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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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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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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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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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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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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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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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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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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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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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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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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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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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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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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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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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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맹모삼천지교
- 예전 어느 일간지에서 역 맹모삼천지교 칼럼을 읽었다. 신선한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감동을 받았다.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만 산다는게 다는 아니며 아무리 열약한 환경일지라도 슬기롭게 잘 이용하여 배울 것은 배우면서 극복하면 더욱 좋다는 내용이다. 맹자의 어머니 급씨가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그러나 열약한 환경이 부정으로만 볼수 있는가 첫 번째 이사한 곳이 공동묘지 근처였다. 어린 맹자는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서 교육 시킬곳이 아니구나 한탄하여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인하여 공동묘지가 거의 사라졌지만 과거엔 공동묘지가 많았다. 공동묘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례를 한다. 장례 행위를 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생각 해본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삶을 살으려고 노력 했는가. 또는 외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이 위선적인 삶을 가지지 않는가 혹은 부와 명예는 없지만 가치있는 진정한 삶을 살았는가.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 시장이었다. 어린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도 아니구나 하고서 학교근처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시장 사전적 정의로는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정한 장소 또는.상품으로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범위나 영역이다. 즉 장사하는 사람들과 사려하는 소비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시끄러운 환경이 반드시 따라다닐 수 밖에 없는 장소이다. 과연 시장은 아동 교육에 꼭나쁘다고 볼 수 있는가 ? 그속에서 사람들의 어울림 사람 사는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시장은 경제의 축소이다. 그나라의 경제를 보려면 시장을 가보라고, 사람은 경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현자라도 말이다. 노동의 중요성을 깨닭고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정당한 재화를 올바르게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낭비적인 재화 사용은 안되며, 노동 없이 벌어오는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은 엄청난 죄이다. 이런 재화는 쉽게 나가버린다. 사람은 좋은 조건을 가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게 원칙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가 종종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부닺치기 마련이다. 부딪친다해서 그냥 주저 앉을 수 없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헤쳐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그렇다고서 맹자의 어머니가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며 맹자를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한 어머니 속에서 자란 맹자가 위대한 현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폭 넓게 생각해볼 필요 있다. 다시말해 정신과 물질을 잘 음미 할 필요가 있으며, 않좋은 환경속에서 자랐다고서 반드시 잘못되는 것도 아니며 극복 잘해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진화론 과학자인 다윈은 종의기원에서 살아남는 종은 힘이 센 종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종이라고 하였다. 자녀들을 위한 진전한 교육 지식을 많이 배우게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적응력을 가르치는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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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맹모삼천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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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진행형 신탄진
- 신탄진은 나름대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신탄진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땐 전매청(지금 KT&G)에서 파고다 아리랑 신탄진 은하수라는 이름 가진 담배들이 나왔다. 정부에서는 1965년 신탄진에 연초제조창(지금 KT&G)을 만들었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정한 모양인 것 같다. 대전에 살면서 신탄진 지명소리를 많이 들었고 담배가계 보면 신탄진담배를 많이 보았고 담배심부름도 했으니 잊을수가 없다. 옛 지명은충남 대덕군 북면으로 불렸다가 1973년 7월1일자로 신탄진읍으로 바꾸었다. 그때 우리집에 전화국서 발행한 충청남도 전지역 전화번호부가 있었기에 즐겨보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신탄진 전화번호를 열심히 보았다. 전화번호는 국이없는 2자리와 3자리 였고, 석봉리에 사는 주민들만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한 곳만이 평촌리만 적혀있었고 연초제조창으로 기억하고 있다. 석봉리와 평촌리만 있고 다른 리는 없는 지역인가 생각했다. 대전에서 신탄진 가는 방법은 좌석버스였고 요금은 3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 성인기분 15원인가 20원) 버스는 많지 않았다. 1973년 아버지는 이모부 친척의 도움으로 신탄진서 포도농사를 지으셨다. 어느날 나랑 동생이랑 함께 포도밭에 갔다. 남경마을 안으로 들어갔더니 드넓은 포도밭이 보였다. 지금은 주택 공장지대로 바뀌었다. (712번 버스 종첨) 남경마을 버스정류장 자리에서 신탄진역이 보이길래 걸어가보자고 하여 같이 걸어갔고 역 옆에 육교가 있어 올라갔다. 어느 할머니가 들고있는 짐을 같이 내려달라고 하여 도와주었다. 신탄진역안 철길을 바라보니 마침 화물열차가 지나가고있었다. 역무원 2명이 양쪽 폴랫포옴에 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동생은 어린 나이라 힘들어 했다. 포도밭으로 되돌아와서 동네아이들과 놀았고 해질 무렵 아버지는 식구들과 먹으라고 많은 포도를 따서 보자기에 담아주셨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버지가 바래다 주었는데 원동시장에서 내려 보따리 들고 집까지 가느라 힘들었다. 이후로는 신탄진에 가질 않했다. 80년 통일호 열차타고 서울가는데 신탄진역에서 섰으며, 사람들이 제법 탔다. 신탄진에서도 통일호도 서는가 생각했다. 80년대 대청댐을 신탄진을 통해 여러번 갔지만 무관심했다.KT&G에서는 지금처럼 벚꽃 놀이를 했으며 2번 정도 가보았다 본격적으로 신탄진을 가게 된 계기는 인사발령 때문이었다. 2006년에 동구에서 살다가 법동으로 이사와 대덕구민이 되었고 2007년 1월1일자로 연기군 동면(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에 있는 중학교로 발령받았기에 신탄진을 거쳐가야했다. 신탄진에서는 1시간 간격으로 조치원가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아침 7시 55분 첫버스 타고 다녔다. 조치원 전의 연서지역에서 근무할땐 신탄진역서 기차타고 다녔다. 연기군이 2012년 7월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되어 충남지역으로 발령 않받아 퇴직할때까지 계속 신탄진을 거쳤다. 가끔 휴일에는신탄진 시장 로하스공원 수영장 대청댐 대청공원 신탄진공단 등등 친숙해지려고 다녔다. 퇴직 후 유튜버가 되어 신턴진의 다양한 볼거리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으며, 대덕마을신문명예기자가 되어 (구) 신탄진도서관에 가서 취재도 하였고 정보검색과 독서를 하고강좌도 들었다. 지금은새로 지은 석봉도서관이 대신하고 있다. 대덕구 주최로 신탄진서 하는대청호 고래축제와 기타 다양한 행사에 참가 하였다. 최근 대덕국민체육센터에서 새마을 지도자 대회 참석하였으며,새마을 유공자로 인정받아 구의장상을 받았으며 다양한 놀이와 함께 경품추첨을 잘하여 많은 상품을 받았다. 추억진행형이되어버린 신탄진 좋은 추억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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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진행형 신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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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 1956년 가수 안정애(본명 안순애)는 신곡 대전부르스를 발표 하였다 “잘 있거라 나는간다 이별의 말도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50분” 시작되는 노래로 2절까지 있으며 작사 최치수 작곡 김부해이다. 안정애가수를 간략히 소개하면 1936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대의원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였으며 부유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녀가 가수가 된 동기는 집 근처가 터미널이 었는 입지적 조건덕에 지방공연을 자주 보아,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꿈을 실현하려고 서울에 상경하였지만 성과가 없어 하동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시 상경 하여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부른 가수 고복수(처 황금심가수 아들 고영준가수)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악착같이 배웠으며 신인 선발무대에 나가서 송민도 '카츄사의 노래', 백설희‘'봄날은 간다', 나애심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불러서 신인가수로 박탈되었다. 작곡가 김부해에게 취입곡을 받아 음반을 내게 되었으며 그녀의 첫 곡은 밤비의 블루스 였으며 히트를 치자 대전부르스 순정의블루스 연락선불루스 이별의김포비행장 애정산맥 등 주로 블루스가 들어가는 제목으로 하여 불렀으며 예명을 안정애로 하였고 또 다른 호칭은 “블루스의 여왕”이었다. 대전부르스 노래가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노래를 작사한 최치수는 10년간 열차 승무원을 하였으며 이후 작사자가 되었고, 신세기레코드사 직원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대전역 인근에서 숙박을 했다. 어느날 새벽 0시40분 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보슬비를 맞으며 슬픈 이별하는 모습을 보았고 남자는 천천히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0시50분 출발했고 여자는 열차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끝까지 지켜 보아야 했다. 정말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쓰라린 심정이란 말인가. 보자마자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서 그시절 열차와 역의 풍경을 잘 담아 가사를 만들었으며 승무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을 하였다. 지은 노래를 김부해에게 전해주었고 김부해는 4/4박자 곡으로 만들었다. 악보를 보면 가사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주곡부터 나온다. 단번에 들어보면 완전 귀에 익어 대전부르스 곡이구나 알 수 있다. 최치수 작사자는 대전부르스 말고도 용두산엘레지 눈물도말렸오 사랑이냐 돈이냐등 많은 노래를 지었다 작곡가 김부해 역시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대전 부르스가 발표되자마자 인기는 하늘높이 올라갔다. 음반은 출반 3일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소속사인 신세기 레코드는 야간작업을 강행하였으며 직원들에게도 특별 상여금을 주었고 가수 작자사 작곡자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었다 인기덕분인가 1963년 대전부르스는 대전발 0시50분 제목으로 영화로 나왔다. 이종기 감독 이성근 제작 최무룡 이민자 최지희 신성일엄앵란 남양일 김동원 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음악은 김부해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성화 같이 독촉하지만 젊은 소위는 잊을수 없는 누님을 찾고 그 누님의 축복 속에 약혼식을 갖는 것이 소원이어서 하루 하루를 미루어 온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위는 누님을 만난다. 만남의 기쁨은 잠시 누님이 빠의 여급으로 전락했을 줄이야. 이때 그에게는 전방 수색대장으로서의 임무가 떨어진다. 그는 살아 있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임무를 수행한다는 슬픈 시나리오이다. 1980년 조용필 가수가 대전부르스를 조용필1집에 넣어 불렀으며 역시 히트를 쳤고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이가 처음 부른 곡으로 생각했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당시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50년대~60년대에 잠깐 존재했던 열차로 서울역서 저녁 8시 45분에 출발,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한 뒤, 10분의 기관차 교대 시간을 거쳐 0시 50분에 목포역으로 가는 호남선 하행 마지막 열차였다. 그시절은 6.25전쟁이 끝난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해였으며, 가난한 나라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려고 악착같이 발버둥을 쳤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었고 서울서 목포까지 완행열차를 탄 사람들 열차여행에 매우 힘들어 했으리라 본다, 완행열차 이제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가 되었지만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이 서려있고 나 역시 추억이 있다. 그당시 목포는 부산항과 함께 일본,만주,사할린에서 북한을 피해 남한으로 귀향하던 귀향민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한국 땅으로 인구가 엄청나게 늘었으며, 이들이 먹고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몰리고 몰리던 시대로 서울과 목포를 오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1960년 새벽 3시30분으로 열차시간표가 바뀌었다. 대전에 살고있는 나로선 신기했다. 조용필 가수로 인해 대중가요 제목에 대전이라는 이름의 제목이 있다니 주로 부산 목포 인천 서울 제주등 있지만 호기심을 자아냈고 2절까지 열심히 불러 배웠다. 그러나 나중에 안정애 가수가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어떤 가수인가 알게되었다. 1999년 대전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뉴스로도 나왔다. 노래비 앞면에는 대전 사랑 추억의 노래비 라고 써있었고 뒷면에는 대전 부르스 노래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가서 보았으며 멋지게 만들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비에 가수 이름이 빠졌다. 안정애가수가 조용필 이름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만일 넣지 않는다면 내 이름마저 빼겠다고 강한 주장으로 넣지 않했다. 그러나 이 노래비는 2016년 대전역 복합역사 건설때 노래비가 철거된 뒤 사라졌다.(개인 생각으로는 그 주변 어디에 있으리라 보며 확인 하려 함 몇 년전에 얼핏 본 기억이 있음) 2009년 당시 이장우 대전동구청장이 동구청 주최로 대전부르스 축제를 하였으며 구경 가보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축제였다. 그가 2022년 대전시장에 당선되어 10월 7일부터 10일까지 일종의 프리퀄로 대전0시 뮤직페스티벌을 열었다. 그리고나서 2023년 8월11일(금)부터 17일(목)까지 2023 대전0시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으며 원도심인 동구 중앙로 길부터 시작하여 목척교 지나 충남도청 앞까지 성황리에 하였다. 본인도 매일 가서 구경하다 시피 하였고 최대로 즐길수 있을만큼 즐겼다. 그리고 유튜브를 제작하기에 그래도 하나 정도는 올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1편을 올렸다. 2024년 8월 9일~17일까지 진행한 대전0시 축제 나름대로 즐겼으며 생각지않게 상품도 탔다. 유튜버로서 블랙이글에어쇼 시간여행 퍼레이드 의 일부는 유튜브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녁 7시 이후 가수 공연은 개인사정상 보질 못했다. 최치수 그가 대전에 도착하지 않고 다른 도시 역에서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니면 그시간 여관에서 잠을 잤다면 대전부르스는 나오질 못했으리라 본다. 최치수 김부해 안정애 그리고 조용필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대전 미래 즐거움의 씨앗을 심어준 영웅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않된다. 작사자 작곡자는 고인이 되셨지만 안정애 가수는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오래전 TV로 잠깐 본 기억은 있다. 계속 행사를 한다면 고령이지만 한번정도는 초청 해야 하며 조용필 가수도 초청 해야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행사 참가 때문에 대전부르스를 부른 젊은이들 구경한사람들 행사를 만든 공무원들 이노래가 언제 어떻게 누가 불렀는가 물어보고 싶다. 안정애라는 가수를 알고 있을까 . 마을신문기자 자격으로 취재하고 싶다. 작년 올해 축제를 보면서 이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축제를 즐길 수 있을까 생각을 여러번 하였으며 누구에게도 말을 하였다. 대중가요에 대전을 가사로 넣은 곡도 있다. 대표적으로 안다성 가수가 불렀던 ‘ 못잊을 대전의밤’ 김혜연 가수가 불렀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남인수가 불렀던 울리는경부선 3절가사에도 나온다. 이 노래도 여러번 들어보았으며 울리는 경부선은 3절까지 알고 있지만 못잊을 대전의밤은 나와 정서가 맞지않은지 익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대전의 상징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란 말인가 대전부르스 꿈돌이와 함께 대전의 상징이다. 이번 0시 축제에서도 대전부르스 전국가요제를 별도로 열었다. 내년에 이 행사를 한다면 다시한번 재미있게 구경하련다. 가끔이나마 가요무대 혹은 유튜브를 통해 대전부르스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쉽다면 음악성이 전혀 없어 다루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룰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 독주라도 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가수들의 노래 기본 몇곡은 알고 있는데 안정애 가수가 불렀던 밤비의 블루스 등 2-3곡을 배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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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숨은 영웅 안정애, 최치수, 김부해를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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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1. 제헌절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당면과제 제헌절(制憲節)은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의원들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 공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만들어진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53호에 의거해 제정된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올해 76주년을 맞았다. 제헌절은 제정될 당시부터 공휴일이었으나 주 40시간 근무제(토요휴무일) 시행에 따라 2005년 6월 30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개정되면서 식목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됐고, 미군정(3년)을 거쳤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로 국회의원 198명(제주도 2명은 선출 못 함)을 선출하고 5월 31일 제1대 국회가 개원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을 제정하고 조선왕조 건국일인 7월 17일에 맞춰 자주독립의 떳떳한 민주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공포했다. 그리고 8월 15일 새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다. 그 후 이제까지 76년의 우리 헌정사는 제1차 발췌개헌으로 시작된 이래 사사오입 개헌, 3선 개헌, 유신 헌법개헌 등 총 9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수난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 원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으로 실정법, 국내법, 공법, 실체법에 해당하며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모법이라고 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받은 제헌헌법은 전문 10장 103조로 구성됐다. 국가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국민주권의 원리, 영토, 국제평화주의를 규정했다. 평등권과 더불어 다양한 자유권을 규정했고 노동3권, 사기업에서 근로자의 이익분배균점권, 생활 무능력자 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을 규정했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합한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며, 국무총리는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국회는 단원제로 했고, 대법원장은 국회 승인을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진 헌법위원회와 탄핵심판을 담당하는탄핵재판소를 뒀다. 경제 질서에서는 사회정의 실현을 기본으로 삼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부차적인 요소로 규정했다. 경성제국대학 3천재 중 한 사람인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박사가 기초한 제헌헌법은 이제까지 9차례나 인위적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됐지만,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반영돼 현행 헌법은 제헌헌법보다 현실 적합성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그러나 현행헌법도 시공을 초월하지는 못해 앞으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하도록 일부 개정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떤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 자세나 태도를 말한다. 혁신, 정의, 안전, 인권, 상생, 평화통일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도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정권을 연장할 목적으로 부당하게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국민들의 저항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욕구와 애국심이 강해 4 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 10민주항쟁, 촛불혁명을 통해 저항권을 꾸준히 강화했다. 국회는 제헌절(制憲節) 제76주년을 맞아 제헌(制憲)이념과 정신에 걸맞게 그 정신을 본받고 교훈 삼아 국회로서의 기능이 여,야 정쟁의 도구로 법을 마구잡이로 만든다든지 이용하면 안 되며, 국회의원도 특권을 내려 놓고 이젠 국민이 원하고 바라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입법부의 국회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헌헌법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학생, 일반 시민, 국가공무원, 정치인,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 현장 중심의 법교육과 정치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 준법정신과 사회정의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정치군인들이 쿠데타(military coup)로 정권을 잡아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후퇴시키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테면 민주 헌정을 유린한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구속돼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거나 목숨을 잃은 민주열사들에게는 포상과 보상을 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쿠데타와 내란으로 정권을 잡고 폭압적인 독재정치를 해 인권을 유린하고 탄압한 반민주 행위자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법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경축하고, 태극기의 올바른 게양과 관리를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자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추진 중이다. 제헌절에 태극기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깃봉과 깃면 사이를 떼지 않고 달아야 하고 날씨가 좋지 않아 국기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게양하지 않는다. 2. 제헌절 제76주년 경축행사 대한민국 국회는 제76주년 제헌절을 맞아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제헌 76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제76주년 제헌절 경축식은 국회의사당 중앙홀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조희대 대법원장,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한덕수 국무총리,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그리고 최재해 감사원장과 전직 국회의장, 정당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의원,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인사, 주한외교사절단, 헌정회원, 제헌국회의원유족회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국민의례, 경축공연 1, 감사패 수여, 헌정회장 기념사, 국회의장 경축사, 경축공연 2, 제헌절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경축사에서 “2026년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연하게 합의하는 만큼만 개헌을 추진하자”고 여야 정당에 제안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이를 위한 공식적인 개헌 대화를 제안했다. 또한, “국민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갈등을 조정·중재하는 ‘사회적 대타협, 패키지딜’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구하고 평화의 기반을 만드는 외교에도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헌법의 가치를 기억하고 국회가 국민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담은 주제영상 상영에 이어, 대한민국의 최극단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군인, 경찰 및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영상합창단을 배경으로 뮤지컬 배우 정선아와 경축합창단의 <내 나라 내 겨레> 합창이 진행되며, 참석자 전원이 ‘제헌절 노래’를 부르며 경축식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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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76주년을 경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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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8민주의거 제64주년을 경축하며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3.8민주의거 제64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대전 3·8민주의거는 제4대 3.15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부정부패하여 선거 부정을 저지르자 박제구(朴濟求, 대전고 대대장, 83세), 최정일(崔正一, 대전고 규율부장, 81세), 홍석곤(洪錫坤, 대전고 부 대대장, 81세), 고 박선영(朴先榮, 대전고 운영위원장, 2018년 작고), 채재선(蔡載善, 대전상고 대대장, 84세)등 혈기 왕성한 대전지역 고등학교 학생 1600여명(대전고 학생 1000여명, 대전상고 학생 600여명)이 경찰의 밀착 감시와 폭압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와 자유, 정의를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1960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사흘간 자유당 독재정권의 횡포와 부패, 불법적 인권유린에 대항해 항거한 충청도 최초의 학생운동이자 민주화 운동이다. 수많은 학생이 총개머리판과 방망이로 얻어맞았고, 교복·교모·신발·소지품 등 잃어버린 물건이 수없이 많았으며, 논바닥에 가두어 놓은 인분통에 빠지고 넘어져 곤경에 처하거나 상처가 난 경우도 허다했다. 급기야는 100여명의 학생과 대전고의 조남호(趙南浩, 95세)와 금종철(琴鍾哲) 교사가 수갑을 차고 곤봉세례를 받으며 경찰서로 연행되고 구속되어 고초를 당했다. 대전 3·8민주의거는 대구의 2·28민주운동, 마산의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어 역사적 교훈과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러나 대전 3·8민주의거는 2·28대구민주화운동, 마산3·15의거에 비해 저평가되어 2018년 11월 2일이 되어서야 충청권 최초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좀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3·8민주의거 정신인 자유, 정의, 민주를 대전·세종·충남·충북의 정신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고 3.8민주의거의 역사적 가치를 전국적으로 홍보하여 지역사회 및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2020년 11월 사업비 167억 원을 확보하고 현재 최종 설계단계를 거쳐 2023년 2월 대전 중구 선화동에 착공해 2024년 9월 준공 개관할 예정인 3.8민주의거 기념관을 차질 없이 성공적으로 건립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가 2000년에 창립되는 바람에 무려 40년간 3.8민주의거 관련 사료가 방치되다시피 했고, 3.8민주의거 기념사업이 3.8민주의거 기념관 건립과 3·8민주의거 역사거리 조성 등 외형적인 것에 너무 치우치다 보니 3.8민주의거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과 참여 수준이 낮으며, 3.8민주의거 참여 학생 1600명 중 300여명이 노쇠하거나 병이 들어 이미 타계하여, 3.8민주의거 기념관에 전시할 사료를 수집하고 전시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신문과 방송, 전국 초·중·고의 3.8 관련 계기교육을 통해 3.8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충청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널리 알리고 홍보해 3.8의거 정신인 자유, 정의, 민주를 대중적이고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3.8민주의거로 희생된 수많은 학생과 애국 시민들 중에서 2024년 3.8일 현재 단 11명(대전고 박제구․박선영․홍석곤․최정일 등 4명, 대전상고 쵀재선․이학수․이안재․정한웅․장태익․이효석․홍무득 등 7명)만이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대구 2.28 민주운동 유공자 수는 17명, 마산 3.15의거 유공자 수는 85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대전 3.8민주의거 유공자 수가 가장 적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대전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가 앞으로 3.8민주의거 희생자를 전수 조사하고 방송국과 신문사에 소장되어 있는 3.8관련 기록을 열람해 더 많은 근거자료를 수집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2. 한밭대학교 아트홀에서 제64주년 3·8 민주의거 기념식 개최 대전·충청권 최초의 학생 저항운동인 3·8민주의거 64주년 국가 기념행사가 2024년 3월 8일 오전 10시, 한밭대학교 아트홀에서 ‘정의의 들꽃으로 빛나리라’ 라는 주제로 한덕수 국무총리, 3·8민주의거 주역과 유족, 각계 대표와 학생 등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지역 학생들의 합창, 드로잉 영상, 헌시 낭독 순서로 개최되었다. 제64주년 3·8 민주의거 기념식에 앞서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초청받은 대표적인 내빈들은 둔지미공원에 위치한 3.8민주의거 기념탑에서 참배를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3․8민주의거 64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3·8민주의거 유공자와 가족 여러분, 이장우 대전시장님을 비롯한 내외 귀빈 여러분, 3·8 민주의거 64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를 함께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먼저, 유공자분들과 가족 여러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오랜 기간 3·8 민주의거 정신을 이어오신, 김용재 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이곳, 대전의 3.8민주의거는 3.15의거와 4.19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대전의 고등학생들이 중심으로 이뤄진 의거는 이번 행사의 구호처럼 지금도 ‘정의의 들꽃’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여 한층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야 합니다. 우리 정부는 3·8 정신을 받들어 자유롭고 정 의로운 나라를 이루어 나가겠습니다. 더욱 평화롭고 번영하는 선진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국학박사 신상구 약력> .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출생 .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 경제학사, 충남대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 석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국학박사 2호 .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민속학자, 칼럼니스트 . 통일문학상, 전국 향토문화 논문공모 대상(국무총리상) 수상 . 학술논문「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 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등 127편. . 대표 저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도서출판 근화, 2019.3.15) 『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전략』(도서출판 대흥사,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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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8민주의거 제64주년을 경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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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정월대보름 맞이 대동 장승제 봉행을 경축하며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민속학자) 대산(大山) 신상구(辛相龜) 1. 장승의 유래와 기능 지난 1983년에 국립 광주박물관 이종철 학예연구실장(李鍾哲, 40)이 마을의 재앙과 도둑을 막아주는 액막이 장승에 대한 전국적인 규모의 체계적인 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해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는 전국 1백87개 소의 장승에 대해 지역분포, 명칭, 형태, 신앙적 요소를 비교조사한 연구를 했다. 신석기 때부터 유래된 장승은 돌하르방, 우성목, 벅수, 대장군, 솟대, 당산, 돌탑, 수사리 등으로 불리운다. 장승은 신라․고려 때에는 장생(長生)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중기까지는 생(栍)으로 불려졌다. 조선중기 이후는 장승(長丞)으로 변했다가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후(堠)의 명칭이 나타나기도 했다. 장승은 전라도에서는 액막이와 마을수호의 기능을, 경상도 지역에서는 마을수호와 부락안녕 외에 사성(寺城) 수호의 기능도 한다. 충북과 강원, 경기 지방에서는 잡귀방지의 기능이 특이하며 제주도에서는 귀신을 쫓는 기능이 단연 으뜸이다. 2. 장승의 기원과 제의 장승의 기원은 부족간의 경계의 표시로 산이나 들 가운데 돌이나 나무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초에는 농경이 시작되면서 뚜렷한 구역정착 표지로 바뀌고 청동기 시대에 와서는 솟대, 서낭당(石積), 누석(累石)으로, 철기시대에는 풍농, 다산을 바라는 동제신(洞祭神)으로 발전되었다. 장승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그에 얽힌 속신(俗信)과 제의(祭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기도에서는 장승 앞에서 세탁 욕설 음행 살인 등을 삼가고 있으며 바느질을 하면 곰보가 생기고 개의 피를 대문에 바르면 역신이 못 들어온다고 믿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장승 앞에 밥상을 차려 바치고 냉수와 떡을 올려 배례를 한 뒤 짚으로 만든 사람을 대신으로 바친다. 또 그믐 전날밤 동네사람들이 주인 모르게 나무를 훔쳐 베어다가 아침에 톱 자귀 끌 등으로 남녀 한쌍의 장승을 조각한다. 장승에 대해 제사를 올리는 의식은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이 목욕재계한 후에 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장승제 봉행 시기로는 정월초하루에서 보름사이가 68%로 가장 많으며 10월 1일에서 15일 사이는 15%로 분석 집계됐다. 우리나라의 장승문화가 이렇듯 유사 속의 상이를 갖는 이유는 민간신앙이 토속적이고 지역발생적이며 비조직적인 전승이어서 특정한 마을이나 주민의 생활관습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인간본연의 종교적 욕구를 그대로 허식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대동 장승제의 연혁과 목적 및 형식 대전의 경우 장승제는 대동, 용운동, 소제동, 비룡동, 주산동, 법동, 용호동, 읍내동(뒷골 장승제, 당아래 장승제) 등 9군데에서 정월 대보름 맞이 행사의 일환으로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대동 장승제는 일제시대부터 대동 노인회 주관으로 개최되어 오다가 지난 1988년부터는 대동 대동교(1938년 준공) 옆 장승터에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 오후 6시 경에 대동장승제봉양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되고 있다. 대동 장승터는 대전광역시 동구 원동 4거리에서 대동 오거리(지하철 대동역) 방향으로 가다가 대동교를 지나 우측에 있는 새들뫼휴먼시아아파트단지 104동 앞 대동천변 시멘트 포장도로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대동 장승터에는 부정형 자연석 석장승 2기(天下大將軍, 地下女將軍), 돌로 돤 직사각형 제상(祭床), 정자, 대동 장승제 안내문 시설물 등이 위치해 있다. 석장승 2개의 위치는 천안대장군이 좌측, 지하여장군이 우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2024년 2월 24일 현재 대동장승제봉양위원회는 31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위원장은 최주용(崔周龍, 1948)이 맡고 있다. 2024년 대동 장승제는 정월 대보름 하루 전 날인 2월 23일 오후 6시부터 약 50분 간 대동 주민과 동사무소 직원 등 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검소하게 개최되었다. 주요 참여 인사로는 윤창현(尹暢賢, 1960) ․ 장철민(張喆敏, 1983) 대전 동구 국회의원, 박희조(朴熙朝, 1968) 대전 동구청장, 황인호(黃仁滈, 1958) 대전 전 동구청장, 박철용(朴哲用, 1981) ․ 김세은(金世恩, 1975) 대전 동구의회 의원, 전동배(全東培, 1968), 대동 동장, 신상구(辛相龜, 1950)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등을 들 수 있다. 2023년 대동 장승제는 코로나 사태가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아 식전 행사 없이 본 행사인 제의만 올려졌다. 홍보 미흡과 흐리고 싸늘한 날씨로 인해 대동 주민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나 대동 장승제가 춘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잇고, 주민들의 대동화합을 도모하며, 대동의 무궁한 번영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동 장승제 제의는 해마다 홀기에 따라 유교식으로 올리고 있다. 2024년 대동 장승제의 초헌관은 최주영 대동장승제봉행위원장, 아헌관은 신영국 주민자치위원장, 종헌관은 윤덕진 대동 노인회 감사, 축관과 창홀기(진행)는 안상신 전 주민자치위원장, 집사는 오일균 봉행위원회 총무가 맡았다. 제물로는 사과, 배, 밤, 대추, 곶감, 북어, 시루떡, 돼지머리 등이 있다. 대동 장승제가 몆 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지난 1935년 1월 20일 송석하님이 촬영한 사진 기록과 민속사진 특별전도록에 수록되어 있는 첫 기록으로 보아 2024년이 89주년이 되는 해로 볼 수 있다. 2024년 대동 장승제는 동구청에서 예산 100만 원(2000년 30만 원, 2010년 50만 원, 2016년 70만 원, 2023년 100만 원)을 지원받아 본 행사인 제의만 조촐하게 봉행되었다. <참고문헌> 1. “장승은 신석기때부터 유래-光州박물관 李鍾哲씨 첫 체계적 硏究”, 경향신문 1983.3.7일자. 7면. 2. 양영선, “정월대보름 대동 장승제 봉행, 주민 안녕 기원”, 사람 향기 소식 담은 마을신문, 2015.3.9일자. 3. 조명휘, “대전시 곳곳서 대보름행사 풍성”, 뉴시스 대전/충남, 2016.2.18일자. 4. 김성룡, “대전 동구, 7곳에서 정월대보름 행사 열려”, 대전경제신문, 2016.2.16일자. 5. (사)대전문화유산울림, 2019년 대전의 정월대보름 민속행사(46곳) 안내, 2019.2.15. 6. 신상구, "대전 동구 '대동 장승제' 속으로", 중부매일, 2023.2.7일자. <도움말 주신 분> 1. 2023.2.4-2.5일/2024.2.23일 대동장승제봉행위원장 최주용(崔周龍, 1948) 대동장승제봉행위원장 증언. 2. 2023.2.4일 국민의힘 윤창현(尹暢賢, 1960) 비례대표 대전 동구 국회의원 증언. 3. 2023.2.4일 국민의힘 박철용(朴哲用, 1981) 대전 동구의회 의회운영위원장 증언. 4. 2023.2.4일/2024.2.26일 더불어민주당 김세은(金世恩, 1975) 대전 동구의회 도시복지위원장 증언. 5. 2024.2.23일 대전 동구 대동 행정복지센터 김선무(金善茂, 1992) 총무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주요 약력> .1950년 6월 26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부친 신종순(辛鍾淳), 모친 유옥임(兪玉任)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2)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8)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학교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3.15),『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 전략』(2023.12.28) 등 5권. .주요 논문 :「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2010),「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2012) 등 127편 .주요 발굴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수상 실적 : 예산군수 감사장, 대천시장상(2회), 천안시장상(2회),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한통국문화원연합회장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2회) 교육부장관상(푸른기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문학 21』시부문 신인작품상,『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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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정월대보름 맞이 대동 장승제 봉행을 경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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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마을신문에 사랑의 손길을
- 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동안 대덕마을신문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정종한 이사장과 기자, 후원인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대덕마을신문은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사람 냄새나는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기관이나 단체의 지원금이나 광고 수익 없이 오로지 정종한 이사장의 사비로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어려움에 놓여 있는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무보수로 취재에 열정을 쏟는 기자들의 아름다운 봉사와 온정어린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존재 또한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1년 7개월의 연륜을 가진 신문이지만 16면에 10000부를 인쇄할 정도로 마을신문으로서는 보기 드문 면수와 부수,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양이 많아도 독자가 외면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적은 양이라도 독자가 기다리는 내용, 보고 싶은 내용이 많이 실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자가 만드는 신문에서 독자가 만드는 신문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제게 어울리지도 않을 사장 제의를 11월에 수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존폐의 갈림길에 있는 대덕마을신문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마을신문이 있지만 어려움을 겪지 않는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의 지혜를 모아 이겨내겠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문 발행에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 기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마을신문이 있다는 자긍심을 잊지 마시고 힘을 보태 주었으면 합니다. 사장인 저 또한 사장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영업 사원이라는 자세로 대덕마을신문이 빛을 볼 수 있도록 모든 열정을 바치겠습니다. 대덕마을신문은 대덕구민의 희생과 봉사,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대덕구민의 사랑과 열정이 없다면 마을신문 또한 없을 것입니다. 힘들게 버티고 있는 마을신문이지만 반드시 빛을 볼 것이라 믿습니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으로 볼 수 없기에 고통을 고통이 아닌 과정으로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끝으로 지면 신문으로서의 한계를 넘고 다양성과 확장성을 고려, 대덕마을신문과 연계한 온라인 언론매체인 대전뉴스온에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셨으면 합니다. 인터넷에서 ‘대전뉴스온’을 접하시면 지역 언론 매체답지 않은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으니 뜨거운 사랑을 주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지방신문의 어려움을 이해하시고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하게 호소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대덕마을신문, 대전뉴스온 사장 이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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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기후 그리고 인간생활
- ▶사진제공(구글 이미지)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 심지어는 기후비상이라는 말로 그 심각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문은 이번 호부터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기획으로 다룹니다. ■ 날씨와 기후는 어떤 차이일까 일기라고도 하는 날씨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그날그날의 기상상태입니다. 주로 기온, 습도, 바람, 햇빛, 비, 구름의 양과 형태 등에 따라 결정됩니다.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며, 지역마다 시간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기후는 기온, 습도, 바 람, 햇빛, 비, 구름의 양과 형태 따위의 영향을 받는 것에서는 날씨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기후는 날씨와 달리 특정지역에서 여러 해에 걸쳐 나타난 날씨의 평균 상태입니다. 학자들은 보통 수개월에서 수십 년간의 평균 날씨 정보를 바탕으로 기후를 정의합니다. 이 점이 날씨와 기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날씨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고 해서 ‘지구의 기분’으로, 기후는 그런 날씨들이 장기간에 걸쳐 형성됐다고 해서 ‘지구의 성격’이라고 말합니다. ■ 날씨와 기후에 영향을 받는 우리 날씨와 기후는 인간의 의·식·주 등 많은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날씨에 따라 햇빛이 강하면 모자나 양산을 쓰며,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 또한 추워지면 두꺼운 옷과 난방준비를 하고, 더워지면 시원한 옷과 냉방준비를 합니다.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줍니다. 우리나라는 고온다습한 여름철 기후 때문에 벼를 재배하고 쌀을 주식으로 합니다. 반면 건 조한 지역에서는 밀을 재배하고 빵을 주식으로 한 음식이 발달했습니다. 인간은 날씨와 기후에 적응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씨와 기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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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호박이 넝쿨채 들어오다'
- 건강 한여름의 더위가 지나간 자리에 9월의 가을 하늘이 높게 열렸습니다. 지난 8월에는 사상 최악의 폭우로 여러 지역에 침수 피해가 잇달았고 중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가뭄이 심했다. 때아닌 폭우로 농작물의 피해가 커서 ‘한가위’를 앞두고 올라가는 장바구니 물가로 시름도 깊어갑니다. 그래도 이번 폭우에 용케 버텨준 과일들이 나무에 데롱데롱 매달려 잘 익어가고 있어 참 대견하다. 아침 산책하기도 딱 좋은 요즘! 돌담 위, 밭 구석, 지붕 위의 덩굴 사이에 듬성듬성 노오랗게 익어 가는 늙은 호박을 만날 시기도 이쯤이다. 옛부터 늙은 호박은 부기를 빼고 이뇨작용, 해독작용이 탁월하다. 동의보감에 호박의 효능을 보면 “맛이 달며, 독이 없고, 오장을 편하게 하고, 산후혈전과 혈통을 낫게하여 눈을 밝게 한다”라고 적혀있다. 또 '동짓날 늙은 호박을 삶아 먹으면 1 년 내내 무병한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늙은 호박은 ‘가을 보약’이다. 호박은 박과에 속하는 일년생의 덩굴성 초본으로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을 거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옛날부터 여름에는 애호박을 주로 요리에 이용하고 호박고지, 호박범벅 등으로 활용하고 서양 호박은 전분이 많아서 숙과용으로 쪄서 먹는다. 과채류 중에서 전분 함량이 많은 감자, 고구마, 콩에 이어 칼로리가 꽤 높은 편이다. 호박은 본초이름으로 남과, 북과, 음과, 금동과 등으로 불리는데 약성은 달고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효능으로 보중익기(補中益 氣 - 비위를 보양하고 아래로 처진 비기를 일으키거나 기허증을 치료하는 효능), 소염지통(消炎止痛 - 염증과 통증을 없애는 것), 지해평천(止咳平喘 - 기침과 천식을 없앤다), 해독소종(解毒消腫 - 독과 부종을 없애는 것)하는 성질이 있고 빈혈, 해수, 천식, 부종 등을 치료한다고 동의보감에는 전하고 있다. 늙은 호박은 식량 대용 또는 약재로도 사용하고 체력 보강에도 도움이 된다. 호박의 당분은 국수, 빵, 죽으로 활용되는데 호박씨는 기름을 짜서 먹거나 볶아서 먹기도 하고 어린싹, 호박잎, 호박꽃도 채소로 익혀 요리에 사용한다. 늙은 호박은 전분, 칼슘, 철, 카로틴,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다. 호박의 당분은 소화가 잘되고 병후 회복기에 도움이 되며 특히 비타민 B12를 많이 함유하고 있는데 적혈구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해서 빈혈에도 좋습니다. 호박은 달지만, 지방과 나트륨 함량은 낮아 당뇨나 고혈압 환자의 식용으로 매우 적합하며 호박을 자주 먹으면 당뇨병, 고혈압, 간장, 신장의 만성질환과 변비를 예방한다. 늙은 호박은 부기를 빼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효과가 크고 베타카로틴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눈에 영양소를 제공하여 황반변성을 예방하며 항암효과도 있다. 호박은 따뜻한 성질이 있어서 몸이 냉한 사람들에게 더욱 좋다. 일상에서 호박을 활용한 약선음식으로 건강유지에 도움이 되고자 활용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기관지 천식, 노인 만성기관지염 늙은 호박에 대추 15~20개, 꿀 적당량을 함께 달여 먹는다. 2. 피로회복 늙은 호박에 찹쌀, 대추, 팥, 황설탕 등을 넣고 죽을 쑤어 먹는다. 3. 기혈 부족 호박과 쇠고기를 함께 끓여 먹으면 화담 배농(化痰排膿-가래를 삭히고, 고름을 배출 하는 것), 이폐(利肺 - 폐의 기능을 좋게 하 는 것)의 효능을 갖게 되고 호박과 해삼을 다져 죽을 끓여 먹으면 가슴 부위 통증을 다 스릴 수 있다. ‘호박이 넝쿨채로 들어온다’라는 말은 행운이 줄줄이 엮여서 들어온다는 뜻으로 일상에 자주 사용되는 속담입니다. 옛부터 호박이 잎부터 열매, 씨앗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아주 귀하면서 서민에게는 손쉽게 구 할 수 있는 흔한 채소였다. 어린 ‘애호박’이나 ‘늙은 호박’이든 각각의 효능이 다양하여 훌륭한 음식 재료로도 약으로도 사용되기에 속담처럼 행운을 가져다주는 채소다. 보름달처럼 둥근 노오란 호박으로 가족분들 건강 챙기시고 모든 가정에서 “오호~ 호박이 넝쿨채 굴러 들어왔구나”라는 소리가 방방곡곡 들렸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안지영 행복한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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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호박이 넝쿨채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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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나이 명칭이다. 지학(志學)! 학문에 뜻을 둔다는 15세다. 학문에 정진해야 할 시기다. 사춘기라고 방황할 때가 아니다. 1달 고생하면 1년, 1년 고생하면 10년, 5년 고생하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 고생이 평생 재산이 된다. 젊을 때 고생? 평생 복을 만들어 줄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참고 받아들여라. 공부도 하기 좋은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때 여러 가지 추억을 만드는 것 좋다. 하지만 중학교 때 실컷 놀고 좋은 고등학교 갈 리 없고, 고등학교 때 실컷 놀고 좋은 대학 갈 리 없다. 그러니 좋은 직업을 갖기도 어렵고 먹고살기 힘들다. 평생 고생하면서 살아야 한다. 물론 건강을 해치면서 공부의 노예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뭐니 뭐니해도 건강이 제일이고 건강해야 공부도 잘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공부는 영어, 수학과 같은 교과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운동선수가 꿈이면 운동을, 가수가 꿈이면 노래를, 요리사가 꿈이면 요리하는 것을 열심히 하여 자기 재능을 키우면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도 아니다. 병들어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건강하게 하루하루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타고난 재능에 맞는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의사가 모두 행복하지 않고, 판검사가 모두 행복하지 않은 것도 적성에 맞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수의 소질을 타고난 사람은 가수가 행복하지, 판검사나 의사가 행복하지 않다. 유명한 아나운서가 가수로 전향한 것도 아나운서보다는 가수가 즐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업도 자기 적성에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직업은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서는 좋은 직업을 얻기 어렵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고등학교 때 공부는 하지 않고 방황하다가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지 않는가? 3년 고생하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3년 실컷 놀고 평생을 고생할 것인가? 고등학교 때라도 공부에 몰입해 보라.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고등학교 시절을 가장 열심히 공부할 시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학(志學)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약관(弱冠)! 20세에 관례를 치른다는 뜻으로 상투를 틀고 갓을 썼다.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다. 유교에서는 원래 스무 살에 관례를 하고 그 후에 혼례를 하였으나 조혼이 성행하자 관례와 혼례를 겸하였다. 지금 스무 살 먹은 젊은이들을 보라. 어른스러운 점이 없다. 오히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아이 같다. 너무나 애지중지 키워서다. 과잉보호해서다. 험한 세상 스스로 판단해서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자녀 하는 일에 너무 간섭하지 말라. 걱정한다고 안 되는 일이 되고 되는 일이 안 되지도 않는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으니 믿고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자식에게 평생 김치 담가 주고, 반찬 만들어 주고, 손자 봐주는 것이 자식을 위한다고 생각하는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키운 자식 도움받을 때만 부모 찾지, 도움 필요 없어 봐라. 그동안 보살펴 준 것 모두 헛일이고, 오히려 찾아오는 것을 짐으로 생각한다. 아이 낳고 스스로 키워봐야 키워 준 부모의 고생을 알고 부모 은혜에 보답한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놔둬라. 이립(而立)! 자립할 수 있는 30세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 옛날 서른 살에 높은 벼슬한 사람 많다. 지금도 서른 살에 자립하여 사는 사람 많다. 서른이면 놔두어도 된다. 못한다면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하라. 마음 편히 가져라. 잘 된 사람과 비교하여 마음에 상처 주지 말고 팔자려니 생각하라. ‘2020 인구주택총조사-인구·가구 기본 항목’에 따르면 우리나라 20세 이상 인구 가운데 부모 품속에 있는 ‘캥거루족’이 313만 9,000명(7.5%)이다. 이립(而立)이란 말이 정말 무색하다. 불혹(不惑)!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40세다. 사물의 이치를 알 나이이니 이치에 거슬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치를 바로 알고 이치를 거역하지 말라. 이치를 거슬리면 반드시 화를 입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지명(知命)! 천명을 알게 된다는 50세다. 작은 그릇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에서 보면 우습고 어리석다. 큰 뜻을 품고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맹세할 수 있는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순(耳順)! 만물의 본성이나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아는 60세다. 그래서 귀 이(耳)를 쓴다.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비난을 사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됨됨이가 바르다. 나잇값에 맞는 행동을 하면 인생 잘 살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할망정, 최소한 인생 잘못 살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이 은 학 전)대전광역시교육청 교육복지팀장, 학교혁신팀장 전)대전중원초, 대전송촌초등학교 교장 전)대전교육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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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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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 1. 현충일의 의미와 유래 6월 6일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을 추모하는 날이다. 1956년 현충일 제정 시에는 한국 전쟁에서 돌아가신 호국 영령을 기리는 날로 지정했으나 1965년부터 일제 강점기 독립 투쟁을 하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까지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이유는 24절기 중 하나인 망종과 겹치기 때문이다. 망종은 종자를 뿌리기 가장 좋은 날이며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수확 후 모내기를 시작하는 망종을 가장 좋은 날로 여겨, 이 날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옛기록에 의하면 선조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웅에게 예를 갖출 때 망종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겨 6월 6일이 현충일로 지정된 것이다. 2. 문재인정부의 주요 보훈정책 문재인정부가 제66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호국은 물론 항일독립, 민주화, 이웃돕기에 헌신한 유공자들에게도 국가 보훈정책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치해 유가족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그런데 국방부에서 호국 영령을 기리기 위해 6.25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유해발굴감식단을 통해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이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13만 8천 여명 중, 만 2천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경우는 겨우 164명(1.3%)에 불과하다. 현재까지 12만 5천여구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조국 산천에 묻혀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나라를 위한 헌신에 대한 예우를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군·경과 소방관 등 국가안전에 기여한 가정에 명패를 달아주는 행사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행사가 축소되거나 생략되었으나, 전 국민이 6월 6일 10시에 추모 묵념에 동참하고, 국립 서울·대전현충원을 찾아 호국 영령을 추모하는 등 뜻 깊은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것임을 깊이 인식하고 국가보훈처가 호국 영령과 유가족들에 대한 예우와 처우 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3. 제66회 현충일 기념행사 국가보훈처에서는 지난 6월 6일 제66회 현충일을 맞아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66회 현충일 추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추념식은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정부·국회·군·18개 보훈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라는 주제로 열렸다. 2021년 추념식은 서울현충원-대전현충원-유엔기념공원(부산)이 3원으로 연결됐다. 이번 추념식 식전행사에서는 '현충문 근무 교대식'이 처음으로 펼쳐졌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 차원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것이라고 정부 측은 설명했다. 추념식 본행사는 개식 선언 및 조기 게양, 사이렌 묵념, 국민의례, 헌화·분향 및 묵념, 편지 낭독, 국가유공자 증서 수여,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현충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서울현충원에서는 국방부 의장대가, 유엔기념공원에서는 국방부 및 유엔사령부 의장대가 각각 태극기를 조기 게양했고, 오전 10시 정각에 추념식 시작을 알리는 조포 21발이 발사됐다. 동시에 전국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1분간 묵념이 이뤄졌다. 이어 국가유공자이자 전 국가대표 패럴림픽 탁구 선수 안종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사업총괄본부장이 국기에 대한 경례문을 낭독했고, 6·25 참전유공자 후손이 묵념곡을 트럼펫으로 연주했다. 미군 공수부대원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해 오른팔과 오른다리를 잃은 윌리엄 빌 웨버(96) 대령의 영상 메시지와 6·25 참전유공자 김재세(94) 선생의 편지 낭독도 이어졌다. 또 6·25 참전유공자로 헌신한 이진상, 안선 씨와 강원 인제 서화지구에서 전사한 고(故) 조창식 씨의 조카에게 국가유공자 증서가 수여됐다. 아울러 정부는 이번 추념식을 위해 9·19 남북 군사합의 이후 전방 철책 제거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철조망과 화살머리고지 전투 지역에서기념패에는 '이 땅에 다시 전쟁의 비극은 없습니다'라는 문 대통령의 친필 문구가 각인됐다. 문재인 대통령은“대한민국은 선열들의 애국심 위에 서 있고, 독립과 호국의 영웅들은 대한민국을 되찾았다"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헌신으로 가난을 극복했고, 아들, 딸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 숭고한 희생 위에서 오늘의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주인공이 되었다"면서 "대한민국의 가치와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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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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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어버이날의 역사적 의미와 기념행사
- 5월 8일은 49회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고자 1956년부터 지켜왔던 어머니날을 1973년에 어버이날로 바꾸어 법정기념일로 지정,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버이날은 객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이 낳아 키워주고 가르쳐준 부모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선물과 용돈을 준비해 부모님을 찾아뵙는 뜻 깊은 날이다. 그런데 제49회 어버이날에는 정부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고 있고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나빠 대부분의 자식들이 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선물이나 용돈을 드리는 것 대신 전화나 화상 또는 편지로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선물을 택배로 보내거나 온라인 통장으로 용돈을 입금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늙고 병든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선물과 용돈이지만, 평소에 멀리 살건 가까이 살건 항시 부모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소통과 안위를 걱정해주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 일류 대학을 나와도 정규직으로 취직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3D업종에 종사하거나 실업자가 많아 인류(人倫)의 대사인 결혼도 제때에 하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효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식들이 찾아와 선물과 용돈을 주지 않아도 부모님들은 전통적으로 희생정신이 강해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고 항상 자식들이 건강하고 자립해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보건복지부는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 서울 종로구 JW메리어트동대문에서 '2021년 어버이날 효(孝)사랑 큰잔치'를 열고 효행자, 장한어버이 표창수상자 등 22명에게 포상했다. 김영곤(70) 씨는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32년간 모친을 모시고, 부인의 암 투병까지 간호해 회복을 돕는 등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는 동시에 연탄나눔, 장학금 지원 등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김연희(62) 씨는 장녀로서 홀아버지와 형제들을 30년간 돌본 것은 물론 현재도 92세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지적장애 아들을 키워내는 등 가족을 위해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았다. 이 밖에 대통령 표창과 국무총리 표창이 각 10명에게 수여됐다. 한편 독거노인사랑잇기사업 주요 참여 기업·단체의 후원 전달식도 열렸다. 독거노인사랑잇기사업은 정부와 민간기업, 단체가 독거노인과 인연을 맺고 안부 확인·자원봉사·물품후원 등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현재 129개 기업·단체가 참여 중이다. 지난해 212억 원 상당의 후원품과 86억 원 어치의 마스크 및 식료품 키트를 지원했다고 복지부는 밝혔다, HY사회복지재단, SK하이닉스 등 33개의 기업·단체는 올해 어버이날을 맞아 7억8천만원 상당의 후원 물품과 카네이션 등을 마련해 14만여 명의 어르신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이번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상황을 고려해 현장 참석 인원을 최소화하고 유튜브 생중계 등을 통해 어르신들이 원격참여 방식으로 행사를 즐길 수 있게 했다. 권덕철 복지부 장관은 "어르신들이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속한 백신접종 실시, 정서적 지원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전광역시 노인회 중구지회는 지난 5월 4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두 차례에 걸쳐 지회 2층 대강당에서 이인상 중구 지회장을 비롯해 시연합회 및 지회 부회장, 이사, 감사, 노인 대학장, 수상자, 가족 등 오전, 오후 40여 명씩 참석한 가운데 제49회 어버이날 기념 유공자 표창장 수여식을 갖고 효행자·모범 노인, 노인복지 기여자를 표창했다. 수여식장에는 코로나19 방역 수칙에 따른 마스크 착용자가 지정된 1층 입구에서 체열을 재고 입장 허용 후 행사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거리 두기로 앉은 참석자를 향해 김현희(노인대학 노래·프로그램) 강사가 붉은색 상·하의 차림으로 본인의 이름을 왼쪽 가슴에 크게 새겨 붙이고 준비한 인기 가요와 재치 유머, 건강 만담, 부채 마술을 펼쳐 식전행사 무대를 꾸몄다. 중구지회 이인상 지회장은 기념사에서 "삶에서 가장 좋은 일이란 첫째로 부모에 대한 효도다. 두 번째가 형제자매의 우애와 화목한 가정을 이뤄 사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생명을 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고 평생을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며 "효(孝)는 가르침이 아니고 윗분이 하는 것을 배워 실천하는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그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지회장은 많은 대상자 중에 효행상 수상자 4명과 모범 노인 수상자 1명을 소개했다. "효행상을 받으신 정생 1동 권선옥 님은 77세의 나이에 105세 어머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거동할 수 없어 대소변을 받아내며 봉양하고 있어 타의 모범이다"고 제일 먼저 소개했다. 이어서 "산성동 모아미래도 아파트 이옥순 여사는 94세의 시어머니를 27세에 시집와서 42년 동안 모시며 경로당 부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회원들의 안부를 일일이 챙기는 등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다"고 칭찬했다. 효행상 수상자인 권재영(52·삼부 A) 씨는 52세 미혼으로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를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병간호와 대소변을 받아 내며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7년 전에 시집와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가정을 이루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항상 웃는 모습으로 주민들을 대해 칭송이 자자하다는 안멀시(39·만수정경로당) 씨는 시상식장 앞쪽에 앉아 중구지회장의 인사말을 듣던 중,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해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모범 노인상을 받은 이병섭(84·삼부 A) 씨는 경로당 회장으로 회원을 42명에서 현재 98명으로 늘리고, 경로당 활성화를 위해 150만 원 상당의 바둑 세트를 사비로 지원한 바 있다.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나 사회복지관에서도 부모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효자와 효부 표창 등 다채로운 행사를 하여 사회분위기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세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孔子, B.C.551-B.C.479)가 창시한 유교가 경로효친(敬老孝親)을 중시하고 있어 전국의 향교에서는 해마다 어버이날을 기해 효자와 효부, 열녀에게 표창을 하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와 여러 사회봉사단체에서는 대부분의 부모들이 노쇠하여 질병과 고독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어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고, 무료급식과 의료 혜택을 주고 있다. 그래도 복지 사각지대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노인들이 고독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 고장 대전의 뿌리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효문화진흥원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제도가 핵가족제도로 변화됨에 따라 점차 쇠퇴해 가는 효문화를 전국적으로 진흥하고 확산하기 위해 국내외의 효문화를 조사 연구하고 초·중·고용 효문화 교재와 대전지역 효문화답사 가이드북을 발간하는가 하면 효지도사를 양성해 자격증을 수여하고 있다. 공자님께서는 ‘효에는 3가지 즉 대효존친(大孝尊親), 기차불욕(其次不辱), 기하능양(其下能養)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대효존친(大孝尊親)이란 효 중에 제일 큰 효로 자손에 의하여 부모님이 많은 분들로부터 존경받아 항상 기쁘게 지내도록 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기차불욕(其次不辱)은 부모님을 욕(辱)되지 않게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함을 말한다. 기하능양(其下能養)은 바로 자식이 부모를 봉양(奉養)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자식의 마지막 의무라 할 수 있는 부모 봉양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효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성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 백행지본(百行之本)인 효(孝)의 근본 정신은 사랑과 공경이다. 제49회 어버이날을 계기로 하여 한국 국민 모두가 효문화 진흥과 확산의 주인공이 되어 더불어 잘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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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어버이날의 역사적 의미와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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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4.19혁명의 원인과 경과와 영향과 역사적 평가
- 1. 4.19혁명의 원인과 경과 2021년 4월 19일은 4.19혁명 제61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역사적인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 간 대한한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2.28), 대전(3.8), 마산(3.15), 광주, 충주, 서울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3·15 마산의거에 참여한 김주열 마산상고 학생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올라 국민들이 분노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4.19혁명은 전국의 초·중·고·대학생, 일반 시민, 교수 등 10여 만 명이 참여해 대대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6월 15일 제2공화국을 탄생시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말았다. 실제로 시위 진압에 동원된 무장 경찰들과 깡패들이 최루탄을 쏘거나 곤봉을 휘두르거나 총을 발사하여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에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 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2. 4.19혁명의 영향과 역사적 평가 청년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주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그리고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한다. 한편 어느 정치학자는 4.19혁명을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19혁명이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은 장면 총리가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이 주도하는 구파의 대립으로 여전히 정치사회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3. 4.19혁명의 추모사업 국가보훈처에서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 · 기념탑 · 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되어 있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4·19묘지는 민주성지로 불리고 있다.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번 버스로 바꾸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에서는 2013년부터 해마다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거져 얻어지지 않고 국민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장렬한 투쟁과 희생으로 얻어진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그 안에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열정이 녹아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4.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개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19일 오전 국가보훈처 주최로 서울 강북구 소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4·19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고, 전 세계 학생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다며, 정부는 그 의미를 특별히 기리고 4·19혁명의 정신을 인류에게 남기기 위해 2022년을 목표로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4·19혁명 민주영령들의 희생과 정신을 세계인과 함께 계승하고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반기로 연기된 ‘4·19혁명 국민문화제'가 60주년의 의미에 걸맞은 국민 모두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60년 민중의 비폭력 저항으로 한국 민주주의 싹을 틔운 시민혁명인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개최했다. 4·19혁명 기념식은 '새 아침, 민주주의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정부 주요인사, 4·19혁명 유공자 및 유족 등 99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사, 청년의 다짐, 기념공연, '4·19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40분간 진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4·19혁명 제61주년을 맞아 4월 19일 오전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며 민주영령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했다. 그리고 참배 소감으로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4·19민주묘지 참배는 취임 후 이번이 세 번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2018년 첫 참배 이후, 지난해 제60주년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참배한 바 있다. 문대통령은 2021년 4월 19일 오전 국립 4·19민주묘지 참배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4·19 혁명 61주년을 맞아'라는 글에서 1960년 4월 19일은 "목숨보다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 가슴 깊이 민주주의를 심었던 날"이라며 "4·19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19 혁명의 주역들께 김수영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다시 바친다"며 '푸른 하늘을'의 일부를 인용했다. 5.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의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참여축사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은 4.19혁명 61주년을 맞아 오전 동구 중동 목척교에서 (사)대전세종충남4.19혁명회(회장 최영상) 회원들과 함께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찾아 헌화하고, "4.19혁명은 독재세력을 민주시민의 힘으로 몰아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 시장은 4월 19일 열린 주간업무회의에서 "대전의 3·8 민주의거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한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역사성과 상징성이 크다"며 "4·19 혁명이 3·8 민주의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기념사업에 잘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문헌> 1. 김운태,『한국정치론』, 박영사, 2002.2.15. 2. 이극찬,『정치학』, 법문사, 2010.2.20. 3. 윤석연,『4.19 혁명』, 한겨레틴틴, 2010.12.15. 4. 박세영,『처음 배우는 4.19 혁명과 민주주의』, 북멘토, 2020.4.6. 5. 이찬우, “국가보훈처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 개최”, 세이프타임즈, 2021.4.16일자. 6. 이원구, “허태정 대전시장,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헌화”, 백제뉴스, 2021.4.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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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4.19혁명의 원인과 경과와 영향과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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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맞아
- 2020년 12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지 413주년이 되는 경사로운 날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이후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12세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1625년(인조 3) 19세 때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나 수학한 지 일 년 만에 스승이 주욱자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서 사사했다. 그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兪棨) 등이었다. 이들이 이른바 충남 5현(忠南五賢)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27세의 송시열은 대제학(大提學) 최명길(崔鳴吉)이 주관한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2년 뒤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됐다. 후일 효종(孝宗)과의 두터운 의리는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大君)과 비빈(妃嬪)들은 강화로 피난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대군들이 볼모로 잡혀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내려와 피난해 있던 어머니를 모셨다. 난이 끝난 뒤에는 영동 황간으로 들어가 독서와 학문에 정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이 그에게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이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당시 총애를 받던 무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金自點)이 귀양을 가자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부제학(副提學) 신면(申冕)과 공모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은 군사를 동원해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과 공갈을 했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어 그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 무봉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숙종 23년인 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주자대전(朱子大全)』과『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송자대전(宋子大全)』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일생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공자의『춘추』속에 담긴 대의를 구현하였으며, 전쟁과 반란 등이 계속되어 무너진 인륜적 질서를 회복하는 데 절의의 숭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전력을 쏟은 인물이다. 실제로 우암 송시열은 그의 생거지 적거지를 따라 그 행적과 자취를 돌아다보면 가정과 향당과 조정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실천한 참 선비였음을 곧 알 수가 있다. 큰 눈으로 보면 그가 추구한 세상은 의리가 존중되고 예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명(文明)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 조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였으며, 또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역시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중시되고 예의가 존중되는 ‘문명의 세상’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인생 만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은거하고 암서재(巖棲齋)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巖) 정호(鄭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명재(明齋) 윤증(尹拯)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직(直, 곧 정직)으로 무장하여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학자로서 송자(宋子)에 이르렀으며, 학덕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한 시대의 산림(山林)의 종장이었으며, 북벌(北伐)과 예치(禮治)를 국가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 ‘대로(大老 : 나라의 큰 어른)’로 추앙되었던 큰 인물이다. 그리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으로 송자(宋子)란 존칭을 사용했다. 우암 송시열은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에 마련된 유물관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과 인장,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털옷, 글씨와 장서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월 청명관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기획 특별전시를 열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이 해마다 10월 말에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하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에서 우암 송시열의 높은 학덕과 대의를 기리는 우암문화제(학술대회, 우암 휘호대회, 전국백일장)를 개최하고 있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해마다 그가 태어난 날인 음력 11월 13일 전후에 우암 송시열의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지역 유림과 은진 송씨 후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숭모제를 열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1. 대전광역시 충남대 유학연구소,『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이화, 2008.3.31. 2. 곽신환,『우암 송시열』, 서광사, 2012.9.30. 3. 한기범,『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누마루, 2014.5.10. 4. “송시열(宋時烈)”,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7.31. 5. 김갑동, “우암사적 공원과 송시열”, 금강일보, 2015.6.21일자. 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11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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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맞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