상품으로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범위나 영역이다. 즉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려하는 소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끄러운 환경이 반드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장소이다. 과연 시장은 아동 교육에 꼭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 그속에서 사람들의 어울림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시장은 경제의 축소이다. 그나라의 경제를 보려면 시장을 가보라고, 사람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도 말이다. 노동의 중요성을 깨닭고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재화를 올바르게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낭비적인 재화 사용은 안되며, 노동 없이 벌어오는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은 엄청난 죄이다. 이런 재화는 쉽게 나가버린다.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가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가 종종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부닺치기 마련이다. 부딪친다해서 그냥 주저 앉을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서 맹자의 어머니가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며 맹자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한 어머니 속에서 자란 맹자가 위대한 현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폭 넓게 생각해볼 필요 있다. 다시말해 정신과 물질을 잘 음미 할 필요가 있으며, 않좋은 환경속에서 자랐다고서 반드시 잘못되는 것도 아니며 극복 잘해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진화론 과학자인 다윈은 종의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종이라고 하였다. 자녀들을 위한 진전한 교육 지식을 많이 배우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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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맹모삼천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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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진행형 신탄진
- 신탄진은 나름대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신탄진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땐 전매청(지금 KT&G)에서 파고다 아리랑 신탄진 은하수라는 이름 가진 담배들이 나왔다. 정부에서는 1965년 신탄진에 연초제조창(지금 KT&G)을 만들었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정한 모양인 것 같다. 대전에 살면서 신탄진 지명소리를 많이 들었고 담배가계 보면 신탄진담배를 많이 보았고 담배심부름도 했으니 잊을수가 없다. 옛 지명은충남 대덕군 북면으로 불렸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신탄진읍으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집에 전화국서 발행한 충청남도 전지역 전화번호부가 있었기에 즐겨보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탄진 전화번호를 열심히 보았다. 전화번호는 국이없는 2자리와 3자리 였고, 석봉리에 사는 주민들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한 곳만이 평촌리만 적혀있었고 연초제조창으로 기억하고 있다. 석봉리와 평촌리만 있고 다른 리는 없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대전에서 신탄진 가는 방법은 좌석버스였고 요금은 3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 성인기분 15원인가 20원) 버스는 많지 않았다. 1973년 아버지는 이모부 친척의 도움으로 신탄진서 포도농사를 지으셨다. 어느날 나랑 동생이랑 함께 포도밭에 갔다. 남경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드넓은 포도밭이 보였다. 지금은 주택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712번 버스 종첨) 남경마을 버스정류장 자리에서 신탄진역이 보이길래 걸어가보자고 하여 같이 걸어갔고 역 옆에 육교가 있어 올라갔다. 어느 할머니가 들고있는 짐을 같이 내려달라고 하여 도와주었다. 신탄진역안 철길을 바라보니 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역무원 2명이 양쪽 폴랫포옴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라 힘들어 했다. 포도밭으로 되돌아와서 동네아이들과 놀았고 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먹으라고 많은 포도를 따서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가 바래다 주었는데 원동시장에서 내려 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느라 힘들었다. 이후로는 신탄진에 가질 않했다. 80년 통일호 열차타고 서울가는데 신탄진역에서 섰으며, 사람들이 제법 탔다. 신탄진에서도 통일호도 서는가 생각했다. 80년대 대청댐을 신탄진을 통해 여러번 갔지만 무관심했다.KT&G에서는 지금처럼 벚꽃 놀이를 했으며 2번 정도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신탄진을 가게 된 계기는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2006년에 동구에서 살다가 법동으로 이사와 대덕구민이 되었고 2007년 1월1일자로 연기군 동면(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았기에 신탄진을 거쳐가야했다. 신탄진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조치원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아침 7시 55분 첫버스 타고 다녔다. 조치원 전의 연서지역에서 근무할땐 신탄진역서 기차타고 다녔다. 연기군이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남지역으로 발령 않받아 퇴직할때까지 계속 신탄진을 거쳤다. 가끔 휴일에는신탄진 시장 로하스공원 수영장 대청댐 대청공원 신탄진공단 등등 친숙해지려고 다녔다. 퇴직 후 유튜버가 되어 신턴진의 다양한 볼거리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으며, 대덕마을신문명예기자가 되어 (구) 신탄진도서관에 가서 취재도 하였고 정보검색과 독서를 하고강좌도 들었다. 지금은새로 지은 석봉도서관이 대신하고 있다. 대덕구 주최로 신탄진서 하는대청호 고래축제와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가 하였다. 최근 대덕국민체육센터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하였으며,새마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구의장상을 받았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경품추첨을 잘하여 많은 상품을 받았다. 추억진행형이되어버린 신탄진 좋은 추억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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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진행형 신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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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 1956년 가수 안정애(본명 안순애)는 신곡 대전부르스를 발표 하였다 “잘 있거라 나는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시작되는 노래로 2절까지 있으며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이다. 안정애가수를 간략히 소개하면 193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였으며 부유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녀가 가수가 된 동기는 집 근처가 터미널이 었는 입지적 조건덕에 지방공연을 자주 보아,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서울에 상경하였지만 성과가 없어 하동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시 상경 하여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부른 가수 고복수(처 황금심가수 아들 고영준가수)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악착같이 배웠으며 신인 선발무대에 나가서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백설희‘'봄날은 간다',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서 신인가수로 박탈되었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첫 곡은 밤비의 블루스 였으며 히트를 치자 대전부르스 순정의블루스 연락선불루스 이별의김포비행장 애정산맥 등 주로 블루스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하여 불렀으며 예명을 안정애로 하였고 또 다른 호칭은 “블루스의 여왕”이었다. 대전부르스 노래가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노래를 작사한 최치수는 10년간 열차 승무원을 하였으며 이후 작사자가 되었고, 신세기레코드사 직원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대전역 인근에서 숙박을 했다. 어느날 새벽 0시40분 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보슬비를 맞으며 슬픈 이별하는 모습을 보았고 남자는 천천히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0시50분 출발했고 여자는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끝까지 지켜 보아야 했다.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쓰라린 심정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그시절 열차와 역의 풍경을 잘 담아 가사를 만들었으며 승무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였다. 지은 노래를 김부해에게 전해주었고 김부해는 4/4박자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를 보면 가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주곡부터 나온다. 단번에 들어보면 완전 귀에 익어 대전부르스 곡이구나 알 수 있다. 최치수 작사자는 대전부르스 말고도 용두산엘레지 눈물도말렸오 사랑이냐 돈이냐등 많은 노래를 지었다 작곡가 김부해 역시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대전 부르스가 발표되자마자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음반은 출반 3일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소속사인 신세기 레코드는 야간작업을 강행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특별 상여금을 주었고 가수 작자사 작곡자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인기덕분인가 1963년 대전부르스는 대전발 0시50분 제목으로 영화로 나왔다. 이종기 감독 이성근 제작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엄앵란 남양일 김동원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음악은 김부해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 같이 독촉하지만 젊은 소위는 잊을수 없는 누님을 찾고 그 누님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위는 누님을 만난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누님이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이때 그에게는 전방 수색대장으로서의 임무가 떨어진다. 그는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슬픈 시나리오이다. 1980년 조용필 가수가 대전부르스를 조용필1집에 넣어 불렀으며 역시 히트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가 처음 부른 곡으로 생각했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당시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50년대~60년대에 잠깐 존재했던 열차로 서울역서 저녁 8시 45분에 출발,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한 뒤, 10분의 기관차 교대 시간을 거쳐 0시 50분에 목포역으로 가는 호남선 하행 마지막 열차였다. 그시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해였으며,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고 서울서 목포까지 완행열차를 탄 사람들 열차여행에 매우 힘들어 했으리라 본다, 완행열차 이제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되었지만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고 나 역시 추억이 있다. 그당시 목포는 부산항과 함께 일본,만주,사할린에서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귀향하던 귀향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한국 땅으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으며, 이들이 먹고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리고 몰리던 시대로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1960년 새벽 3시30분으로 열차시간표가 바뀌었다. 대전에 살고있는 나로선 신기했다. 조용필 가수로 인해 대중가요 제목에 대전이라는 이름의 제목이 있다니 주로 부산 목포 인천 서울 제주등 있지만 호기심을 자아냈고 2절까지 열심히 불러 배웠다. 그러나 나중에 안정애 가수가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어떤 가수인가 알게되었다. 1999년 대전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뉴스로도 나왔다.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 라고 써있었고 뒷면에는 대전 부르스 노래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가서 보았으며 멋지게 만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비에 가수 이름이 빠졌다. 안정애가수가 조용필 이름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만일 넣지 않는다면 내 이름마저 빼겠다고 강한 주장으로 넣지 않했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2016년 대전역 복합역사 건설때 노래비가 철거된 뒤 사라졌다.(개인 생각으로는 그 주변 어디에 있으리라 보며 확인 하려 함 몇 년전에 얼핏 본 기억이 있음) 2009년 당시 이장우 대전동구청장이 동구청 주최로 대전부르스 축제를 하였으며 구경 가보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축제였다. 그가 2022년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종의 프리퀄로 대전0시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나서 2023년 8월11일(금)부터 17일(목)까지 2023 대전0시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원도심인 동구 중앙로 길부터 시작하여 목척교 지나 충남도청 앞까지 성황리에 하였다. 본인도 매일 가서 구경하다 시피 하였고 최대로 즐길수 있을만큼 즐겼다. 그리고 유튜브를 제작하기에 그래도 하나 정도는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1편을 올렸다. 2024년 8월 9일~17일까지 진행한 대전0시 축제 나름대로 즐겼으며 생각지않게 상품도 탔다. 유튜버로서 블랙이글에어쇼 시간여행 퍼레이드 의 일부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후 가수 공연은 개인사정상 보질 못했다. 최치수 그가 대전에 도착하지 않고 다른 도시 역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니면 그시간 여관에서 잠을 잤다면 대전부르스는 나오질 못했으리라 본다. 최치수 김부해 안정애 그리고 조용필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전 미래 즐거움의 씨앗을 심어준 영웅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작사자 작곡자는 고인이 되셨지만 안정애 가수는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오래전 TV로 잠깐 본 기억은 있다. 계속 행사를 한다면 고령이지만 한번정도는 초청 해야 하며 조용필 가수도 초청 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행사 참가 때문에 대전부르스를 부른 젊은이들 구경한사람들 행사를 만든 공무원들 이노래가 언제 어떻게 누가 불렀는가 물어보고 싶다. 안정애라는 가수를 알고 있을까 . 마을신문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싶다. 작년 올해 축제를 보면서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을 여러번 하였으며 누구에게도 말을 하였다. 대중가요에 대전을 가사로 넣은 곡도 있다. 대표적으로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 못잊을 대전의밤’ 김혜연 가수가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남인수가 불렀던 울리는경부선 3절가사에도 나온다. 이 노래도 여러번 들어보았으며 울리는 경부선은 3절까지 알고 있지만 못잊을 대전의밤은 나와 정서가 맞지않은지 익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전의 상징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인가 대전부르스 꿈돌이와 함께 대전의 상징이다. 이번 0시 축제에서도 대전부르스 전국가요제를 별도로 열었다. 내년에 이 행사를 한다면 다시한번 재미있게 구경하련다. 가끔이나마 가요무대 혹은 유튜브를 통해 대전부르스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쉽다면 음악성이 전혀 없어 다루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룰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 독주라도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 기본 몇곡은 알고 있는데 안정애 가수가 불렀던 밤비의 블루스 등 2-3곡을 배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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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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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제헌절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과제 제헌절(制憲節)은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의원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만들어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에 의거해 제정된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올해 76주년을 맞았다. 제헌절은 제정될 당시부터 공휴일이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토요휴무일) 시행에 따라 2005년 6월 30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개정되면서 식목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미군정(3년)을 거쳤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국회의원 198명(제주도 2명은 선출 못 함)을 선출하고 5월 31일 제1대 국회가 개원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춰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이제까지 76년의 우리 헌정사는 제1차 발췌개헌으로 시작된 이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헌법개헌 등 총 9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수난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 원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실정법, 국내법, 공법, 실체법에 해당하며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모법이라고 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103조로 구성됐다. 국가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국민주권의 원리, 영토, 국제평화주의를 규정했다. 평등권과 더불어 다양한 자유권을 규정했고 노동3권,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 무능력자 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며,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했고,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탄핵재판소를 뒀다. 경제 질서에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부차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경성제국대학 3천재 중 한 사람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이제까지 9차례나 인위적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반영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보다 현실 적합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행헌법도 시공을 초월하지는 못해 앞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도록 일부 개정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떤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혁신, 정의, 안전, 인권, 상생, 평화통일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당하게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저항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와 애국심이 강해 4 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 10민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저항권을 꾸준히 강화했다. 국회는 제헌절(制憲節) 제76주년을 맞아 제헌(制憲)이념과 정신에 걸맞게 그 정신을 본받고 교훈 삼아 국회로서의 기능이 여,야 정쟁의 도구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든다든지 이용하면 안 되며, 국회의원도 특권을 내려 놓고 이젠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입법부의 국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일반 시민, 국가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현장 중심의 법교육과 정치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 준법정신과 사회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military coup)로 정권을 잡아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후퇴시키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 헌정을 유린한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구속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들에게는 포상과 보상을 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와 내란으로 정권을 잡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해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한 반민주 행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경축하고, 태극기의 올바른 게양과 관리를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 중이다. 제헌절에 태극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하고 날씨가 좋지 않아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지 않는다. 2. 제헌절 제76주년 경축행사 대한민국 국회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제헌 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제76주년 제헌절 경축식은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그리고 최재해 감사원장과 전직 국회의장, 정당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단, 헌정회원, 제헌국회의원유족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경축공연 1, 감사패 수여, 헌정회장 기념사, 국회의장 경축사, 경축공연 2, 제헌절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연하게 합의하는 만큼만 개헌을 추진하자”고 여야 정당에 제안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이를 위한 공식적인 개헌 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헌법의 가치를 기억하고 국회가 국민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주제영상 상영에 이어, 대한민국의 최극단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 경찰 및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영상합창단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경축합창단의 <내 나라 내 겨레> 합창이 진행되며, 참석자 전원이 ‘제헌절 노래’를 부르며 경축식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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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경축하며
- 세계천부경협회(회장:무상 이병희)가 우주 통합기운 창조와 환(桓)민족 혼(魂)의 부활을 목적으로 2013년 12월 13일(음력 11월 11일) 천부경 81자의 처음 구절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11을 마지막 구절인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에서 11을 취해 음력 11월11일을 세계천부경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음력 11월11일(양력 12월 25일) 오전 11시에 대전광역시 유성구 용계동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천부경협회 본부에서 임직원만 모여서 '한밭천천제'라는 주제로 조촐히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으나, 강화된 코로나19 정부 정책에 따라 12월 23일 전면 취소하기로 했다. 천부경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으뜸 경전으로 총 81자로 구성돼 있다.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匱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玅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은 숫자 6을 중심으로 상경 28자, 중경 24자, 하경 29자로 나누어진다. 천부경 81자 중 숫자가 31개, 그 31개 숫자 중 1이 무려 11개나 분포하여 천부경을 우주 수학의 원전, 일태극 경전이라고 한다. 천부경(天符經)은 하늘의 형상과 뜻을 숫자와 문자로 담아낸 조화경으로 우리 한민족 최고의 경전이지만, 아직까지 초중고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도 그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국내외서 천부경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2019년 12월 말 현재로 단행본이 130여 종 출간되었고, 학위논문이 77건(석사학위 54건, 박사학위 23건), 일반 학술논문이 199건이나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젊은 사람들도 천부경에 대해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조사연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천부경은 원래 9000년 전 고대 환국으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6000년 전 한국의 고대문자인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돼 전승됐다. 그 후 4400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는 전서(篆書)로 전해졌는데,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돌로 만든 비석에 전서로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하고 묘향산 석벽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옮겨 놓았다. 그런데 단학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하고『환단고기(桓檀古記)』를 지은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920) 선생이 1916년 9월 9일 묘향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석벽에서 천부경을 우연히 발견하고 탁본해서 1917년에 단군 교당으로 원문을 보내 세상에 알려졌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 81자는 상수학적으로 천(天) · 지(地) · 인(人) 삼원조화의 홍익철학(弘益哲學)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를 잘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우주 삼라만상이 1에서 나와 10까지 펼쳐졌다가 다시 1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 하늘(天) · 땅(地), 인간(人) 삼원이 모두 음양으로 작용해서 천지만물이 전개된다는 3수 원리와 음양 원리, 인간의 본심은 원래 태양처럼 밝고 환하여 천지(天地)와 하나가 된다는 태일사상(太一思想)을 담고 있다. 그런데 유사 이래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학자도 81자의 경문으로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와 인류 문화의 원형을 밝히지 못해 천부경은 동서양 학자들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시의 특징인 단순성, 비유성, 상징성, 애매모호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천부경을 소재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창조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천부경은 1975년에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대종교의 기본 경전으로 채택되었고, 성암(成庵) 전병훈(全秉薰, 1857-1927) 선생이 1920년 북경에서『정신철학통편』을 발간해 세계 29개국 약 150개 대학도서관에 보급하는 바람에 천부경이 국제화와 세계화가 되었다.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인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 1976)가 195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한 고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1957년 7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자기 집으로 초청해 천부경의 의미와 해설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박종홍 교수는 부끄럽지만 당시 서양철학 전공학자로 한국철학을 공부하지 않아 천부경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답을 하지 못해 한국 철학을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국학원과 증산도가 천부경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자주 개최하여 외국의 학자들도 천부경의 실체와 의미를 많이 알고 있다.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계기로 하여 천부경이 초·중·고의 교과서와 대학의 동양철학 교재에 게재되어 모든 국민들이 천부경의 실체를 잘 알고, 천부경의 삼원조화의 홍익철학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에 나름대로 기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음력 11월 11일 세계천부경의 날 기념행사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 국가 행사로 개최되고, 머지않아 천부경이 UNESCO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를 열망한다. <참고문헌> 1. 윤창대,『정신철학통편(전병훈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중심으로)』, 우리출판사, 2004. 6.20. 2. 안경전,「인류 역사의 원형문화 원전, 천부경」, 사단법인 대한사랑,『대한사랑』2019년 가을호, 상생출판, 2019.10.2. 3. 호연지기, 천부경을 전세계에 알린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알아두면 상식, 2020.8. 20. 4. 辛相龜,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맞아”, 중부매일, 2020.12.24일자.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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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다는 질환
- 우리가 아는 질환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도 평이하게 이해하는 어느정도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병들이다. 당뇨 고혈압 충수돌기(맹장)염 등등등과연 일반인이 잘 알고 있다는 이런질환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걸까? 당뇨의 진단 코드 즉 당뇨의 종류만도 2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환자는 왜 분류를 했는지는 설명이 없으면 환자는 그저 당뇨일뿐이다.결국 처방에 따른 병만 있을 뿐이다.환자나 보호자도 처방을 듣는게 편하다. 200가지 넘는 분류 이유는 있지만 그곳은 전문 내분비 의사에게도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숙제는 미래의 세대에게 남겨 놓은것 처럼 엄청난 분류가 남겨져 있다. 현대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반도체도 하루가멀다하고 새로운 제품 업그레이드된 상품이 나온다.핸드폰도 자동차도 등등등우리는 미시 세계 ,또한 거시세계를 같이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이해 하는척 또 아는척 하고 있다. 과거를 돌이겨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건 없다 .인간의 몸은 없어진것도 새로 생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 세계는 더 불안해져있다. 자신의 몸은 그대로 인데 정신세계는 왜 다른 현상을 보일까?새로운걸 찿기 때문인거 같다. 병에 걸리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새로운 좋은 음식 새로운 좋은 습관 새로운 좋은 환경 등등죽을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중에 잘못된것을 들을려고하고 고칠려고 한다. 그게 이유이건 아니건 관계없이많은 정보는 있지만 앞으로는 그정보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구조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즉 모든 정보가 공유 형태로 넘어가고 있다그래서 이제는 인터넷 한줄의 글로 사람들에게 들은 말로 모두가 전문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 전문으로 생각할줄 아는이들은 묻혀간다실제로는 우리가 아는 질환에 대해 알 능력도 안되면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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