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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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만 저려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목디스크?” 인공디스크치환술로 치료하는 방법
    척추센터 문지영 센터장(신경외과 전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 사용이 일상이 된 요즘, 고개를 숙이거나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인의 머리 무게는 약 4~6kg 정도지만, 고개를 숙이면 목에 가해지는 부담은 2~3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 상태가 반복되면 목뼈 사이의 디스크가 점차 손상되면서 목디스크를 유발하게 된다. 목디스크는 보통 목 통증을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목이 전혀 아프지 않은데 팔만 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목에 있는 신경이 눌리면서 그 신경이 이어진 팔과 손까지 저림이나 통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로나 혈액순환 문제로 오해하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목디스크 치료는 대부분 비수술적인 방법부터 시작한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주사치료 등을 통해 증상을 완화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신경성형술과 같은 시술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디스크 손상이 심하거나 신경 압박이 계속되는 경우, 또는 통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하게 된다. 이때 시행되는 대표적인 수술이 인공디스크치환술이다.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손상된 디스크를 제거한 뒤 그 자리에 인공 디스크를 넣어주는 수술이다. 가장 큰 특징은 목의 움직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 다는 점이다. 단순히 통증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공디스크치환술은 목의 움직임이 중요한 직장인이나 활동량이 많은 환자에게 특히 적합한 치료로 평가된다. 장기적으로도 주변 디스크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에 재발 위험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목은 중요한 신경이 지나가는 부위이기 때문에, 인공디스크치환술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이다. 따라서 수술을 결정할 때는 의료진의 경험과 수술 사례 등을 충분히 확인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팔 저림은 흔히 가볍게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경우에 따라 목디스크의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반복되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단순한 문제로 넘기지 말고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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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4
  • 다리 저림, 엉치 통증 심한 척추관 협착증, 1cm 미만 절개 척추 내시경 수술로 치료
    대전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배진현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조금만 걸어도 엉치와 다리가 당기고, 종아리가 저려 자꾸 쉬어야 한다면 단순한 허리 통증이 아닐 수 있다. 특히 10~20분도 채 걷지 못하고 멈춰 서야 하거나, 앉아서 잠시 쉬면 다시 걸을 수 있는 증상이 반복된다면 척추관 협착증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척추관 협착증은 척추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퇴행성 변화로 좁아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과 저림, 보행 장애를 유발하는 질환이다. 뼈와 인대가 두꺼워지거나 비대해지면서 신경을 압박하고, 이로 인해 엉치 통증, 종아리 저림, 발바닥 감각 이상 등이 나타난다. 특히 이 질환의 특징은 ‘걷기 힘든 병’이라는 점이다. 10~20분 이상 걷기 어렵거나,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당기고 통증이 심해져 쉬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잠시 앉아 쉬면 증상이 완화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를 ‘신경성 파행’이라고 한다. 척추관 협착증 치료는 증상과 보행 기능 저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초기에는 약물 치료, 물리치료, 신경 주사치료 등 보존적 치료를 시행하며, 신경성형술과 같은 비수술적 시술을 통해 좁아진 부위에 특수 카테터를 삽입해 신경 주변의 유착을 박리하고 염증을 완화함으로써 통증을 줄이고 신경 공간을 확보하는 방법을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거나 다리 힘 빠짐이나 감각 이상이 동반되는 경우는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방치할 경우 수술 후에도 회복이 더디거나 후유증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행할 수 있는 치료가 1cm 미만의 작은 절개를 통해 시행하는 양방향 척추 내시경 수술이다. 이 수술은 두 개의 작은 통로를 통해 내시경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각각 삽입한 뒤, 신경을 압박하는 뼈와 두꺼워진 인대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다. 고해상도 영상으로 병변을 직접 확인하면서 감압을 시행하기 때문에 정상 조직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절개 범위 1cm미만으로 작아 출혈과 근육 손상이 상대적으로 적고, 수술 후 통증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최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척추 내시경 수술은 절개 범위를 크게 줄이고, 회복 부담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을 낮춘 치료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수술 이미지만으로 치료를 미루기보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척추관 협착증은 참고 견딘다고 좋아지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받고 신경 압박 정도와 기능 저하 수준에 맞는 치료를 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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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7
  •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겨울철 넘어진 후 엉덩이·손목 통증, 반드시 진료가 필요한 이유 에스앤케이병원 관절센터 신준 원장(정형외과 전문의) 겨울철에는 눈과 빙판길로 인해 낙상 사고가 급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손목 골절의 약 3분의 1이 12~2월에 집중되며, 고관절 골절 역시 겨울철 발생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넘어지면서 발생하는 골절에 대한 주의가 필요한 시기이다. 겨울철 낙상으로 발생하기 쉬운 골절은 고관절 골절이다. 고관절은 몸과 다리를 연결하는 관절로, 골절이 생기면 엉덩이나 사타구니 통증이 심해지고 다리를 들기 어렵다. 또한, 걷기 어렵고,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 있다면 고관절 골절을 의심해야 한다. 고관절 골절은 단순한 골절을 넘어 전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외상이다. 수술과 입원, 재활로 장기간 거동이 제한되면서 폐렴, 욕창, 근력 감소, 혈전증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관절 골절 위치와 형태, 환자의 연령에 따라 치료는 달라진다.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골절은 금속 나사나 금속판을 이용한 고정술로 치료할 수 있지만, 고령이거나 골절이 심하면 인공관절 치환술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흔하게 발생하는 골절은 손목 골절이다.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면서 체중이 손목에 실려 요골 원위부 골절이 발생하게 된다. 외관으로 보았을 때 다친 부위가 눈에 띄게 붓고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절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지 않을 때에는 깁스나 보조기로 치료를 하지만, 골절 부위가 어긋나거나 추후 변형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는 수술을 하게 된다. 특히 골다공증이 동반된 환자의 경우 변형 위험이 더욱 높아지므로, 수술적 치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문제는 손목의 경우 단순 타박상으로 여기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손의 경우에는 엑스레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미세 골절이나 관절면 손상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진료가 필요하다. 고관절과 손목 골절은 치료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늦어지고 후유증 위험이 커진다. 특히 고령층이나 골다공증이 있는 경우에는 작은 충격에도 중증 골절로 이어질 수 있어, 낙상 후 통증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넘어짐도 가볍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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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2
  • 2025년 을사조약 120년 양자역학탄생 100년
    2025년은 60갑자로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이다. 동시에 을사보호조약 체결 120주년, 그리고 현대 물리학사의 큰 전환점이 된 양자역학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을사보호조약과 양자역학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두 사건을 함께 떠올리며 되새겨볼 필요는 있다. 을사보호조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1905년 9월 27일, 일본은 11월을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면서 한국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동원해 강제 성사시키겠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다. 이후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며 순종을 즉위시켰고, 연호도 ‘융희’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는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대한제국이 왜 몰락했는지를 오래 고민해왔다. 물론 일본의 침략 책임이 가장 크지만, 내부적 요인도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 아래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본다. 첫째, 지나친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인문 중심의 사고다. 유교적 가치가 인간의 삶과 도리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내면과 형식에만 매몰되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둘째, 외교력의 부재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뛰어난 외교가를 떠올리기 어렵다. 그나마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 정도가 예외일 것이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서도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 셋째, 관료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다.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더불어 국정은 문란했고, 명성황후가 무속인들의 말을 믿고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넷째, 직업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관료와 양반은 존귀하게 여기고, 실제 산업과 생산을 담당한 중인·상인·장인 등은 천시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근대화를 지연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음에도 다른 길을 걸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이후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으며, 1902년 영일동맹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화학을 전공한 근대 지식인이었다. 그는 1863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명 화학자 윌리엄슨에게 수학했고, 귀국 이후에도 다수의 유학생을 파견해 서양 지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조선 역시 개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외교관계를 넓혀갔고, 1894년 갑오경장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등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잇단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역량이 하나로 모이지 못했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본은 본격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냈고, 을사보호조약을 강행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한편 19세기 서양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量子, quantum)는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뜻하며,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 이론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 보어의 원자모형,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연구를 거치며 1925년 양자역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됐다. 이 과학자들은 대부분 노벨상을 수상했고, 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1925년 당시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 아래 있었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그 시대, 우리는 주권을 잃은 채 타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안타까움과 동시에 민족적 자존심이 상처받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1920년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국내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과학 대중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과학조선》 창간, 발명학회 창립, 과학데이 행사 개최 등 과학계몽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등 뛰어난 과학자들이 등장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일본에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국립중앙과학관 설립, 1967년 과학의 날 제정,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은 과학강국을 향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바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더 큰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국력의 척도를 보려면 과학기술을 보라고 한다. 과학기술은 곧 국력이며, 부국강병의 기초다. 2025년은 을사보호조약 120주년, 양자역학 100주년, 한일수교 60주년, 벤젠 발견 200주년이 겹치는 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더 이상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길 중 하나는 과학기술의 힘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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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5
  • 젓가락질이 어려워지고 자꾸 휘청거린다면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경추 척수증’?
    "젓가락질을 하기가 힘들고, 단추를 잠그는 동작이 어렵다", "걷다 보면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휘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변화가 나타나면 먼저 노화를 떠올리거나 증상만 놓고 보면 뇌에서 비롯된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나타난다면 노화나 뇌가 아닌 척추 질환, 특히 척수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척수증은 척추안을 지나는 척수가 압박을 받아 신경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이다. 척수는 뇌에서 손과 발 끝까지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중추 통로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통증보다 먼저 손과 발의 기능 저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는 젓가락질이나 단추 잠그기처럼 손의 미세한 동작이 둔해진다.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거나 손에 힘이 빠진 느낌도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후에는 다리 증상이 나타난다. 보폭이 짧아지고, 평소 문제없던 길에서도 균형 잡기가 어려워진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목 통증이 전혀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경추에 생긴 문제를 의심하지 못한 채 진단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중년 이후 더 흔한 이유 경추 척수증은 주로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한다.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나 협착증, 후종인대골화증이나 황색인대골화증과 같은 퇴행성 변화가 누적되면서 척수가 지나가는 척추관이 점점 좁아지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나도 “나이 탓이겠지” 하고 넘기기 쉽다. 그러나 척수는 한 번 손상이 진행되면 회복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조기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치료의 핵심은 ‘척수 압박을 풀어주는 것’ 척수증 치료의 본질은 눌려 있는 척수를 풀어주는 것이다. 증상이 경미한 초기 단계에서는 약물치료나 물리치료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차원의 치료일 뿐, 척수 압박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해 수술적 치료를 고려해 봐야한다. 특히, 손 기능 저하나 보행 장애가 뚜렷해지고, MRI에서 척수 손상 소견이 확인되면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내시경을 이용한 최소침습 척추 수술이 발전하면서 수술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내시경 수술은 목 뒤쪽에 약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을 2~3개만 내고, 내시경을 통해 내부를 직접 보면서 정밀 기구로 척수를 압박하는 병변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절개 범위가 작아 근육 손상이 최소화되고, 그만큼 수술 후 통증도 적다. 회복 속도가 빨라 일상생활로의 복귀도 비교적 빠른 편이다. ■ 수술 시기가 예후를 좌우한다 척수가 눌리면 신경이 잠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압박이 오래 계속될 경우 회복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 때문에, 따라서 경추 척수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술 방법보다 ‘시기’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기 전에 치료할수록 예후는 좋다. 에스앤케이병원 척추센터 윤병일 원장은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 일상생활이 이전과 다르다면, 단순한 노화도, 뇌 질환도 아닌 척수증의 초기 신호일 수 있다. 증상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신경 손상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전하며, “조기에 발견해 척수 압박을 해소하면 기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년 이후 나타나는 작은 변화일수록 체계적인 진단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것이 신경 손상을 막는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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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6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대덕구 미호동 '미호동 옛터'
    대덕구 미호동에 위치한 조선후기 제월당 문희공 송규렴(1630~1709) 선생을 향사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미호서원 옛터이다. 이 마을은 선생이 말년에 취백정을 짓고 후학을 기르시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미호서원은 1718년(숙종4년) 지역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독향서원으로 경종1년(1721년) 국왕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제월당 송규림 선생은 은진 송씨의 조보를 처음 만들고 임란때 소실된 쌍청당과 숭현서원을 복원하신 송담(송남수)의 증손이며, 예학의 태두인 사계(김장생)의 고제인 동춘당(송준길), 우암(송시열), 초려(이유태)의 문인이다. 선생은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갑인예송(1675년)에서 우암 선생이 유배를 당하자 벼슬을 버렸고, 우암 선생의 죄를 종묘에 고하자는 무리들과 맞서서 부당함을 상소하여 의지를 지키셨고 스승이 신원된 후에 다시 출사하여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월당은 동춘당, 우암 양선생과 함께 회덕3종으로 칭해진다. 선생께서 지은 회덕 향약 서문에서 회덕을 예의지향이라 하였고 향촌을 바르게 한 후 에는 밖으로 확산되어 예의지국이 될 것이라 하셨고 위험에 빠진 스승을 직언으로 선생을 변호하였던 의리 선비정신의 표상이며, 추모할 정신이다. 미호서원은 당쟁의 여파로 1724년 새액이 철거되고 이듬해 다시 복원되는 등 철액과 사액이 반복되었으나, 그 후에도 140여 년간 선현의 후학 모임 목적을 잘 수행하여 향촌교화에 기여 하였다. 한말 대원군의 서원 정리 정책으로 훼철 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 이후 1983년 선생의 후손들이 선생이 남기신 학덕과 자취를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이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옆의 유허비문을 지은이는 "선생의 맑고 순수한 자질은 본래부터 도에 가까웠고, 총명한 지식은 무리 중에 뛰어 났으며, 경전을 널리 익혀 막힘이 없었고 의리에 깊어 생각이 남달랐다고 추모하고, 서원의 훼철여부가 선생에게 손익이 없다 하지만 훼철된 전 후의 풍속의 순후함과 경박함이 다르지 않았던가?"라 하며 미호서원이 풍속을 순후하게 하는데 기여했음을 밝히고 이어지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유허비문 지은이 송제영, 글씨 쓴이 송용시, 일을 주선인 후손은 송호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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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5-11-27
  • 마산동에 있는 ‘미륵원지’를 찾아서
    비룡교차로에서 대청호 자연생태관을 지나 마산동 마을회관 근처 시골집 앞 삼거리까지는 버스가 다니는 대청길로 약10.2km가 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냉천길로 약1.5km를 지나면 작은 삼거리에서 우측 냉천로152번길로 직진하면 약0.4km 우측에 있는 미륵 원지가 있다. 미륵 원지는 2005년 9월 6일에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냉천로152번길에서 회덕황씨제실 입구 문에서 조금 들어가면 되며 회덕향씨 선조 추모비가 있다. 미륵원지 표지석 모퉁이를 지나면 삼성문이 있으며, 삼성문의 우측에는 남루고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삼성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에 미륵원이 대청호를 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후면은 경사면으로 되어 있는 부지에 전면에 있는 4개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된 1980년도에 복원되어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 2칸은 넓은 대청과 양측에는 방으로 되어 있으며, ‘미륵원 남루기’ 및 ‘제영기’가 걸려있다. 예전에는 방문 시 노부부가 살아계실 때 문간채 외양간에는 누런 황소가 있었으며, 샘에서 물을 떠서 마시고 나서 할머니와 대화하는 동안 밭에서 일을 마치고 할아버지가 들어오셔서 한동안 대화했다. 할머니는 “뭐~ 허루함 시골집 찍어서 뭘 해?”하시면서 내부도 사진 촬영하도록 협조해주시던 추억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미륵원은 고려말 이곳 호족이었던 회덕황씨의 2대조 황연기로부터 그이 아드님 황수 이분의 아드님 황자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110년 동안(1322년~1440년) 여행자를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던 집인데 이 집을 미륵원이라 하고 집이 있던 터를 미륵원지라고 했다. 이곳에 다시 높은 누각을 지어 길손들이 더위를 피해 쉬어가게 했으니 이 누각을 남루라 한다. 회덕 황씨가의 이러한 봉사활동은 당시 모든 사람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후한 민심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적선 때문에 운영된 역사 깊은 생활유적으로, 행려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 활동에서 점차 사회구조 및 봉사활동으로 확대한 대전 최초의 사회복지 기능을 수행한 민간기관이다. 원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나그네를 보호하고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역과 역 사이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국가나 사찰에서 설치하여 운영하지만, 미륵원은 회덕황씨 가문에서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를 했던 곳이다. 미륵원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연결하는 삼문의 길목에 있어 많은 나그네들이 당시 회덕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나눔 문화를 나눈 곳이다. 고려 말 황연기로부터 그 손자 황자후까지 3대에 걸쳐 110년 동안 오고 가는 나그네에게 쉴 수 있는 잠자리와 식사를 무상으로 베풀고 떠도는 노숙자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벌이기도 하며 아픈 이는 치료를 해주는 등 실지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몇 되지 아니한 곳으로 극소한 고려시대 문화유적이며, 대전 최초의 민간 사회복지기관이기도 합니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미륵원지대 대부분이 수장되고, 그 일부와 남루 고지가 대청호 변에 남아 있어 경관이 수려한다. 지금의 남루는 이축된 한식 건물로 회덕 황씨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륵원을 일명 굴파원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색과 하륜, 변계량, 정인지, 송시열 등 당시에 정치·학문·문학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 찬한 제영기에서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청풍명월, 절의정신과 더불어 우리 지방의 향풍 가운데 하나인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대전 사람의 후덕한 인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주변에는 갈전동 갈밭 선돌, 송상민 효자정려, 안평이씨 열부정려, 장동 산성, 마산동산성, 성치산성, 견두산성, 이현동산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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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5-06-26
  • 고려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산중에 가져다 버리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연세가 일흔인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음식을 아버지 앞에 차려 드리고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린 다음 지게를 놓아둔 채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왔던 나이 어린 아들이 지게를 다시 졌다. “왜 지게를 버리지 않고 가져오느냐?” “할아버지를 버린 것처럼 아버지가 늙으면 저도 아버지를 버리려고 합니다.”라고 어린 아들이 말하였다. 그 말에 크게 뉘우치고 다시 집으로 모셔서 그 전보다 더 잘 봉양하게 되었다. 그 뒤로 고려장이라는 악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말한 설화 중에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고려장이 국법으로 정해져 있는 나라에 사는 어느 효자는 아버지가 늙어 고려장 할 시기가 되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아버지를 숨겨 두고 봉양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똑같은 말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미와 새끼를 가리라고 하였다.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숨겨 두고 봉양하였던 늙은 아버지가 말하기를 “두 말을 굶기도록 한 다음 풀을 주었을 때 먼저 풀을 먹는 쪽이 새끼다.”라고 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항상 자식을 먼저 챙기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어려움을 해결하였다. 늙은이도 쓸모가 있음을 깨닫게 된 나라에서는 이러한 악습을 폐지하였다. 두 설화는 고려장의 폐지를 가져오는 내용이지만, 그 방법은 전혀 다르다. 앞 이야기는 불효를 강조하면서 손자의 지혜를 해결의 계기로 삼았고, 뒤 이야기는 노부모의 지혜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면서 고려장을 폐지하게 된 내용이다. 노인을 버리는 풍습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이 아닌 육체적인 힘이나 능력 위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재치 있는 대처 방법이나 노인의 지혜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수명이 늘다 보니 노인 모시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집이고 모시지 않으려고 한다. 모시는 것이 귀찮아서 물건 맡기듯 요양원으로 보내고 놀러 다닐 것 다 놀러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요양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돈 없으면 요양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재산 상속받기 전에는 세상에 그런 효자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부모 모시는 것은 믿고 맡겨 달란다. 상속 끝나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 머리가 좋지 않아선지 약아선지 모르지만 함흥차사다.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고도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키워준 것 하나만으로도 떳떳할 자격이 충분하다. 당당할 자격이 있다. 그럼에도 무슨 죄를 지었기에 며느리한테 숨도 쉬지 못하는가? 모시려 하지 않으면 있는 것 가지고 요양원에 들어가 편히 살아라. 왜 며느리 눈치를 보는가? 줄 것 다 주고도 왜 당당하지 못한가? 일부 젊은 부부를 보면 아이만 낳고 키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으로 안다. 직장 다닌다고 손자, 손녀 봐주니 자식 그냥 키운 줄 안다. 자식 키워봐야 부모 고생을 알게 된다. 자식을 키워보지 않으면 거저 큰 줄 안다. 그러니 부모 고마움 모르고 효도도 하지 않는다. 자식이 부모 등골 빼 먹는다는 말이 있다. 등골 빠지면 인생 끝이다. 등골이 그렇게 중요한데 그 등골을 자식이 빼 먹는다. 그런데도 등골 빠지는 줄 모르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런 일이 자식을 위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출산 억제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각종 혜택을 주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그런데도 출산율도 아주 저조하다. 심지어 결혼 조건으로 아이 낳지 않기로 서약하는 부부도 있다니, 세상이 변해도 참으로 많이 변했다.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그 많던 산부인과는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요양원이 들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보고 싶은 자식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자식이 해 주는 따듯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요양원에서 보내는 노인들을 보면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간다. 바로 이것이 현대판 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일까? 물론 맞벌이 가정으로 인해 부모를 요양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있음에도, 모실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도 부모 모시는 것을 피하는 것은 아닐까? 요양원에 부모 보내 놓고, 놀러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가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먹는 그런 불효는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가? 먹고 싶어도 먹지 않고, 입고 싶어도 입지 않고, 가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온 대가가 요양원이니, 참으로 원통할 일이다. 그래도 요양원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요양원에 있는 것도 고마워할 판이다. 나에게 도움이 될 때는 부모지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짐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참으로 서글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듯한 정이 흐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것이 효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말이 있다. 효를 실천하는 사람은 공부도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효가 무너진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부모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요양원이 되어야지 현대판 고려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황이 어쩔 수 없어 요양원에 모셨더라도 자주 찾아뵙고 외롭지 않도록 모시는 것이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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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2025-06-26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모든 업적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예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작전을 내릴 때 수하 장수들이 반대를 하여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한바다 위에서 전쟁 결과 한 번도 지지를 안 했다. 완벽한 승리를 가져왔다. 23번 아나 치른 해전 패배 없이 다 이겼다. 가장 유명한 해전은 한산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전쟁시 장수가 지략을 가진다고 이기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바다의 특징을 완벽히 알고 있기에 승리를 한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을 한다면 바다를 가지고 놀았다고 본다. 바다의 특징 해류의 성질 바람의 방향 등등 해양 전문가 가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군님은 전문적으로 해양과학을 공부한 것이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재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한산해전의 학익진 전법과 명량에서의 승전이다. 한산해전은 학익진 전술을 이용하여 왜선 6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 결과로 완전 해양을 장악했고 일본군이 본국으로부터 물자 수송을 막았다. 역사학자들은 한산대첩이 임진왜란을 종결시킨 싸움이라고 한다. 학익진 전법은 일본 함선이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오면 아군 함선을 좌우로 펴지게 하여 적군 배가 들어오게 유인하여 격침시키는 전법이다. 완전 항법적인 원리이다. 명량대첩 승리 단지 작전과 지형 정신만 가지고 이겼을까 아니다!!! 아군 13척만으로 왜선 133척을 어떻게 격침 시켰을까 “속담에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조금의 문틈만 있어도 그 사이로 바람이 세게 들어온다는 것을 표현한 말인데, 좁은 틈에서는 유체의 속력이 빨라진다는 베르누이의 정리를 나타낸 것이다. 명량대첩에서 승리할 때도 베르누이의 정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명량(울돌목)은 수로가 좁아 물살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수로가 좁기 때문에 생기는 빠른 물살을 이용하였고 세계 해전사에서도 거북선 발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장군께서는 공학에 재주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탁월한 전문가인 나대용의 도움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장군께선 거북선을 만들고 정부 고관 벼슬아치를 불러 진수식을 보여주었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장군을 비난했다. 그러나 장군은 굴하지 않고 거북선을 만드셨고 해전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다. 최종 정리를 한다면 장군께선 물리학자요 해양학자요 조선기술자이시다. 장군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시고 난중일기를 쓰셨고 국보 76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 5부터 권 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나도 오래전 난중일기 일부분을 읽어보았다. 의미가 깊었다. 그리고 시조 1수가 전한다. 한산 섬 달 빍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장군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지방 원님으로 있었을 때 모든 일에 원칙적으로 처리했고 청렴하였다. 비록 본인보다 급이 높은 벼슬아치들이 부정한 행위를 할 경우나 부정청탁할 경우 절대 굴하지 안 했고 원리원칙대로 처리하였다. 장군을 싫어한 이가 있다. 선조였다. 그는 충무공의 연전연승 소식에 대신들 앞에서는 좋은 체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두려워했었다. 만일 노량해전에서 장군께서 전사를 안 했다면 전쟁 끝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을 것이라고 한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1545년생으로 올해로 480돌이다. 충무공 이순신. 정말로 하늘이 주신 분이시다.초등학생부터 배웠던 장군의 업적과 정신 다시 한 변 새기면서 진정한 삶으로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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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5-04-27
  • 대전시,‘25. 3. 20.字 4급 이하 승진 인사
    ◇ 4급(과장급) 2명 ▲산업입지과장 박남철 ▲문화유산과장 안준호 ◇ 5급(팀장급) 승진요원 26명 ▲인사혁신담당관 김현아 ▲세정담당관 신화철, 조은희 ▲안전정책과 송현지 ▲자연재난과 오진숙 ▲과학협력과 박훈숙 ▲운영지원과 강민아 ▲자치행정과 차은영 ▲균형발전과 유숙영 ▲문화예술과 이현경 ▲체육시설과 윤여채 ▲질병관리과 장현경 ▲복지정책과 김시원 ▲대기환경과 정희선 ▲수질개선과 고재섭 ▲생태하천과 박철운 ▲공원수목원과 천지혜 ▲농생명정책과 오진세, 윤태호 ▲교통정책과 이현정 ▲버스정책과 김정미 ▲운송주차과 홍성환 ▲철도정책과 권혜은 ▲도시정비과 유동규 ▲토지정보과 송창기 ▲보건환경연구원 이봉철 ◇ 6급 9명 ▲대변인 김정훈 ▲정책기획관 박예슬 ▲산업입지과 박병필, 이흥열 ▲정보화정책과 양희성 ▲체육시설과 홍광의 ▲농생명정책과 이세정 ▲도시재생과 김형진 ▲건설관리본부 이성걸 ◇ 7급 28명 ▲인사혁신담당관 권경주, 조보미, 조영주 ▲정책기획관 서민지 ▲예산담당관 심성욱 ▲재해예방과 김민철 ▲산업입지과 김윤희 ▲운영지원과 김소영, 조현웅 ▲관광진흥과 박건유 ▲체육시설과 권다혜 ▲노인복지과 김하은 ▲대기환경과 김지수 ▲자원순환과 김혜리 ▲운송주차과 김민재 ▲트램시스템과 김승래 ▲상수도사업본부 김동욱, 김정현, 송정민, 안홍영, 이소라, 전형진 ▲건설관리본부 배정재, 여창현, 장설 ▲한밭도서관 김상희 ▲오정농수산물도매시장관리사업소 김태훈 ▲한밭수목원 김원웅 ◇ 8급 9명 ▲회계재산과 김준, 김헌민 ▲노인복지과 김지수 ▲보행자전거과 이인표 ▲상수도사업본부 박현진, 정기룡 ▲건설관리본부 김승주, 진형표 ▲차량등록사업소 김성훈
    • 오피니언
    • 동정
    2025-03-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가오동 선돌
    동구 대성동 132번지 가오동 택지개발지구 내에 있는 은어송마을APT 201동과 202동 사이 앞에 위치한 66호근린공원 내에 있는 대전동구국제화센터 건물 옆에 있다. 공원 내에는 유래비와 가오동 고인돌과 함께 나란히 설치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통영대전고속 도로가 있다. 가오동선돌은 옛 새터마을 자리(현재 가오지구 단독 주택 부지)에 있었으나, 고인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복원되었다. 선돌 모양은 둥근 반원형 형태이며, 표면은 까칠한다. 선돌은 고인돌과 함께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일부를 다듬어 세웠다. 고인들과 함께 세워 무덤의 표시기능을 하거나, 마을 입구에 세워 풍요 기원과 수구막이 역할을 하여 원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오동 선돌'은 둥근 반원형 형태이며, 직경 120cm 높이 80cm이다.
    • 오피니언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6-0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효평동 효열기
    대전광역시 동구 효평동에 '효평동 효열기'가있다. 김해김씨로 종가로 출가한 진주 강씨 은열공과 관련된 비석으로 추적되며, 대성문화원 원장인 판서 민병한씨가 세웠다. 대전광역시에 있는 대부분 정려각 기둥이 8각형인데, 이곳은 원형 장초석으로 되어있다. 각 기둥 위에는 조각한 익공을 짜 올려 매우 화려한 모습으로 익공 위로는 장여를 놓고 그 위에 주심도리를 올린 다음 서까래를 걸었다. 정면, 측면 각 1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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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6-02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송명의선생유허비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관동묘려'가 보이면서 넓은 주차장이 있다. 전면에는 푸른 대청호를 바라다 본 뒤 답사를 할 수 있으며, 바로 앞에는 은골할먼네집 식당이 있다. 초석은 방형단위에 8각 장초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기둥 위에는 조각한 익공을 짜 올려 매우 화려한 모습이다. 익공 위로는 장여를 놓고 그 위에 주심도리를 올린 다음 서까래를 걸었다. 정면, 측면 각1 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이지만,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212cm, 폭49.5cm, 두께 25.5cm 입니다. 쌍청당 송유(1398~1446)의 어머니 안인고흥 유씨부인의 재실과 산소가 있는 관동묘려 곁에 나즈마한 뒷산을 배경으로 대청호를 나라보며 위치해 있다. '송명의선생유허비'의 송명의 선생은 회덕에 살기 시작한 최초의 은진 송씨로 시조이신 송대원의 증손이다.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경상도 안렴사를 거쳐 사헌부집단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을 거쳐 처가인 회덕 황씨 집성촌인 향리로 내려와 은거했다. 유허비는 현종 원년(1835년)에 14대손인 송기정이 세웠으나, 고종 13년(1876년)비의 규모를 크게 다시 세웠다. 원래 이 비는 동구 신촌동에 있었으나, 대청댐 건설로 인하여 1978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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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3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관동묘려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에 위치한 '관동묘려'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다. 전면에는 푸른 대청호를 바라다 본 뒤 답사를 할 수 있으며, 바로 앞에는 은골할먼네집 식당이 있다. '관동묘려'는 열부로 정려를 받은 쌍청당 송유(1389~1446)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문종2년(1452) 82세로 돌아가시자, 이곳 마산동에서 장례를 지내고 그 옆에 건축한 재실이다. 이 재실은 양옆으로 2칸씩의 방이 달린 소슬 삼문형의 중문과 ㄱ자형의 재실건물 등 2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ㄱ자형 평면의 재실은 중앙에 2칸 통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편에 안방과 건넌방을 드린 후, 그 안방옆으로 2칸의 부엌을 드렸다. 구조는 자연석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생략되고 간결한 납도리 집으로 꾸몄다. 가구는 전후 평주위에 낮은 동자주를 놓고 그 위에 종량과 제형대공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고 있는 5량집으로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청에 '관동묘려'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종도리 장설 측면에 '승정기원후 오갑오이월십육일 입주 상량'이라는 상량문이 있어 고종 31년(1894)에 증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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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3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미륵원지
    '미륵원지'는 동구 마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2005년 9월 6일에 지정이 되었다. 고려말 황윤보에 건립되어 여말선초 회덕황씨가의 적선에 의해 운영이 된 역사가 깊은 생활유적이다. 예전에 자주 답사 시 어머님이 반가워하셨는데, 현재는 노부부가 안계셔서 입구 출입문이 잠겨 진입이 불가능하다. 출입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대문인 삼성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미륵원이 대청호를 향하고 있다. 후면은 경사면으로 되어 있는 부지에 전면에 있는 4개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된 1980년도에 복원되었다. 가운데 2칸은 넓은 대청과 양측에는 방으로 되어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미륵원은 고려말 이곳 호족이었던 회덕황씨의 2대조 황연기로부터 기이 아드님 황수이분의 아드님 황자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110년 동안(1322년~1440년) 여행자를 위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던 집입니다. 이집을 미륵원이라하고 집이 있던 터를 미륵원지라고 한다. 이곳에서 다시 높은 누각을 지어 길손들이 더위를 피해 쉬어가게 했으니 이 누각을 남루라한다. 회덕황씨가의 이러한 봉사활동은 당시 모든 사람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었고, 후한 민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적선에 의한 운영된 역사 깊은 생활유적으로, 행려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활동에서 점차 사회구조 및 봉사활동으로 확대한 대전 최초의 사회복지 기능을 수행한 민간기관이다. 원은 역과 역 사이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을 말한다. 대청호가 생기면서 미륵원지대 대부분이 수장되고, 그 일부와 남루고지가 대청호변에 남아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지금은 남루는 이축된 한식건물로 회덕황씨 후손들이 재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미륵원을 일명 굴파원이라고도 합니다.
    • 오피니언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3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침산동선돌
    중구 침산동에 위치한 '침산동선돌'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0cm, 높이 1.2m 화강암이다. 점말과 황새마을에서는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거리제를 지냈다. 마을 노인들이 대부분 돌아가셔서 제사를 주관 할 사람이 여의치 않아 198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 제사는 마을 앞의 논둑에 있는 장승에서 지냈는데, 본래는 수백 년 묵은 고목에서 지냈다. 1980년대 초반에 나무가 쓰러져서 그 자리에 장승과 미루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도 1980년대 후반에 말라죽어 장승만이 남았다. 현재 장승이 서있는 곳은 과거의 마을 입구로 남부순환도로 아래쪽 논둑이다. 2020년 3월 산성마을신문 일행과 답사 시 장마로 쓰러진 것을 중구청에 민원제기하여 세웠으나, 꺼꾸로 되어있었다. 다시 산성마을신문 답사팀 몇 분이 다시 당초 모습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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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28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김재만선생 정려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에 효자 김재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 비지정문화재이다.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팔작집이며, 그 안에 광서15년(1890)에 세운 비석이 있다. 김재만선생(1820~1868)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경여의 6대손으로 경주인이며, 회덕현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온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릴 때 숙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숙부가 돌아가자 3년간 효성을 다하여 산소를 보살폈는데, 얼마 후 양어머니인 숙모가 돌아가자 친부모처럼 애통하면서 3년 동안 묘를 지켰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 모범으로 삼고자 '동몽교관'으로 명하고 정려를 세웠다.
    • 오피니언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24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제월당 및 옥오재
    대덕구 읍내동에 '제월당 및 옥오재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월당]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중문이 있다. 그 안쪽에는 송규렴이 지은 제월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아들인 송상기가 지은 사랑채인 옥오재와 안채가 있다. 좌측에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제월당은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1630~1709) 선생이 1676년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이다. 제월은 선조인 쌍청당 송유의 쌍청 중 하나로 선조의 맑은 기품을 닮고자 하는 뜻이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기와 지붕을 올렸는데, 이곳에서 손님맞이와 독서 등을 하였다. 평면 형태는 전체가 6칸집으로 우측 4칸은 대청이고, 좌측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 뒤쪽으로 한 칸을 더 내어 상부는반침으로, 하부는 아궁이 함실로 쓰고 있다. 대청의 창호는 온돌방 쪽을 제외한 3면은 모두 띠살문 들어열개로 되었고, 온돌방과의 사이는 전 칸이 3분함 맹장지 들어열개로 되어 있다. 외부와 통하는 온돌방 창호는 쌍여닫이 2개와 외여닫이 1개가 달려있고 모두 띠살문이다. 화강석을 가공한 단층 기단을 토단까지 합하여 약한 자반 높이로 쌓아 축조하고 그 위에 역시 방형 주초석을 놓았다. 기단이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으로 외벌대 기단이라도 높이가 높다. [옥오재] 옥오재는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낸 송상기 1657~1723)가 안채에 붙여 지은 사랑채 건물이다. '옥오'는 차라리 깨어지더라도 옥을 택하겠다는 소신이 담긴 뜻으로, 충성스러운 말과 도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사랑채 옥오재와 안채는 중문을 끼고 붙어서 'ㄷ'자형 평면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와 사이에 안마당이 있고 그 뒤쪽으로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에 좌측에서 4칸은 툇마루가 놓여 있으며, 좌측 2칸은 대청마루이고 가운데 2칸은 사랑방이다. 사랑채 우측은 부엌이고 그 상부는 사랑방에서 다락으로 사용한다. 연이어 돌계단 3단을 내려오면 중문이 있고 이중문을 통하면 안마당에 들어선다. 안채는 사랑채를 제외하면 'ㄱ'자형 평면이 되는데 동쪽인 우측으로 여섯 개의 방이 병립되어 있고 북쪽 편에 부엌 1칸, 방2칸, 대청3칸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연결되면서 5칸의 툇마루가 부엌 쪽으로 붙어있으며, 이곳에서는 다른 양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남녀 공간의 엄격한 구별이 다소 누그러져서 여유가 있고 개방된 느낌을 준다. [가묘] 가묘는 별당과 사랑채 사이의 동측에 위치하여 서쪽을 정면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묘를 들어가자면 몇 단의 돌계단이 있고 별도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가묘는 정면 1칸에 앞으로 툇마루가 있고, 맞배지붕으로 된 조그만 규묘이다. 살림집인 안채, 별당인 제월당, 사랑채인 옥오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묘가 함께있어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는 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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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23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충주박씨대종중
    서구 도마동에 위치한 '충주박씨대종중'이 1990년에 지어진 충주박씨재실이 있다. 전면에는 영모재, 후면 사당은 추원사이다. 외삼문 가운데 '돈후문'과 '충주박씨재실', 좌우 협문에는 '도동서당'과 '충주박씨대종중' 현판이 걸려있다. '영모재'는 화강석 기단위에 전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이다. '추원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이다. 이곳에는 충주박씨의 시조인 고려부정 박 영을 비롯하여 박 진의 아버지 의랑공 광리까지 8세 선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재실 밖에는 박진의 유허비, 충청병마절도사 박형무, 상주판관 박원창, 의사 박사진, 의금부도사 박 로, 충원군 박동형 등 비가 있으며, 좌측 조금 떨어진 곳 박효함 신도비가 있다. 최근에 도로변 담장을 일부 허물고 지붕기와 보수 작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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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21
  • 가보자! 대전문화유산을 찾아서 / 판암동 왕버들 보호수
    동구 판암동에 지정번호 6-1-6-1-1로 1980년 9월 13일에 지정이 되었다. 수령은 지정당시 120년이 되었으며, 수고20m, 나무둘레 3.5m이다. 주변에는 문화재로 '쌍청당 송유묘표'와 '수옹송갑조 신도비 및 후기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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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섭,대전문화유산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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